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강의록(10) : 교수 주태근
2. 유럽의 기독교: A.D. 500-1200
6~8세기, 중세 암흑기에 무자비한 야만족의 침략을 받지 않았던 아일랜드는 영국과 대륙의 학자들을 받아들여 당대의 최고 수준의 교육을 맡겼다. 그리고 선교에 대한 열망은 아일랜드 교회의 특징이었다. 패트릭 때 이후로 교회는 철저히 복음적이었고 선교적이었다. 6세기로부터 7세기에 이르는 동안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교 교회들 중 하나가 되었다. 해박한 성경지식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아일랜드의 선교사들은 기독교 유럽을 뒤흔들고자 위협하고 있던 이방종교에 대항하기 위해 놀라운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들은 스코틀랜드의 사나운 피트족, 영국의 야만인이었던 앵글로색슨족, 베네룩스의 프리즐란드족과 같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들을 바쳤다. 그들은 어디에 가든지 기독교 문화와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수도원들을 설립하였다.
영국 ;
영국의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6세기에 이르러서 기독교는 영국에 영구적인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것은 563년에 아일랜드가 북부 영국을, 596년에 로마가 남부를 공격해 온 두 차례의 침략의 결과였다.
일찍이 영국에 의해 복음전도를 받은 아일랜드가 역으로 귀족 태생의 학문과 재능이 뛰어난 콜럼바(Columba)를 보내었다. 콜럼바는 그의 나이 42세 때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아일랜드 해협을 건너가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가에 위치한 아이오나(Iona)섬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한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와 해안의 섬들을 여행하면서 농부들과 어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개종자들을 교육시켰으며,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모두 아이오나의 중앙통제 하에 이루어졌다. 아이오나에 있었던 그 수도원은 그 후 200년 동안이나 영국과 유럽의 전지역에 선교사들을 계속하여 파견하였다.
아일랜드 선교사들은 영국인들의 미움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노덤브리아(Northumbria)의 야만족이었던 앵글로색슨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콜럼바의 후계자였던 아이단(Aidan)은 영국 동부 해안의 린디스판(Lindisfarne)에 수도원을 세우고 635년에 노덤브리아의 중심부로 진격하는 성전을 시작하였다. 치열한 전투 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노덤브리아의 왕이었던 오스왈드(Oswald)는 수도원들에 기부금을 바침으로써 기독교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아이단의 뒤를 이은 쿠트버트(Cuthbert)가 앵글족의 선교를 완수하였다.
한편, 콜럼바가 죽기 1년 전(596년)에 교황 그레고리 1세가 40명의 베네딕트 수도승들과 함께 어거스틴을 영국에 파견하였다. 켄트(Kent)에 상륙한 어거스틴과 7명의 수도승들은 왕 에텔버트(Ethelbert)의 환대를 받았다. 왕은 어거스틴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자유를 주었고, 어거스틴과 그의 일행에게 켄터베리(Canterbury)에 묵을 수 있는 곳과 음식을 제공해 주었다. 그 후 1년이 지나기 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하루에 10,000명이 세례를 받고 켄터베리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컨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영국 선교의 완성은 요크(York)의 주교였던 윌프리드(Wilfrid: 634~709)가 7세기 말엽 서섹스(Sussex) 지방에 살던 색슨족을 복음화하면서 이루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영국은 아일랜드 교회의 선교정신을 받아들여 그 후 2세기 동안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고올(Gaul);
고올 지방은 이전에 수차례 복음화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교도가 득세하였다. 6세기에 콜럼반(Columban)이 그의 나이 40세 때 12명의 동료를 이끌고 독일로 향하였다. 그는 버건디(Burgundy) 지방에 정착하여 룩세일(Luxeuil)에 한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20년 간의 고된 노력 후 상류층의 부도덕에 대해 거침없이 비난한 것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사 추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와 그의 켈트족 수도승들은 라인강을 건너가 현대 스위스인들의 조상이었던 야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이교도에 대항하여 우상을 부수고 사원을 불태워 그곳에 수도원들을 건립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다시 도피하게 되었고, 결국 북부 이탈리아로 옮겨가서 보비오(Bobbio)에 수도원을 건축하였다.
네덜란드;
692년에 노덤브리아 출신의 수도승이었던 윌리브로드(Willibrord)는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북해를 건너가 프리지아인들(Frisians)에게 최초로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40년 간 여러 수도원들을 설립하였다. 이 기간 중 가장 어려웠던 점은 핍박이 아니라 정치였다. 프리지아인들은 이들 선교사들을 권력에 굶주린 궁정대신이었던 피핀과 그의 부하 프랑크족들의 일당이라고 생각하였다. 윌리브로드는 이들 두 민족의 정치적 갈등 사이에 끼어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선교활동은 성공적이었으며 이들 프리지아인들 사이에 강력한 교회가 성장하였다.
독일;
많은 사람들이 중세기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추앙하는 보니페이스(Boniface: 680~754)는 영국의 귀족 출신이며 베네딕트 수도승이었는데 중년에 독일에 갔다. 그는 탁월한 학자요, 뛰어난 조직가이며 열렬한 전도자로서 독일교회의 기초를 공고히 다져놓았다. 그는 40년 이상의 탁월한 선교경력 후 독일을 위한 사도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되었다. 741년에 당시 사악한 세대에 부패한 각종 주정뱅이들과 간음자들, 심지어는 살인자들의 소굴이 되었던 프랑크족 교회를 개혁하기에 이르렀다. 말년에 그는 독일을 떠나 프리지안인들이 아직 이교도이던 네덜란드 지역으로 가서 놀라운 능력으로 설교하여 많은 회심자들을 얻었다.
색슨족;
색슨족의 회심은 샤를마누(Charlemagne: 771~814)의 집권기에 일어났다. 그것은 도덕적, 종교적 설득보다는 군사적 정복에 의해 효과적으로 실현되었다. 1000년 동안 지속된 신성로마제국의 최초의 통치자였던 샤를마뉴 대제는 다른 많은 황제들처럼 정복을 일삼았는데 그의 경우 종교와 정치를 혼합하여 그가 정복했던 이방족속들에게 종교적 안위와 문명의 이득을 제시하였다. 800년에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형태로 교회와 국가가 부정하게 동맹하게 되었을 때 교회는 영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육적 수단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야만적인 색슨족은 기독교도 문명도 원치 않았다. 이 두 가지는 무력으로 강요되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잔학행위가 자행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교사들이 회심자를 거의 얻지 못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색슨족은 그들 고유의 잔인함으로 대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고통과 기도로 선교사들은 묵묵히 선교사업을 계속하여 마침내 샤를마뉴의 죽음에 미쳐 색슨족의 ‘회심’은 완성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은 9세기 당시 영국과 대륙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알프레드 대제(Alfred the Great)가 878년에 대승을 거두어 약 30명의 바이킹 지도자들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그 대세는 바뀌었다.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그들의 이방신을 포함한 그들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선교는 성공하지 못했다. 독실한 황제 루이(Louis the Pious)는 북부지방에 기독교를 보급시키는 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수도승이었던 앙스카(Anskar: 801~865)를 보내었다. 스웨덴에 당도한 앙스카는 거기서 18개월을 지내면서 많은 귀족들이 신앙을 갖도록 인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웨덴에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그가 돌아오자 루이 왕은 교황 그레고리 4세와 협의하여 앙스카를 스웨덴 민족과 데인족, 북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교황의 사절로 파견하였다. 832년경에 그는 함부르크의 대주교로 서품을 받자 즉각적으로 그의 관구를 선교활동의 조직망 중심지로 삼았다. 그는 대단한 인내와 요령으로 기독교의 대적자였던 덴마크의 왕 호릭(Horic)의 신임을 얻어 2개의 교회를 짓도록 허가를 받았다. 앙스카는 어려움과 반대를 극복하고, 인내와 집념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궁극적 전도의 길을 닦아 놓았으며, 이곳에서 그는 오늘날까지 북부의 사도라고 추앙받고 있다.
덴마크;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 여러 국가들 중 복음을 최초로 받은 나라였다. 최초로 기독교와 접촉한 것은 독일 국경을 조금 지난 곳에 있는 함부르크 관구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10세기 초 기독교의 강력한 적대자였던 ‘곰 왕(King Gorm)’은 기독교를 덴마크로부터 추방하는 정책을 썼다. 이로 인해 교회들이 파괴되었고 사제들이 처형되었다. 덴마크 교회의 운명은 왕들의 집권에 따라 달라졌다. 1018~1035년까지 덴마크와 영국의 기독교 왕이었던 카누트(Canute) 치세 하에 기독교는 확고히 설립되었다.
노르웨이;
노르웨이에는 기독교가 영국으로부터 전해졌다. 영국에서 자라 기독교 신자가 된 노르웨이 왕 학콘(Haakon)이 기독교를 노르웨이에 최초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과 고위층들로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반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조심스럽게 전도하였다. 올라프 트릭바슨(Olaf Tryggvason: 963~1000)의 치세하에 그의 열렬한 지원을 받아 기독교는 노르웨이에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 그는 무력과 회유를 겸한 독특한 정책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올라프 하랄드슨(Olaf Haraldson)에 이르러서야 기독교를 노르웨이의 종교로 만들게 되었다.
스웨덴;
앙스카 이후 기독교는 스웨덴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실패하였다. 10세기경에 많은 선교사들이 이 나라에서 활동하였다. 올라프 스코트코눙(Olaf Scotkonung: 993~1024)이 최초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지원한 왕이 되었다. 그는 노르웨이의 다른 왕들과는 달리 회심자를 얻기 위한 무력사용을 피했다. 1164년 웁살라에 최초의 관구가 설립된 이후 스웨덴은 명목상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동유럽 여러 나라들;
이 지역은 기독교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로부터 흘러들어왔다. 무함마드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멸망(2453) 때까지 비잔틴대제국은 동유럽의 이슬람교 침입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모라비아;
10세기에 비잔틴제국이 르네상스기를 겪고 있을 당시 동방교회는 북부유럽의 비기독교인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선교사들은 콘스탄틴(Constantine)과 메소디우스(Methodius)였다. 이들 두 형제들은 모라비아의 군주였던 라티스라브(Ratislav)의 요구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감독에 의해 모리비아(현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로 파견되었다. 콘스탄틴이 그 언어를 성경과 기도문으로 번역하고 작성하도록 전환함으로써 슬라브 문명의 기초를 다졌다. 예배 시 모국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새로운 발걸음이었으며 19세기와 20세기의 근대 선교활동에서 꽃을 피우게 된 전례가 되었다. 메소디우스는 성경 전체를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885년 그가 죽고 난 후 모라비아의 기독교 공동체는 부패한 세태와 야합하고 말았다. 모라비아로부터 쫓겨난 그의 제자들은 불가리아로 복음을 들고 갔다.
불가리아;
불가리아 민족의 개종은 865년경 보리스(Boris) 왕이 세례 받은 후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후 그는 후에 슬라브 기독교 문화의 빛나는 중심지가 되었던 한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선교사인 클레멘트(Clement)를 마게도니아에 보내어 그곳에 선교사 양성대학을 세웠다. 그의 아들 시므온 왕은 주교들에게 불가리아 교회를 자립하도록 하여 감독을 하나 세우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였다. 불가리아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는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와 러시아에 전파되었다. 그들은 가장 위대한 선교사들 중에 속한다.
러시아;
기독교를 러시아에 전파하기 위해 두 가지 시도가 행해졌으나 둘 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 첫 번째는 9세기 중반에 감독 포티우스(Photius)가 키에프(Kiev) 궁정에 한 선교단을 보내어 실패한 사건이다. 그리고 1세기 후 올가 공주(Princess Olga)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성대하게 세례를 받은 후 기독교를 그녀의 왕국에 소개하려고 시도했으나 귀족들로부터 끈질긴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자였던 블라디미르(Vladimir: 980~1015)때에 이르러서야 기독교가 러시아에 영구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폴란드;
폴란드에 기독교가 자리를 잡은 것은 10~11세기에 군주제가 정립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한다. 그것은 미스카 공작(Duke Mieszka)의 회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 볼레슬로(Boleslaw: 922~1025)의 재임 중 폴란드는 동유럽 최대의 왕국이 되었다. 볼레슬로의 열렬한 지원 덕택에 교회의 운명은 국가의 발전과 발을 맞춰 번영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정치력과 교세는 쇠퇴하고 말았다. 그 후 가혹한 핍박이 행해져 교회와 수도원들이 파괴되었고 승려들은 축출되었다. 볼레슬로 3세(1102~1139)하에서 어느 정도 교회질서가 회복되었다.
1200년경에 이르러 전유럽인들이 명목상 기독교인들이었다고 보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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