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구원의 열정(눅 15:3-7)
목사 주태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역의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라는 전쟁영화가 있습니다. 세계 2차대전 중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오마하 해변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미군 밀러대위는 부하들과 함께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상륙임무를 완수합니다. 같은 시각, 전사자 통보업무를 진행하던 미국 행정부는 네 형제가 모두 참전한 라이언 집안에서 세 명의 젊은이가 이미 전사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막내도 낙하산으로 그 상륙작전에 침투되었습니다. 비탄에 빠진 라이언 부인을 위해 마샬 장군은 네 번째 아들인 제임스 라이언을 반드시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그 특수명령은 이제 막 상륙한 밀러 대위에게 내려졌습니다.
밀러대위는 일곱 명의 대원을 데리고 그를 찾아 나섭니다. 여덟 명이 한명을 구하러 가라는 무모한 명령에 대해, 부대원들은 “도대체 세상에 이런 이상한 계산이 어디 있어!”라고 투덜댑니다.
그러자, 밀러대위는 말합니다. “라이언은 착한 사람일 거야. 우리가 구해야 할 가치가 있을 만큼.” 부대원들은 독일 군 지역 깊숙이 들어가 전투를 치룹니다. 찾아 가는 도중 동명이인의 다른 라이언을 만나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몇 명의 대원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죽어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부대원들은 과연 1명을 구하기 위해 8명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1명의 목숨이 8명의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가?”
드디어 라멜 지역에서 문제의 라이언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라이언 일병을 찾기는 했지만, 불행하게도 마지막 전투에서 라이언 일병만이 살고 밀러대위와 소대원 전원이 죽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 라이언 일병에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기를 바란다. 이 모습들을 감사히 받아라!”. 그들의 희생을 감사히 받으라는 말입니다. <오직 너 하나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용기와 희생으로 너는 살아났다.
그들은 더 이상 바칠 것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는 있다. 너는 그들의 희생에 걸 맞는 인생을 살아가라.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그들이 행한 일을 감사히 받아라.> 이것이 영화를 만든 스필버그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양치는 목자는 <잃은 양 하나>를 구출하기 위해 99마리를 들판에 버려두어야 하는 위기를 감수합니다. 적어도 그중에 몇 십 마리는 강도들에게 노출되었을 것이 분명 합니다.
늑대에게 물려가 잃어버릴 것도 각오하였습니다. 심지어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스스로 험한 골짜기와 벼랑 끝으로 내려가는 희생과 죽음의 위험도 감수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온갖 수치와 모욕, 방해를 참으면서 죄인 된 나를 구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가치적으로 비교하자면 99대 1 밖에 안 되는 지극히 무가치한 <죄인 된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셨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잃었던 양 한 마리>를 찾은 즐거움이 기존의 99마리에 대한 기쁨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크다고 표현했습니다. <잃은 한 마리>를 찾았다고 온 이웃들을 불러 대대적인 잔치도 베풀었습니다.
너무 감동적입니다. 과연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즐거움이 이토록 큰 것이었을까? 한 생명을 위해 99 마리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은 도덕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더욱이 하나님 아들의 생명보다 내 생명이 더 귀하거나 가치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명의 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99마리가 아무리 귀하지만 1마리가 채워져야만 100마리가 됩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가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가족회복을 위해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전체를 구성하는 <나 하나의 소중함>을 강조합니다!
<겨우 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만큼 소중하고 귀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 그만큼 중요한 존재입니다. <나는 단지 나 한사람의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있어야 하나님의 가족이 진정 온전한 가족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손해보고, 예수님이 낮아지고 모욕을 당하며, 예수님이 희생하심을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이요 복음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영혼구원의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영혼구원의 목적을 이루며 존재하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영혼구원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하고 들먹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영혼구원 즉 불신자를 건지는 일에 전념하는 교회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방주라고 비유하면서 영혼구원에 전념해야 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안타깝게 방주는 방주인데, 구원선이 아니라 유람선 같은 교회가 많은 것을 봅니다.
유람선 같은 교회는 교인끼리 친목을 도모하여 놀기를 좋아하고 은혜를 체험하며 편하고 쉽게 교회생활을 하며, 적당히 봉사와 헌금을 하는 교인에 의해 유지되는 교회입니다. 유람객 같은 기성교인이나 타 교회의 교인들을 모아서 교회가 커지는 것을 성장했다고 자랑하는 교회들 입니다.
어쩌다가 교회 밖의 불신세상 바다에 낚시를 던져 불신고기를 가끔 심심풀이로 잡아 올리는 교회가 유람선의 교회입니다. 교회가 영혼구원 때문에 바쁘고 고단한 것이 아니라 놀러 다니는 야유회, 친목회, 낚시, 등산, 단풍놀이 등등의 일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교회가 유람선 교회입니다.
유람선 같은 교회는 잠깐 사는 동안 재미있고 편하고 좋은 것 같지만 마지막에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유람선의 선장대역인 목회자, 항해사, 기관장, 갑판장 같은 장로, 권사등의 중직자들 및 제직들은 큰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깥세상의 바다에 엄청나게 많은 불신자들이 빠져 허덕이고 있는데 관광을 하는 유람선 같이 방관하고 있으니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구원선 같은 교회는 오늘날 그리 많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분명히 교회는 구원선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람선 같은 모습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구원선 같은 교회는 영혼구원 즉 불신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그 일을 위해 전념하는 교회입니다.
불신 영혼을 건지는 일 때문에 온 교회가 바쁘고 고단한 것이요, 선장대역인 목회자, 항해사, 기관장, 갑판장 같은 장로, 권사 등의 중진들이 영혼구원에 바쁜 교회입니다. 모든 행사, 계획이 불신영혼 구원에 맞추어져 그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가 바로 구원선의 교회입니다.
해마다 수백 수천수만의 불신고기를 잡아 올리고 그들을 양육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교회가 구원선의 교회입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얼마나 불신영혼을 건져 많이 살려내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물론 구원선 같은 교회도 친목과 놀이모임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닙니다. 친교는 하되, 불신고기를 많이 잡은 후에 잠깐 휴식을 취하고 정비를 하고 그물을 깁느라고 놀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선의 교인들은 고단하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개중에는 유람선 같은 교회로 일부러 옮겨 타는 이들도 있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선의 교인들은 반드시 마지막에 큰 영광과 상이 기다리고 있기에 참 성도는 구원선의 교인이 되려고 힘쓰며 노력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생명을 살리는 희열은 의사가 병자를 살리는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것임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교회는 유람선인가? 구원선인가? 분명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구원선의 교회로 바꾸기만 하면 교회는 반드시 부흥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구원선 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교회는 이제 깨어나 유람선에서 구원선이 되기를 간절히 열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양들에 대한 구원의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적 의미에서 볼 때에 잃은 양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다 잃은 양들입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범죄 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고 천국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저주받아 황폐한 땅에서 목자 잃은 양같이 수고하고 방황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모두가 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신앙 생활하다가 낙심하여 타락한 자들도 모두가 다 잃은 양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잃어버린 양도 목자의 품안에서 다른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과 함께 보살핌을 받고 있다가 잃어버린 양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 동안 내가 미워하고 외면했으며 무시했던 자들도 모두가 다 잃어버린 양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전도하지 못한 모든 자들이나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잃어버렸던 자들은 모두가 다 영적으로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리고 잃은 양은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범죄 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사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이나 믿다가 낙심한 자들은 물론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며 원망하는 원수들에게까지도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험악한 광야를 헤매는 목자의 심정으로 찾아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에 만족하지 않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목자처럼 한국 교회 안의 수천 수만의 성도들에게 만족하지 말고 죄와 저주, 멸망의 길에서 방황하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과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태신자 전도운동은 바로 잃은 양을 찾는 생명구원운동입니다. 우리교회는 금년이 다 되기 전에 한 사람이 세 사람의 영혼을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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