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강의록

선교학 강의록(14) :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확장(교수-주태근)

주 바나바 2023. 6. 22. 15:34

선교학 강의록(14) :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확장(교수-주태근)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확장

다대오 기념교회(이란 성지)

케네스 스콧트 라토렛은 그의 7권으로 된 기념비적인 저서 기독교 선교사(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가운데서 3권의 책을 그가 '위대한 세기'라고 불렀던 19세기에 할애하고 있다. 일찍이 기독교회사의 그 어느 때에도 이때처럼 협조적이고 조직적이며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려던 때는 없었다.

 

 

십자가와 국기;

 

남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의 식민지제도가 1810~1824년 사이에 붕괴되었다.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중동 등 세계의 여러 다른 지역들에서는 선교활동이 유럽 세력의 급속한 팽창과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 외교관, 상인, 선교사의 주요 세 그룹들이 침략활동에 관련되어 있었다.

지리적으로 십자가가 국기를 뒤따랐다. 덴마크 할레 선교부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인도 동부해안의 네덜란드 식민지시기에 트랭쿠바로 떠났다. 그 후 19세기에 영국 선교사들이 영국 국기를 따라 인도와 아프리카로 떠났다. 동인도제도에는 많은 숫자의 네덜란드 독일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식민지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선교사들은 어느 한 지역에 집중하지 않았다. 미국 선교사들은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었고, 특히 극동지역에 가장 많았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한둘의 소규모 영국선교부 외에 별로 활동이 없었다.

연대순으로 보면, 국기가 십자가를 따랐다. 영국과 프랑스가 오세아니아 지역에 그들의 식민통치를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선교사들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중앙아프라카의 미개지를 개발하여 '상업과 기독교를 위한 도로'를 건설한 것도 식민주의자들이 아니라 선교사들이었다. 아랍인들에 의한 사악한 아프라카인 노예무역을 막도록 유럽세력을 끌어들였던 것도 선교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미 ()식민통치가 행해지고 있던 지역에서도, 선교사들은 그 지역 너머까지 선교지역을 확장하고자 안간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다.

 

 

네 종류의 선교사업;

 

근대 선교사업이 시작될 때 여러 종류의 선교활동이 나타났다.

(1) 최초의 선교회들은 초교파적이었다.

(2) 후에 선교운동이 힘을 얻게 된 후 각각의 교파들은 자체의 선교부를 결성하고 교단의 지원과 통제를 받았다. 영국 국교회가 10~11개의 독립된 선교부를 조직했는데 그 어느 것도 교단의 공식적 선교회는 아니었다.

(3) 세번째 종류의 선교인 신앙선교(faith mission)가 세기 중엽에 나타났다. 이러한 선교활동이 최초로 나타난 곳은 영국제도였고, 제나나 의료선교회(1852, 오늘날 BMMF), 영국 시리아 선교회(1860, 오늘날 중동 기독교선교회), 중국 내륙선교회(1865, 오늘날 해외선교회) 등이 있다. 그 후 다른 선교회들이 급속히 뒤를 이었고, 세기 말에는 영국에 24개 정도의 신앙선교회들이 존재하였다. 대서양 방면에서는 여성연합선교회(1860, 오늘날 BMMF 국제선교회와 합병), 기독교선교연합(1887), 중국내륙선교부 미국지부(1888), 복음연합선교회(1890), SIM국제선교부(1893), 아프라카 내륙선교회(1895) 등이 있다. 이 세종류의 선교활동은 조직체적 구조와 지원방법은 달랐지만, 모두 복음전파, 의료활동, 교육사업에 광범위하게 관여하였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4) 네번째는 어떤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 사역하는 선교활동이 등장하였다. 즉 유대인들, 원주민들, 에스키모, 언어장애인들, 시각장애인들, 군인들, 고아들, 여인들, 아이들, 나병환자들 등이었다.

1967년에 발간된 현대기독교 선교백과에서는 서방에 근거를 두고 있는 선교기관이 1437개라고 밝히고 있으며, 1980년에 발간된 선교핸드북: 해외에서 활동하는 북아메리카 신교 선교활동에는 북아메리카 지역에서만 보아도 선교사를 보내고 재정지원하는 선교기관이 714개가 된다고 밝히고 있다.

 

 

성서공회들;

 

때를 맞춰 프로테스탄트 각국은 자체의 성서공회 등을 조직하였다. 오늘날 스튜가르트에 있는 본부와 더불어 연합성서공회에 66개가 소속되어 있다. 이들 중 네 개의 성서공회들은 세계 기독교선교에 엄청난 공헌을 끼쳐왔다. 영국 해외 성서공회(1804), 스코틀랜드 국가 성서공회(1809), 네덜란드 성서공회(1814), 미국 성서공회(1816) 등이다.

인류역사상 한 권의 책을 번역, 출판, 보급하기 위해 이토록 많은 기관들이 조직된 적은 없었다. 오랜 세월동안 이들 기관들은 교단이나 신학적 주장 또는 지리적 위치에 상관없이 여러 선교단체들과 밀접하게 손잡고 일해 왔다.

 

 

선교의 성격;

 

무엇이 선교사들의 역량이었는가?

학력으로 볼 때, 선교사들은 무식한 직공들로부터 대학졸업자들까지 다양했다. 독일과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대학출신이었고, 초기 미국 출신 선교사들도 그러하였다. 한편 영국출신 선교사들은 그렇지못했다. 1815~1891년 사이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650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는데 그 중 240명 만이 대학 출신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은 안수받은 목회자들이 아니라 평신도들이었다. 런던선교회에서 최초로 파송한 선교사들이 1796년 남태평양을 향해 항해하였는데, 30명 중 4명만이 안수받은 이들이었고 나머지는 직공들이었다. 19세기 말 신앙선교가 선교무대에 등장한 뒤 이러한 추세는 더해졌는데, 허드슨 테일러는 '정식교육을 거의 받지 아니한'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호소를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영적 능력에 대해 말하지면, 그들은 부족한 지적 능력을 기독교인다운 성격으로 보충하였다. 거의 예외 없이 19세기 선교사들은 깊은 신앙과 사랑이 가득한 남녀들이었다. 그들은 '너무 늦기 전'에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데 어떤 고통도 아끼지 않았다. 펄벅(Pearl Buck)은 그녀의 부모님에 대한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초기 선교사들은 타고난 전사요, 영웅들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종교는 아직도 그 아래서 싸워야 할 군기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 아래서 죽는 것조차도 영광스러운 최후였던 기독교의 깃발을 휘날리며 가지 않았다면, 그 어떤 나약한 사람이나 겁쟁이도 외국 땅을 향해 항해해 가서 죽음과 위험에 도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찾아가고, 울부짖어 기도하고, 복음 전하며,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일이야말로 이미 구원받은 영혼들의 놀랄 만큼 급박한 임무였던 것이다. 거기에는 광기 같은 요청-구원의 고뇌-이 있었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받은 대우;

 

선교사들은 어떤 종류의 대우를 받았는가?

선교사역을 하는 동안 그들은 무관심, 의심, 적대감, 핍박, 투옥 등을 당했다. 수없이 그들의 집이 약탈당하고 집이 불태워지고 교회가 황폐화되고 그들의 생명이 위협받았다. 수천 명이 건강이 상해 집으로 돌아갔다. 또 다른 수천 명은 열대병으로 때이른 죽음을 맞이하였다. 수백 명이 순교자가 되었다.

그 중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반응이었다. 통상적으로 선교사들은 환영받지 못했고 호감을 얻지 못하였으며 신뢰받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메시지는 배척받았다. 미국 최초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은 1813년 랭군에 도착하여 6년만에 최초의 개종자를 얻었고, 중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은 7년만에, 북로데시아(잠비아)의 원시감리교회는 아프리카인 한 사람을 세례주기까지 13년이 걸렸다. 태국에서는 미국회중교회 선교사들이 1831년부터 18년동안 사역했으나 한명의 개종자도 얻지 못했고, 미국 침례교회에서도 1840년부터 17년동안 사역했으나 한명의 태국인도 얻지 못했다. 미국 장로교인들이 1840년에 그곳에 가서 19년간 노력한 후에야 최초의 태국인 개종자를 얻을 수 있었다.

 

 

참아낸 고통들;

 

선교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교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대량의 살인자는 말라리아, 황달병, 장티푸스, 이질 등이었다.

우간다로 떠나기 위해 중국 선교부에서 고별사를 할 때 알렉산더 맥케이는 말하였다. "6개월 이내에 당신들은 아마 우리들 중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겁니다. 그 소식을 들을 때 낙담하지 말고 다른 누군가를,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즉시 보내십시오." 그 후 3개월 안에 8명 중 1명이 죽었고, 1년 안에 5명이 죽었으며, 2년이 되었을 때 맥케이 자신만이 홀로 살아남았다. 몰려드는 죽음의 위협에 대면하면서 그는 12년간 투쟁하다가 그도 결국 열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서부아프리카는 '백인들의 무덤'이라고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1960년대 아프리카를 방문했던 아들라이 스티븐슨 2세는 그가 본 선교사들의 무덤 숫자에 아연실색하였다. 그는 ", 하나님, 이토록 많은 선교사들이 여기서 죽은 줄 몰랐습니다"라고 외쳤다. 시에라레온에서 교회선교부는 초기 20년 동안 53명의 선교사들을 잃었다. 리베리아에서는 그 손실이 더욱 컸다. 최초의 미국감리교 선교사였던 멜빌 콕스는 1833년 리베리아에 도착하였는데 도착한 지 4개월 만에 죽었다. 그 마지막 말은 "천 명이 죽더라도 아프리카를 포기하지 말게 하소서"였다.

아프리카에서 폭력적 죽음은 많지 않았다. 인도에서도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달랐다. 거의 매 10년마다 외세에 대항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사건에서는 189명 이상의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출한 선교사들;

 

19세기를 '위대한 세기'라고 부르는 하나의 이유는 이 때에 수많은 선교사들을 배출시켰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역사상 그 어느 때에도 이토록 은하수와 같은 많은 숫자의 거물급 선교사들을 낳은 적이 없었다. 1965년 뉴욕의 선교사 연구도서관에서 발간한 최초의 선교사 자서전 목록에는 2286명의 완성된 자서전들이 명시되어 있다. 대부분이 위에서 언급한 세기에 속해 있다.

윌리암 케리는 인도에서 40년간 사역하였다. 그는 인도와 동남아시아 35개의 언어와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37년간 버마에서 사역하며 성경을 버마어로 번역하였고 버마 영어사전을 완성하였다. 로버트 모리슨은 27년간, 성경을 중국 고대 왱리어로 번역하는 일과 6권짜리 중국어 사전을 편찬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나라별로 헌신한 위대한 선교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 국 : 웻즈 윌리암스, 제인스 레그, 마틴, 칼 구츨라프, 허드슨 테일러, 그리피스 존, 데이빗 힐, 티모시 리차드, 칼 라이첼 등

인 도 : 알렉산더 더프, 레지날드 허버, 존 스쿠더, 제임스 도번, 윌리암 밀러, 크리스천 슈와츠 등

일 본 : 제임스 헵번, 기도 버벡, 사무엘 브라운

한 국 : 호레이스 언더우드, 헨리 아펜젤러

남태평양 : 존 패튼, 존 페테슨, 존 게디

중 동 : 사이러스 햄린(이스탄불에 로버트 대학 설립), 다니엘 블리스(시리안 프로테스탄트 대학 설립)

아프리카 : 데이빗 리빙스턴(중앙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아랍인들의 노예무역을 고발하고, 이 암흑대륙에 '상업과 기독교를 위한 길'을 여는 데 공헌함), 로버트 모펫(리빙스턴의 장인, 50년간 성경번역과 교회 설립을 위해 헌신), 단 크로포드, 프랑소와 코일라드, 제임스 스튜어트, 도날드 프래저, 알렉산더 맥케이, 메어리 슬레저 등

 

 

선교업적;

 

19세기 선교사들은, 혼자의 힘과 굉장한 용기를 가지고 당시의 사회악을 퇴치하였다. 인도의 조혼, 과부의 순사, 성전에서의 창녀활동, 불촉천민, 그리고 중국에서의 전족, 아편중독, 어린아이 유기, 아프리카에서의 일부다처제, 노예무역, 쌍둥이 상해 등. 그리고 그들은 세계 도처에 학교, 병원, 보건소, 의과대학, 고아원, 나병치료소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은 빈민들에게 도움과 원조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위험을 부릅쓰고 기근과 홍수, 역병, 재앙들과 싸웠다. 그들은 버려진 아기들을 양육하고, 소녀들을 교육하고, 여자들의 자유를 허용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비기독교 세계에 최고의 자유를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복음은 말 그대로 세상 끝까지 전파되었다. 십자가의 사자들은 그린랜드의 얼어붙은 황무지로부터 아프리카의 찌는 듯한 정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지구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라토렛이 19세기를 '위대한 세기'라 불렀던 것은 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