선교학 강의록

선교학 강의록(15) : 20세기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발전(글-주태근)

주 바나바 2023. 7. 21. 09:21

선교학 강의록(15) : 20세기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발전(글-주태근)

 

 

8. 20세기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발전

 

세기가 바뀌면서 세 가지 중요한 운동이 기독교 선교역사에 중요한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들은 신앙선교운동, 성경학교운동, 자발적 학생운동이었다. 이 세 운동은 19세기의 후반부에 태동되었으나 190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이 세 운동은 모두 전적으로 북아메리카의 시대적 상황에서 출현하였다. 신앙선교운동과 성경학교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자발적 학생운동은 1930년대에 막을 내렸다.

 

 

신앙선교운동(Faith Mission Movement);

 

신앙선교는 확실한 지원처’(Captive constituency)를 갖지 않고 그들의 필요의 공급을 위해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사역을 하고자 한다. 대표적인 기관으로는 위클리프 성서번역회, 대학생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등이 있다.

신앙선교의 탁월한 특징 중 하나는 인내심이다. 여러 개의 단체들이 100년 이상 되었으면서도 강력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세기에 시작된 어떤 하나의 선교부도 문을 닫은 것이 없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의 끈기 있고 역동적인 성장이며 창의성이다. 20세기 선교활동의 대부분의 진보는 신앙선교에 의해 소개되었는데 이들은 라디오, 항공, 성경통신강좌, 복음의 녹음, 테이프, 카세트, 침투선교, 분교설치에 의한 신학교육 등이었다. ‘은둔한 사람들(Hidden Peoples)은 최근의 발상이다.

 

 

성경학교운동;

 

성경학교운동은 1880년대에 시작이 되었는데 신앙선교운동보다 더욱 북아메리카적 현상이 되었다. 1962년에 발간된 위트머의 차원있는 교육에 미국과 캐나다의 247개의 성경학교와 대학들의 목록이 담겨 있다. 최초 학교들은 나약(1882), 무디(1886), 온타리오(1894)등이다. 초기부터 이들 성경학교들은 국내와 해외 선교지의 필요성과 전도활동과 성경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최근에 이르러 많은 성경학교들은 그들의 교과과정에 인문과목을 추가하여 학사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여러 가지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들 성경학교들이 신앙선교의 지원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콜롬비아 성서대학, 나약 대학, 멀트노마 성서대학, 프래리 성서학교, 온타리오 성서대학등 해외선교를 위한 선교사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무디 성경학교는 놀랄 만한 기록을 내어왔다. 1890년 이래 5,800명 이상의 무디 졸업생들이 세계 각국의 108개국에서 255개 선교본부 아래 사역해오고 있다.

 

북아메리카 학교들만큼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유럽과 영국의 성경학교들도 선교사 훈련에 주요 역할을 담당해왔다. 오늘날 약 40개의 성경학교가 유럽대륙에 있고 29개가 영국에 있는데 학생수는 약 3,000명 가량이 된다. 대표적인 학교가 런던 스펄전 대학(1856), 글래스고우 성서훈련원(1892), 치스윅 레드클리프 선교훈련대학(1892)등이 있다.

 

 

자발적 학생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자발적 학생운동은 188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발달과 초기의 성공은 프린스턴 대학 졸업생이었던 로버트 윌더(Robert P. Wilder)의 선교비전과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였던 무디의 성령의 역사, 당시 코넬 대학교 학생이었던 존 모트(John R. Mott)의 천재적인 조직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것은 1886년 여름 매사추세츠의 마운트 헐몬에서 있었던 무디집회에서 100명의 대학생들과 신학생들이 하나님 뜻에 따라 해외선교사가 되겠습니다라는 프린스턴 서약에 사인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삽시간에 이 운동은 전 미국과 캐나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해외 여러 나라의 대학교들에 번져나갔다. 윌더가 만들어낸 이 운동의 표어는 우리 세대 안에 세계를 복음화 시키자였다.

 

이 운동의 가장 탁월한 특징은 4년마다 열리는 선교대회였는데 1891년에 오하이오의 클리블랜드에서 최초로 열렸다. 1920년 모네스 대회가 절정이 이르렀으며, 마지막 대회는 1936년 인디애나 폴리스에서 열렸는데 이때 자발적 학생운동은 실상 지친 상태에 있었다. 50년 동안에 이 운동은 대부분 북아메리카 출신이었던 20,200명의 학생들을 해외선교지에 파견하는 도구역할을 담당해왔던 것이다. 실제적으로 IVF의 학생선교회가 자발적 학생운동의 후계자이다.

 

 

식민주의의 붕괴;

 

1945년 이래 유엔의 회원국은 51개국에서 157개국으로 증가하였다. 이들 중 대부분의 나라가 소위 제3세계 국가로서 선교사들이 항상 활동하던 지역들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광대한 식민제도의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유엔과 세계의 세력균형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내와 해외의 기독교 선교의 명분과 과정에도 심오하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특히 세 가지의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첫째, 기독교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고 둘째로 국가교회들의 위치가 달라졌으며, 셋째 선교사의 임무가 달라졌다.

 

3세계에 기독교는 언제나 외국종교라는 인식을 받아왔고 더욱 나쁜 것은 식미주의와 동일시해 왔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식민주의자들과 함께 입국했었다. 그러나 식민주의자들과 함께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기독교는 스스로 설 수 있게 되었다.

 

토착교회의 지위도 달라졌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교회들은 독립을 얻었다. 그들은 더 이상 서구의 모교회들에게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지도자들은 선교사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임무에 변화가 왔다는 것이다. 주인에서 동반자로 이제는 토착교회의 종의 위치가 되었다. 이것은 쉬운 역할이 아니지만 시대가 변함으로서 그가 해야만 할 역할이었다.

 

독립쟁취와 더불어 동양의 위대한 민족종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방어적인 태도에서 공격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어떤 종교들은 그들이 국가의 공식종교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외국선교사들을 축출을 주장하기도, 토착교회의 활동을 막게 할 반대종법을 제정하기도 하며, 어떤 종파에서는 심지어 그들의 선교사들을 서방에 보내어 서양인들을 개종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 결과 미국에서 동양의 신비주의, 명상, 요가, 선불교 등의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공산주의의 출현;

 

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종교의 무자비한 적수인 공산주의가 아시아에 들어오게 되었고,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도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몽고, 북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의 모든 선교활동은 종식되었다. 러시아와 중국은 아프리카의 불안정한 나날의 혼탁한 물속에서 낚시질을 하였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오랫동안 혁명을 준비해오고 있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로마 카톨릭 신부들이 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하는 게릴라들과 합세하기도 하였다. 어디든 공산주의가 득세하는 곳에는 교회와 선교사들이 고난을 당하였다.

 

 

선교사의 감소;

 

최근 전후세대의 미국 주요교단의 선교활동과 관심이 현저히 쇠퇴해 왔다. 19713,160명에서 19791,985명으로 감소하였다. 이 상황을 유발한 여러 요인이 있는데 첫째로 토착교회들이 독립과 성장을 이룩함에 따라 정책적으로 선교부들은 점차 의도적으로 해외 선교활동을 줄여왔다. 둘째로 민족주의로 인해 선교지에서 생활과 사역이 더욱 어려워졌다. 셋째로 신학교에 등록하는 숫자가 적음으로 목회사역과 선교활동을 위한 지원자들이 부족한 상태에 있다. 넷째로는 수많은 주요 교단들은 행정예산에 대한 지원의 현저한 감소를 겪고 있다. 보수적인 성도들이 공권투쟁, 국가건립, 혁명을 조장하는 지도자들을 증가시키는 일에 반대하고 있다. 다섯째로 신보편구제설(Neo Universalisim)과 같은 신학적 자유주의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크리스천 선교의 맥을 자르고 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없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문제들도 쌓여 있는 이때에 교회들이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가 전하려고 서두를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남침례교 교단과 같은 보수적인 교단은 도리어 신학적인 관점이 선교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작은 선교부들이 계속 성장하고 있는데 1942년 창설된 신종족선교회는 이제 950명의 선교사를 보유하고 있고, 1935년에 창설된 위클리프 성서번역회는 3,500명의 사역자를 가지고 있다.

 

 

단기 선교활동;

 

1960년대 두 가지 새로운 프로그램이 발달하였다. 단기 해외 선교활동과 여름 선교활동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대단한 인기를 누려 어떤 선교부들은 매년의 새 지원자들의 반수가 단기선교사들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제트시대의 신속한 여행과 미국사회의 풍요로움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여름 선교활동이 단기 선교활동보다 더욱 인기가 있다.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선교단체의 후원 아래 해외에서 봉사한다. 그들은 그들의 여행경비와 때로는 숙식비까지도 책임을 진다. 몇 몇의 기독교대학들은 여름 선교활동은 대학생들의 해외선교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들 두 프로그램의 최종결과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그러나 최근의 보고에 따르면 25%의 단기선교사들이 경력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에 조사에 따르면 단기 선교활동에 대한 근본 동기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선교사의 목적과 목표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와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라디오 선교;

 

거의 100년 동안 교회들은 선교모임에서마다 바람에게 우청찬 소리를 내어주시오라는 노래를 불러왔다. 귀에 익은 가사들은 최초의 라디오 선교방송인 HCJB가 에쿠아도르에서 시자고디었다. 1931년 크리스마스날 퀴토(Quito) 시에만 들리는 소형은 250와트짜리 송신기를 가지고 방송하게 되었다. 이 초라한 시작으로부터 오늘날 여러 선교단체들이 소유하고 경영하는 만 개의 기독교 프로그램들이 상업방송국에서 매주 방영되고 있다. 마닐라에 위치한 극동방송국의 활동이야말로 오늘날 라디오 선교방송이 하고 있는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성경통신강좌;

 

라디오방송과 더불어 성경 방송통신강좌가 실시된다. 대부분의 방송국들은 자체의 성경학교를 방송으로 운영하고 있다. 수년 동안 수백만 명이 이들 과정에 등록하였다. 이들 통신과정은 두 가지 큰 이점이 있다. 그것은 대개 무료로 제공되며 가정에서 사사로이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심지어 사람들이 감히 교회에 가려 하지 않는 이슬람 지역에서도 수만 명이 현재 성경 통신강좌의 방법으로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있다. 1960년대에 세 가지 중대한 발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의 성장, 심도있는 복음화운동 그리고 분교에 의한 신학교육이었다.

 

 

교회성장;

 

최초 교회성장은 오레곤 주 유진(Eugene)에 위치해 있다가 후에 갤리포니아의 파사데나로 이전한 풀러신학교의 교회성장연구소에서 시작되었다. 전인도선교사였던 도날드 맥가브란 박사가 창시자로서 수년 동안 교회성장연구소의 관리자였다. 맥가브란이 말하는 성장이란 언제나 영적 성장을 의미한다. 그는 좀 더 많고 큰 예산이나 건물 또는 행정조직에는 관심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의 성장은 개종자를 얻고 모든 족속을 제자삼아 교회를 증가시키는 것 즉 한마디로 교회성장이었다.

세 가지 부수적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교회성장 회보라는 월간지 발행, 교회성장 도서 클럽, 윌리암 케리 도서관등 이었다.

 

 

심도 있는 복음전도(EID);

 

두 번째 발전이 심도있는 복음전도(Evangelism-in-Depth)는 전 라틴아메리카 선교부의 총무였던 케네스 스트라챈(R. Kenneth Strachan) 박사의 업적이다. 이 운동은 주어진 나라의 교회들이 가진 전체의 자원을 활용하여 그 나라의 모든 국민에게 구어체든 문어체 형식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EID에 깔려있는 철학은 네 가지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1) 넉넉히 씨를 뿌림으로 넉넉히 거둔다. 2) 크리스천들은 복음전도를 위해 협력하여 일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 3)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자원을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증가시킨다. 4) 헌신된 소수가 민족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EID의 특징은 유동성(mobilization)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스트라챈 박사는 공산주의, 여호와의 증인, 기타 역동적인 그룹들의 선전방안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후 다음과 같은 원리를 선언하였다. “어떤 운동의 성장은 전체 회원들이 자신들의 믿는 바를 꾸준히 선전하도록 이끄는 것을 성공하는 데에 정비례 한다

 

 

분교를 이용한 신학교육(TEE);

 

세 번째의 운동은 분교를 통한 신학교육이었다. 이는 라틴 아메리카의 실존적 상황에서 자라났다. 그곳에는 급속한 교회성장과 기존 신학교들이 정상적인 역할을 담당치 못하는 결과로 거의 6만 명 정도의 목회자들이 성경이나 신학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들 목회자들은 이미 목회를 하고 있었고 농장, 가게 또는 가족을 떠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훈련을 받아야 한다면 그들에게 가주어야만 그들이 신학교에 갈 수가 있었다.

 

1960년 과테말라의 장로교에서 시작되었다. 랄프 윈터가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제도는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로 전파되었고 결국 아프리카와 아시아에까지 확장되었다.

 

 

선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

 

1960년대 중반, 한때 대학캠퍼스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에 대한 관심이 극히 낮았던 적이 있었다. 선교지도자들은 선교사를 모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상황은 호전되었다. 이 변화는 여러 요인에 기인했던바 그중의 하나는 IVF가 매3년마다 개최하는 저 유명한 어바나 선교대회였다. 198114,000명의 대학생들이 어바나 대회에 참가하였다.

다른 요인은 IVF, 네비게이토 선교회, CCC등의 단체들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훌륭한 사역을 했다는 점이다. 매년 증가된 숫자의 신학교 초년생들은 이들 단체 출신들이다. 이들은 기독교 가정과 교회에서 자란 젊은이들보다 훌륭한 제자의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그 요인은 아마도 가장 유력한 것으로 우리나라 젊은이들 사이에 움직이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감동일 것이다. 카리스마틱 운동이 로마 카톨릭 교회를 포함하여 주요 교단을 침략해왔다. 그 결과 성경공부 모임이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가게, 학교, 공장, 사무실, 은행 등지에서 전국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이는 인간 지도자나 인간의 조직력이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 젊은이들은 결국 성경대학이나 신학교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며, 선교지에 갈 인원들일 것이다.

 

 

선교의 국제화;

 

현대 서구세계에 근거하고 있는 선교활동은 언제나 기독교 세계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을 모두 포함하는 범국가적 활동이었다. 20세기 초반에는 세계의 선교사가 3명 중 미국인이 1명꼴 밖에는 안 되었다. 오늘날 그 비율은 3명 중 2명꼴이다. 증가의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세계 제2차대전 중에 독일선교는 큰 타격을 받아 오늘까지 그 타격을 벌충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영국도 이전처럼 해나갈 능력이 없다. 지금으로는 미국 밖에 없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과거 영국에 기반을 둔 특정한 신앙선교활동들이 전후 북아메리카에 지부들을 개설해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범주 안에 BMMF국제선교부(BMMF Internatioal), 일본복음단(Japan Evangelistic Band), 성서유니온(Scripture Union), 북아프리카 선교회(North Africa Mission)등이 들어간다. 원래 미국에 근거를 두었던 여러 개의 신앙선교부는 최근 세계의 다른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고 현재는 여러 곳의 서구 국가들에서 재정지원과 모집사무소를 가지고 있다. 위클리프 성서번역회, 선교항공연합, 복음방송, 트랜스 세계 라디오방송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그 활동이 미국으로 제한되었던 여러 개의 특수단체들도 최근에 이르러서 그 규모가 국제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성경클럽운동, 십대선교회, 기드온협회, 기독교 사업가모임, 어린이 전도협회, 생명의 말씀협회, 고등학교 복음협회, 영라이프, 네비게이토, 대학생선교회 등이다.

 

 

기독교 문서활동;

 

선교사들은 언제나 인쇄에 우선권을 두어왔다. 세람포어(Rerampore)에서의 케리의 동료였던 윌리암 와드(William Ward)는 전문적인 인쇄기술자였고 북인도에서 최초의 선교출판소를 운영하였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가 정권을 장악한 직후 아더 브라운(Arthur J. Brown)은 보고하기를 오늘날 세계 각처의 프로테스탄트 선교부는 160개의 인쇄기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들은 매년 4억 페이지의 기독교 문서를 찍어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관들은 기독교문서선교회, 해외복음문서선교회, 문서선교회, 세계문서선교회, OM선교회 , 무디문서선교회 등이 있다.

 

 

3세계 선교;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세계선교는 백인들의 책임이라는 사상에 젖어있었다. 이 개념은 18-19세기에 서구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하며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모두 그들 스스로 해낸 데에서 유래한다. 오직 남태평양 지역에서만 토착민들이 선교활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제3세계의 신생’(younger) 교회들이 국내와 해외에서의 선교사역에 대한 책임을 떠맡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15,250명의 유색인종 선교사들이 타문화권에서 사역하고 있다. 기대하는 바와 같이 아시아가 길을 인도하고 있는데 한국, 일본, 필리핀이 그 선구자들이다. 아시아에 여러 나라에서 초교파적 선교협회가 구성되고 있다. 1970년에는 6개의 자치교회들이 해외선교활동을 촉진시킴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수행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아시아지역 기독교 선교연합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Fellowship)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1975년에 아시아선교협회가 같은 해 동서양 협력기구가 조직되었다. 19768월 중국인 크리스천들이 중국인 합동회의를 열었으며, 19812차 대회 때 중국 이외의 지역에 사는 4천만 명에 달하는 동포들의 영혼구원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19771월 인도복음협회는 선교와 복음전도에 관한 전인도대회를 후원하였다.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교회들도 뒤늦게 시작했으나 나름대로의 공헌을 하기 시작하였다. 브라질은 전 라틴아메리카 선교사의 75%를 공급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서아프리카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주로 복음이 미치지 않은 곳에 사는 나이지리아 부족들 사이에서 활약하는 해외선교사들과 국내 전도활동을 하는 부부선교사들 260쌍을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