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 강의록

중세교회의 예배-교수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7. 23. 19:45

예배학 강의록(3) : 교수 주태근

 

D. 중세교회의 예배

 

기독교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로마의 콘슨탄틴 대제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일이었다. 콘슨탄틴 대제는 기독교인들의 일요일을 법적으로 성스러운 날로 지정하였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으며 이교도의 재산을 이용해서 교회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의 관심은 너무 커서 기독교를 능동적으로 관장하기까지 이르렀으며 그리하여 기독교는 383년 결국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껏 개인 혹은 가정이나 동굴들을 찾아 이십 명 또는 삼십 명씩 분산되어 소집단으로 모이던 무리들이 한 곳에 집결되게 되었고 이들의 수용을 위해서 대형화된 교회의 건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수의 무리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의 집전을 위하여 성직자의 위치와 권위가 점차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예배로의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예배의 조건들은 외적인 형식과 의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갔고 기독교가 국교가 된 이후에는 부작용이 예배 현장에까지 미쳐 신비적 요소와 미신적 형태를 발생시켜 놓는 결과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이렇게 외적인 형식과 예식을 강조하게 된 것은 로마가돌릭 교회의 성례전주의(Sacramentalis)와 성직주의(Sacerdotalism)의 신학제도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토록 비약한 의식위주의 교회는 드디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와의 예배 양식에 대한 심각한 대립을 야기시키는 데 결국 1054년 동방과 서방교회와의 영원한 분열이라는 불행을 남기게 되었다. 동방교회의 의식의 정교와 서방교회의 원시적 예배에 대한 곡해로 인해서 동. 서양 교회는 설교의 쇠퇴를 보게 되었는데 즉 성찬예배는 설교 없이 행해졌으며 그 결과 본래 있었던 말씀과 성례전과의 균형이 상실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동방교회는 제정 러시아를 중심으로 존속하였고 서방교회는 로마의 지배하에 그 영향이 전세계에 미치게 되었다.

 

 

1. 동방교회의 예배

 

동방교회라고 해서 처음부터 예배의 형태나 내용을 급진적으로 수정하거나 이질적인 방법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59) 콘슨탄틴 황제가 개종함으로써 지하의 교회가 지상의 교회로 등장하고 기독교의의 영역이 급팽창하면서 갑작스럽게 확장되어 버린 기독교는 지역적 분할이 불가피해졌고 그들의 특성에 따라 신학적인 교리의 정립을 허용해야 했으며 예배의 형태도 곳에 따라 각각의 특수성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350-380년경에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동방교회는 그의 교구를 정착시켰고, 그때부터 예전의 독특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동방에는 알렉산드리아식, 수리아식, 비쟌틴식으로 알려진 3대 유형이 있었는데 비쟌틴 예배식은 정통교회(Orthodox Church)가 채용한 예배식이 되었다. 동방교회의 예배의식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데, 헬라 문화를 배경으로한 동방교회는 자연적으로 시와 문화와 예술과 철학을 숭앙하여 그것이 많은 부분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이런 영향으로 동방교회 예배의식에서는 신비스런 행사가 많이 발견된다. 이것은 영원한 말씀이 역사 가운데 참여했다는 사실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래서 일반인들은 성소에 접근할 수 없었다. 동방교회는 교회의 명절들을 기념하는 예배를 굉장히 치장하여 성대히 거행하며 예배의 정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에 관심을 많이 둔 이유로 자연히 교회 안에서는 수많은 상징이 놓이게 되었고 미적인 장식과 깊은 신비의 가시적 추구가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언어를 사용하는 말씀의 예전보다는 신비의 능력과 표현이 담겨있는 성만찬 예배에 더욱 큰 강조점을 부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예배의 현상은 개혁자들의 눈에 우상숭배라는 낙인이 찍혀지고 말았으며 이단적 취급을 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2. 서방교회의 예배

 

서방교회의 예배내용과 순서는 초기 기독교 예배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즉 말씀과 성례전의 두 가지 기본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방교회는 로마인들의 실용주의 정신이 예배 속에 적용되어 일상의 예배의식상의 구체적인 면에 대한 발전을 가져왔다. 교회 건축에 있어서 동방교회와는 외형상의 모습도 완전히 달리 하였고 예배의 내용도 단순화시켜 버렸다. 그래서 서방교회 예배의식은 미사나 예배의식에 고정된 예배순서를 사용하지 않고 찬송가나 기도문, 교독문을 계절에 따라 바꾸었으며 절기에 따라 작품들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것들은 교회법규와 제반 교회 행사들의 발전을 가져왔으나,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배의식에는 몇 가지 결점이 있다고 Segler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a. 미사의 화해적 성격을 강조하여 모든 종류의 악폐를 유발하였다.

b. 회중은 예배의 참여자이기 보다 단순히 방관자가 되었다.

c. 미사는 서로 맞지 않고 알기 어려운 서로 다른 출처에서 취한 기도들을 주워 모은 것이 되었다.

d. 성찬의 음식과 예배자들을 봉헌하시는 성령님을 위한 기도가 없었다.

f. 미사는 죽은 날로 드려졌기 때문에 정적이었다. 이것은 무식한 회중 사이에 미신을 조장하였다.

이처럼 교회의 본래 모습을 예배 가운데 상실한 중세교회는 면죄부 판매와 같은 계속되는 모순을 범하며 위태한 지경에 빠졌으며 이 모순들이 그 시대를 암흑기로 몰고 가게 되자 드디어 광명의 새아침을 추구하는 참신한 개혁의 일군들이 나타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