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를 회복시켜 주소서!(행1:6-8)
북한선교주일
우리나라는 지난 주 육이오 전쟁 육십 주년을 보냈습니다. 우리민족에게는 지난 기억 속에서 육이오 전쟁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후 60여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남한이 북한 인민군의 침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을 잊지 못함은 이런 과오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역사적 교훈 때문입니다.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감행한 그 날을 경험한 세대와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세대 사이에는 상당한 인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당시 남한의 형편은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있을 것을 분명하게 내다보고 있지 못하였기에 전쟁을 대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주한 미국 대사 무치오도 “미군은 철수하나 인민군의 남침은 없을 것이다”라고 믿고, 그런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남한에 구속되어 있던 유명한 공산당원 이주하, 김삼용과 평양에 감금되어 있던 조만식 선생과 38선 어디에서나 맞바꾸자는 제안도 인민군들이 요구해 왔었습니다. 전쟁과는 거리가 먼 계교였습니다. 결국 북한은 그들의 계획대로 남침을 감행했고, 남쪽은 살아남기 위해 피를 흘리며 서로 싸워야만 했습니다. 전쟁 3년이라는 긴 세월, 밀고 밀리고 죽이고 죽고하며 문자 그대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하다 마침내 지금까지 휴전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북한의 도발이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무슨 모양으로든지 북한은 남침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시작하여, KAL기 폭파 사건, 아웅산 사건, 금강산 사건, 천안함 사태 등을 연출하며 끊임없이 대한민국을 압박했습니다. 금강산 관광, 나진, 선봉의 공업단지, 개성공단 등도 모두 그들의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안의 일부였음이 결국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살아서 이만한 수준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 못지않은 대통령 이승만이 그 난세에 그토록 당당하게 선두에 서서 우리들의 갈 길을 밝혀 주었고, 동시에 미국과 같은 힘센 우방이 있어서 곧 달려와 사경을 헤매던 우리를 살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날 이런 역사적 사실을 다음 세대에 그대로 가르치지 않고, 교단에 선 교직자들의 상당수가 어린이들에게, “육이오는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었다. 잔인무도한 미국을 반대하고,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북의 우리 동족들을 도와야 할 것 아니냐?”는 왜곡된 역사교육으로 세대 간의 갈등의 폭이 깊어 졌습니다. 결국 왜곡된 교육를 받은 그 아이들이 마침내 성장하여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진출하고 교육자도 되고 사회운동가도 되고, 더러는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법관이 되었고, 변호사가 되었고, 정부 요직에 앉는 대한민국의 지도급 인사가 되었으니, 우리나라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미래를 산다’라는 책에서 인류 역사 이래 죄가 없었던 때, 죄가 없는 나라, 죄가 없는 민족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나라는 건재한데 어떤 나라는 망했다고 말하면서, 나라가 망하게 되는 세 가지 큰 이유를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 나라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 나라,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나라, 바로 책임소재가 분명치 아니하므로 그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부정적인 면에서 집단행동이 강한 나라입니다. 집단행동은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집단적인 행동을 ‘의’로 착각하는 나라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주장한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악이 집단화될 때 그 힘을 정의의 기초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멸망의 징조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기중심주의가 강한 나라입니다. 내 생각, 내 주의, 내 철학, 내 명예 등이 강하고 공동의 유익을 위한 생각이 적을 때 그 나라는 망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의식이 바로 서야 합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고 바른 역사의식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가 바로서고 사회의 모든 분야가 안정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왜곡된 역사의식을 바로 세워가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가 싹트며 자리 잡게 됩니다. 동시에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임하고 전쟁이 없는 행복한 나라로 굳게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유대인들의 간곡한 희망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향하여 간곡히 외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렇습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간절히 원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난 날 억압과 설움 속에서도 '나라의 회복'이라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회복이란 곧 자유와 번영과 영광을 뜻합니다. 그런데 결코 이 '나라의 회복'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자유와 해방을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주적 종말론적 세계적인 변화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세속적인 나라, 신령한 나라, 종말론적인 나라의 회복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별되어 있지 않은, 연계된 상태에서 유대인들은 나라의 회복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메시야의 세대와 메시야의 관계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세대를 위하여 메시야가 있는 것이냐? 아니면 메시야가 있어서 메시야의 세대가 오는 것이냐?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메시야를 영문으로‘a Christ’와 ‘the Christ’로 구분해서 생각합니다. ‘a Christ’는 평화와 자유와 번영을 구가하는 메시야의 세대, 보다 잘사는 세대, 보다 안정된 세대, 모두 평화롭게 사는 세대를 이루기 위하여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공헌하는 자는 전부가 메시야라는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자도 메시야가 될 수 있고, 예술가도 메시야가 될 수 있고, 농부도 메시야가 될 수 있고, 정치가도 메시야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적인 메시야 세대관에 집착하는 나머지, 메시야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데에 공헌하는 자는 모두가 하나의 작은 메시야입니다.
그런가하면 성경은 ‘the Christ’ 즉 ‘그 메시야’, 오직 한 분인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자로 오시는 종말론적인 그 메시야만이 메시야요, 그 메시야로 말미암아 메시야의 세대는 오는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야가 먼저요 그 다음이 메시야의 세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은 이 메시야의 세대와 메시야에 대한 확실한 해석은 내리지도 않은 채 메시야를 학수고대 했습니다. 메시야만 오면 만사 오케이, 잘살게 되고, 원수는 다 물러가고 평화가 오고 자유가 오고 번영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번에 화끈하게, 영원히 거하는 메시야의 나라를 기대합니다.
흥망성쇠라는 역사의 굴레 속에, 그 전철을 따라 다시 망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요, 다시 타락하는 나라가 아니요, 다시 점령되는 나라가 아닌, 완전히 회복된 나라, 영원한 나라를 기다립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의 시절만큼 나라의 영광과 영화를 누려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다윗의 나라, 솔로몬의 왕국과 같은 시절이, 그런 나라가 다시 임했으면, 종말론적인 영원한 메시야의 나라가 왔으면 하고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성경말씀을 믿고 외우면서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이런 메시야 대망이 그들의 사상이요, 그들의 철학이요, 그들의 정치요, 그들의 모든 이상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렇게도 기다리던 그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많은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권능을 행사하시고, 말씀을 들려주시고, 권세 있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메시야의 모습은 저들을 놀라게 했으며 만족케 했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권능을 지닌 그 메시야가 언젠가는 정말 큰 역사를, 메시야의 나라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우주적인 큰 역사를 이루실 때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그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아는 유대인들의 실망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두 청년이 실족하여 엠마오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바로 그 현장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며칠 전에 죽은 예수만 생각하니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과 동행하게 된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인 줄도 모르고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 대화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분으로 믿었는데 죽었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로마 군인에 의해서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분이 부활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희는 실망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이 말은“왜 고난의 메시야를 모르느냐, 고난의 메시야를 통하여 영광의 메시야가 있는 줄을 왜! 모르느냐?”라고 메시아에 관한 바른 이해를 돕는 성경의 말씀을 들어서 자세히 설명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예수께서 정치적 메시야로서,‘a Christ’로서 이스라엘을 회복해주시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메시야가 오시리라 기대했고, 예수를 보면서 메시야가 왔다고 믿었고, 그리고 그 메시야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사실, 그들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로마의 엄청난 권력 앞에서 중동지구의 조그마한 나라 유대로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꼼짝 못하고 속국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왔으니 저분이 이루실 것이다. 모든 것을 그 메시야 한 분에게만 기대했습니다.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의 드라마는 예수의 죽으심으로 실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데 십자가에서 죽은 그 예수가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었던 희망이 살아났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희망에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바로 지금이야말로 저분이 메시야의 나라를 이루실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그 앞에서 이주 조심스럽게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 얼마나 절실하고 간절한 질문입니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후에는 고통이 없는, 주님께는 능력이 있으므로 이후에는 가난이 없는, 주님께는 사망을 이기는 권세가 있으므로 이후에는 전쟁이 없는, 이후에는 아무 고통도 없는, 이러한 메시야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라는 성경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었기에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물음은 어쩌면 당연한 물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이 마치 동문서답 같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고 여쭙는데,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앞뒤가 좀 안 맞는, 피상적으로 보면 분명히 동문서답입니다. 그러나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면 이것이야말로 저들의 물음에 대한 해결방법입니다. 구체적인 방도를 가르쳐주심이요, 저들의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주심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나라의 회복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사명까지 일러주시는 중요한 대답입니다. 이것은 우주적인 해답이요 가장 현실적인 해답이요 종말론적인 해답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해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두 가지의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는 알 바 아니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그 시기와 때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망할 때에 이유가 있고, 흥할 때에 이유가 있습니다. 나라가 회복되는 데에 이유가 있고, 나라가 소멸하는 데에 이유가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역사는 운행된다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복도 은혜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 민족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나, 이 민족이 나라를 회복하여 영광을 누리는 것이나, 오늘의 번영과 안정을 누리는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권한에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 역시 하나님의 권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바른 자세로 서야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해결방안은 복음전파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교가 해결의 길이라는 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예수 믿게 되는 것이 바로 해결의 길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에게 이루어져야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일 없이는 이 나라의 안정도 없습니다. 이 나라의 자유도, 평화도 보장될 수 없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하는 스가랴4장6절의 말씀과도 같이,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는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너희가 성령의 권능을 받음으로 가능하다고 대답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이것이 바로 나라 회복의, 해결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나라의 회복은 더 넓고 깊은, 우주적인 하나님나라 안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나라의 회복, 새 나라의 건설이라는 것은 복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큰 기적을 바라지는 마십시오. 한 심령 한 심령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데서부터 시작입니다. 사람과 제도를 바꾸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마음에 임해야 합니다. 북한을 변화시키고 선교하는 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한반도에 임해야 합니다. 나라가 사는 길도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능력이 이 민족위에 임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문제요 말씀의 문제요 성령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성령을 받아 중생하고 증인이 될 때에 비로소 이 나라의 회복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나라가 진정 회복되는 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합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반드시 이 나라의 모든 것들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나라와 민족을 회복시키기 위해 잠언 기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잠14:3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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