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강의록(16) : 현대선교신학 1 (교수-주태근)
Ⅵ. 현대선교신학
현대선교신학은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으로 양분되어 있다. 에큐메니칼 진영은 주로 선교의 ‘사회참여’ 입장을 주장하며, 세계교회협의회(W.C.C)계통에서 주장되고 있고, 복음주의 진영은 선교의 ‘복음전도’ 입장을 주장하며, 세계교회협의회 안에서의 소수의 주장이거나, 세계교회협의회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사람들로 주도된다. 이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상당부분에서 대립하고,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서로 일치보다는 대립의 구도가 심화되고 있다. 이런 대립구도는 ‘하나님의 선교’의 등장과 방콕대회의 “오늘날의 구원”(Salvation Today)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후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복음화’와 ‘인간화’, 그리고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논쟁은 교회를 분리시키고, 교회의 힘을 낭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복음주의 진영은 이원론적인 개념을 기준으로 구분되며, 에큐메니칼 진영은 이원론을 극복하려고는 하나,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지향한다. 결국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신학의 유형이란 ‘역사적인 차원’과 초자연적인 차원‘ 사이에 발생하는 상관관계의 해석의 유형이다.
에큐메니칼 선교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란 단어는 헬라어 오이쿠메네(οικουμενη)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의 의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세상’(the whole inhabited world)이란 뜻으로서, 신학적으로는 ‘세계 기독교인의 연합’(World-wide Christian unity)을 의미한다. 즉 교회를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인류의 새로운 공동체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70인역 성서에서도 사용 되며 세계, 대지(earth), 혹은 흙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들을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비서트 후프트(W.A. Visser’Thooft)는 이것이 역사적으로는 크게 다른 세 가지 의미, 첫째로 사람이 거주하는 온 세상, 둘째로 초기 교회와 관련된 교회생활, 셋째로 현대의 발전된 개념으로서 기독교의 하나 됨을 바라는 표현으로서 특히 선교와 관련되어 사용된다고 보았다. 즉, 신약성경에서도 종종 사용된 이 단어는 사실상 교리적인 문제로 인한 교회의 분열과 분쟁을 막고 그 연합을 도모하기 위한 교회 회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태동은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선교는 서방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제국주의와 함께 비기독교국가에 전투적으로 침투되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피선교지에 많은 부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이 탄생하게 된다. 바로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개최된 최초의 에큐메니칼 운동인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The World Missionary Conference_WMC)이다. 이 대회는 159개 선교 단체 1,600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그들 중 대다수가 앵글로 색슨 계통의 사람들로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였다는 것을 볼 때 당시 신학적 성향을 발견 할 수 있다. 제국주의로 대표되는 당시 신학적 성향은 제국주의라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 무력을 등에 업고 시행된 선교라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 사용된 다음과 같은 용어들-‘군인들’,‘세력’,‘전진’,‘군대’,‘부흥단’,‘전진명령’,‘전쟁협의회’,‘전략’-속에서도 제국주의적 개념들이 잘 들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선교는 무엇보다 에큐메니칼 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에큐메니칼 협력이 절실하게 필요해진 가장 큰 요인은 두 가지이다. 1) 당시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건설은 토착민들과 그들의 사회에 서구 백인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선교 자체에 대한불신을 심어주었다. 2) 각 교파별로 활동한 선교 단체들 간의 중복, 경쟁으로 선교적 자원 낭비가 가중되고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에큐메니칼 협력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였고 이 대회는 이후 196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된 세계선교협의회의 제 3차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성격이 가장 크게 들어나는 협의회인 WCC와 통합하여 에큐메니칼 선교의 중심에서 모든 사역을 감당한다.
1) 에딘버러 대회(1910년)
1910년 개최된 이 선교대회는 종교개혁 이후 최초로 분열 되었던 기독교 교파들이 한자리에 모인 회의이다. 에딘버러 선교회의의 가장 큰 의의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탄생을 평가하고 있다. 이 회의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교파들 간에 서로 연합하고 협력해야 함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교리적 차이 혹은 교회의 예전적인 차이에 대한 토론을 일절 금하기로 규정하였다. 이는 오직 ‘선교를 위한 연합’이라는 복음주의적 동기의 결과였다. 10세기 이전에는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진행하여 왔는데 이 회의를 통하여 교회와 선교회가 함께 선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부분은 교회의 선교적 직무를 재고하였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그러나 이 회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서방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선교대회 참석자 1,355명 중 피선교지(신생교회 출신)대표는 17명에 불과했다. 특별히 에딘버러 선교대회는 신학적 연구 보다는 어떻게 하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즉 “How Mission?”에 대해서 집중하였다. 또한 에딘버러 대회는 그 어느 대회보다 더 포용성과 공동성을 드러냈고 교회 간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협력하려는 의지와 의욕이 대단히 컸다. 따라서 이 선교대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서 모인 것은 아니었으나 시대적 분위기와 상황을 인식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 후 WMC의 제 1분과 위원회는 범세계적인 선교사명을 강조하면서, 이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합과 협동이 중요함을 강조, 이를 위한 전담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10년 후, 1921년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IMC)의 창설로 이어지면서 선교를 위한 연합과 일치의 기운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이상과 같이 에딘버러대회는 에큐메니칼운동의 선구적대회로 ‘세계복음화’를 그 이상으로 천명하였다. 그런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교회가 연합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복음화를 위한 책임은 “기독교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개개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며, 그런 책임 수행을 위해서는 기독교인들 간의 좀 더 긴밀한 연합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2) 예루살렘 대회(1928년)
에딘버러 선교대회 이후, 선교 지도자들이 한데 모여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구체적 논의를 지속해 나갔다. 이 모임은 1921년 국제선교협의회(IMC)의 창설로 이어졌다. 그 후 1928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세계선교대회가 열렸는데 그 당시의 세계 상황은 냉전 체제 속 굉장히 혼란한 분위기였다. 이 대회는 에딘버러 대회와 만찬가지로 세계 복음 선교의 의무를 천명하였다. 또한 복음 선교 사업의 수행을 위하여 세계 교회가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전의 대회들이 ‘메시지’를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메시지’를 그 첫 과제로 삼은 것이 바로 예루살렘대회였다. 이 대회의 주제는 “세속화와 사회 복음”으로 선교에 있어 사회적 역할을 논의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대회의 세속 사회에 대한 관심은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다. 따라서 세속주의가 새로운 선교적 과제로 인식되었고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무가 강조되었다. 즉 세속주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주의도 선교 대상의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의 과업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개인 영혼에게 전하는 일과 아울러 모든 인간이 완전한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독교적 문화와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는 새로운 선교 개념을 열어 놓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회의 그 주된 논의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의 영혼을 위한 메시지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조직과 경제관계를 위한 메시지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3) 휫트비 대회(1947년)
6년간 이어진 2차 세계대전 전후, 전 세계 개신교회가 실질적으로 다시 재결합한 IMC 총회가 1947년 캐나다 온타리오에 위치한 휫트비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40여 개국의 112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이 대회는 이전의 대회들보다 그 규모적인 면에서 작았으나 국제선교협의회의 계속적인 연속선상에 있는 회의로 소집되었던 것에 그 의미가 있다. 이 대회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 그리스도 증언”을 주제로 각 나라의 참가 교회로부터 전쟁이 각 나라 교회에 미친 영향을 보고 받았으며 복음의 재발견과 본질에 대한 탐구를 이어 나갔다. 이것은 전후 혼란해진 전 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도전과 선교의 의미를 재탐색하는 것으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즉 선교에 대한 범세계적 차원이 강조된 것이다. 특히, 자립, 자치, 자력 전파의 소위 ‘Three self Formula’를 강조하여 선교와 교회의 관계를 정립하였고 과거 선교사가 피선교지 교회와 지도자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것을 일소하여 동등한 자세에서 “복종하는 협력자”로 정의하였다. 즉 선교의 구조가 상하 위계질서를 벗어나 “복종하는 동등한 협력자 관계”가 비로소 선언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사역자로서의 동등한 역할을 뜻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나눔의 공동체가 해야 할 과제였다. 결론적으로 이 대회의 특별한 의의는 전후에 교회가 그 본래의 사업인 선교 사업으로 복귀할 것을 다짐했다는 것과 선교 모교회와 피선교지 자교회간에 선교에 대한 정신과 목적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동역자로서 협력할 것을 다짐했다는 것이다.
4) 윌링겐 대회(1952년)
1952년 7월 독일의 윌링겐에서 제 5차 IMC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이후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새로운 지표로서의 역할을 하는 중요한 대회로 기록되었다. 이 대회는 이전의 제국주의적 승리위주의 선교 대신 “십자가 아래의 선교”를 주장하였으나 잡다한 신학 사상으로 통일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세계 선교계 전반에는 이미 “하나님은 이미 교회 밖 세상에서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새로운 선교신학이 요청됨과 동시에 발생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빌링겐 대회 이후 선교의 주체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며, 교회는 그의 도구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호켄다이크(Johannes C. Hoekendijk)는 ‘하나님 선교’(MissioDei)이론을 등장시키는데, 이 대회를 통하여 그는 교회는 이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적 활동의 도구이며, “이 세상에 평화(Shalom)를 건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메시아(즉 그리스도)이시고, 그 메시아는 바로 선교사시라는 것이다. 선교는 바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이며 선교는 교회의 본질 자체에 속하는 과업이라고 선언 했다. 이렇게 등장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이후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기반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선교 개념(복음 전파)을 뛰어넘어 “세상 속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들”로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이전부터 거론되었던 사회 참여와 타종교 수용 문제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 할 수 있는 대회로 기록되어지고 있다.
5) 뉴델리 총회(1961년)
1961년 11월 19일부터 12월 5일까지 인도 뉴델리(New Delhi)에서 제 3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열렸다. 174교회로부터 온 582명의 대표들을 비롯한 다수의 참석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란 주제 하에서 교회의 증거적 및 봉사적 과업과 어울러 연합의 필요성을 새롭게 다짐했다. 이 대회의 가장 특이할만한 점은 오랜 시간 통합을 모색해 오던 국제선교협의회(IMC)와 WCC가 통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가장 거대한 에큐메니칼 선교 협의회가 완전히 하나를 이룬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즉 이 대회는 선교와 교회가 일치를 보임으로 교회의 존재 이유와 근거가 선교에 있음을 분명히 한 대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제3차 뉴델리 총회에서 규정된 WCC 헌장이다. 이 헌장을 통해 WCC가 추구하는 선교적 직무를 살펴 볼 수 있다. 1)‘신앙과 직제’와 ‘생활과 봉사’그리고 국제선교 협의회의 사업수행을 위해서 2)교회들에 의한 공동의 활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3)상호 협력을 위한 연구를 진척시키기 위해서 4)모든 회원 교회들에 있어서 에큐메니칼 정신과 선교일치를 도모하기 위해서 5)국가 교회협의회와 세계적인 고백교회 기구들과 다른 에큐메니칼 조직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설립하기 위해서 6)많은 요구사항이 발생될 경우 특정 목적을 위한 세계대회를 소집하고, 그러한 대회들이 그들이 촉구하는 사업에 활력적인 매개체가 되기 위해서 IMC 와 WCC가 통합된 1961년 뉴델리 총회의 특징은 윌링겐 대회에서 채택된 호켄다이크의 ‘하나님의 선교론’이 WCC의 공식적인 선교신학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교회의 사회참여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전 윌링겐 대회에 이어서 전통적 교회관에 대해 교회의 존재 이유를 선교에 집중시켜 교회의 임무를 다시 한 번 재확인 하였고 더 나아가 교회는 타자와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의 타종교와의 대화를 고무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뉴델리 총회는 1952년 윌링겐 IMC 대회가 주요 논제로 제기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하는 회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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