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강의록

교회의 사명-교수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18. 09:45

교회론 강의록(10) : 교수 주태근

 

 

. 교회의 사명

 

교회의 사명이란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으로 교회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이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그 자신의 독특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 사명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으로서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계속 존재하는 한 교회가 반드시 추구하고 완수해야 할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명이란 다음과 같다. 예배, 말씀선포(Kerygma), 교육(Didache), 친교(Koynonia), 봉사(Diakonia), 초대교회의 특징은 이 다섯 가지 측면을 잘 조화하여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모범적인 교회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다섯 가지 사명 중 어느 한쪽에 치우쳐 기형적인 교회로 되는 수가 많다. 우리가 반드시 추구해야 될 것은 교회가 다섯 가지 사명을 동일하고 균형 있게 성숙되도록 하는 일이다.

 

 

1. 예배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모든 구속사의 중심에 예배 운동이 있었다. 셋이 에노스를 낳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고(4:26),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단을 쌓고 예배하였으며(8:20),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여호와의 현현 앞에 예배하였으며,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코자 함이었고(3:12), 다윗은 예배를 위해 최대의 성전 연보를 하였고(대상29:14),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대대로 예배하기를 간구하였으며(대하6:21),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예배의 회복을 부르짖었다(29:13). 예수님은 예배의 주인으로 오셔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것을 말씀하셨다(4:24). 참된 예배(16:13-17; 4:23-25)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하나님께만 예배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예배는 영과 진리의 예배 곧 성령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이다. 이러한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양식과 크신 은총을 받아 누리는 예배요, 아름다운 예배이며, 살아 움직이는 예배는 동적인 예배이다.

성례의 본 뜻은 희랍어의 신비’(mysterion)라는 뜻에서 온 말로 복음을 직접적으로 확인시키는 일을 한다(1:9). 즉 성례란, ‘언약의 증표’(token)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말씀의 신빙성을 더 분명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성례를, ‘보이는 말씀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연상케 하는 거울이라고 하였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집행하신 세례와 성만찬의 예전을 행함으로 성도를 거듭나게 하여 새롭게 하며(세례) 계속하여 이 새로운 삶을 영위(성만찬)하게 하는 것이다.

 

 

2. 말씀 선포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교회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전이 집행되는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칼빈의 주장대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 말씀 선포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근원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여기서 '전도'란 말은 헬라어 성서의 케리그마’(Kerygma)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의 뜻은 전도자의 행동보다는 설교자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의미한다. 이 선포자의 말씀은 전파 혹은 전도와 설교의 방법으로 행해졌던 예수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케리그마의 내용은 말씀 혹은 복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방법에 있어서는 전도,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입을 통하여 흘러나오는 이 케리그마를 듣고 사람이 그 말씀에 대하여 자신을 열어 놓으면 그 사람은 자기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며 구원된다. 이러한 뜻에서 말씀 선포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행위가 현재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교회에서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이 현재적으로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 선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모셔 오고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므로 이는 교회의 매우 중요한 사명인 것이다.

초대 교회는 이 케리그마를 활발하게 실천으로 옮겼다. 오순절에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와 같은 복음을 전파하는 '케리그마'의 선구자였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2:32, 36)고 베드로는 증언했고, 스데반은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선포하다가 순교하기에 이른다.

복음 전파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사명이다. 이 사명은 신약 교회의 시작과 함께 수행되어진 사명이다. 복음 전파는 교회의 교회된 본분이요, 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목적이다. 따라서 복음 전파가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며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 주님께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6:15)고 하셨다. 복음(Gospel)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실 것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 전파의 대상은 민족과 부족, 계파와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전해야 하고, 지역 또한 국소적이거나 편협성을 타파하여 가능한 지역에서부터 점점 확대하여 세계 모든 곳에 이르기까지 할 것이다. 또한 이 복음 전파는 항상 힘써야 할 것이로되, 모든 기회를 사용하여 하도록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

 

 

3. 성도 교육

 

디다케’(Didache)란 가르침을 의미한다. 신약성서에는 이 가르침을 뜻하는 디다케라는 말이 매우 자주 사용되었다. 기독교 교육학자 루이스 쉐릴(L.J. Sherill)의 통계에 의하면 예수의 말씀을 가르침이라고 부른 것이 47번이었는데 마태에 9, 마가에 15, 요한에 8회 사용되고 있다. 또한 복음서에서 예수에 대한 칭호를 선생이라고 42번 불렀는데 그 중에 35번은 공관 복음서에 나오고, 4번은 요한복음에 언급된다. 이처럼 교육과 가르침을 이르는 '디다케'는 신약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신약 전체를 통하여 교육은 이렇게 강조되었고 초대 교회에서는 교육이 교회생활의 본질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의 삶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말씀선포뿐만 아니라 가르침도 이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었다. 설교와 말씀선포로 진행되는 복음적 교육과 가르침을 통한 완성과 보충이 필요한 것이었다.

초대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 교육의 특징적인 것은 교육이 전공동체의 생활 자체 안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이들의 교육이 공식적인 의미에서의 교육 제도이기 이전에 그들의 역사적 경험위에 토대를 둔 생활적인 교육이고, 그 내용은 사도들의 가르침, 성도의 교제, 기도 그리고 떡을 함께 떼는 일 등이 모든 것이 그들의 실질적인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말한다. 초대 교회 당시에 교회 안으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참다운 기독교인이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이 절실했다. 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를 무론하고 옛 삶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 살려고 할 때에는 일정한 기간 동안 교육을 받고 또 자기 삶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새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로 살 수 있는가의 여부는 주로 그들이 받는 재교육이 얼마나 철저한가에 달려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새로 받은 신앙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한걸음씩 전진해 나가고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신실한 신앙을 가진 증거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공동체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가르침’(Didache)을 가지지 않았다면 교회의 존속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결국 말씀 선포와 함께 '교육'은 역사 속에서 교회가 수행해야 할 본질적인 사명인 것이다.

 

 

4. 교제(친교)

 

교제를 지칭하는데 사용되는 용어인 코이노니아가 신약성서에서 19 번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한 의미로 번역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4가지 의미로 보고 있다. (1)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영성적 친교, (2)사도들과 신도들과의 교제, (3)성만찬에의 참여, (4)물질의 공동 소유와 나눔을 의미한다. 즉 이 뜻은 어떤 물건을 공동으로 나누어 가진다는 데서 신도들의 교제, 신도들끼리의 영적교제, 즉 그리스도라는 영원한 현재로 언제나 우리와는 산 인격적 교제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며 이 사랑의 연결을 표현하는 의식으로 성찬식이 있다. 코이노니아공산(共産), 공유(共有), 공생(共生), 상부상조(相扶相助)의 공동체이다.

교제’(코이노니아: Koinonia)의 본래적 뜻은 어떤 물건을 공동으로 나누어 가진다든지, 경험을 서로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성령과 관계를 가짐을 뜻하며, 또 그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성도와 성도끼리 서로 사랑의 긴밀한 교제를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친교는 이와 같은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를 종합한 표현이다.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에게서 얻는 바의 그 무엇을 자기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어 가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여러 사람들끼리 서로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로 합하여진다는 놀라운 진리를 인간들끼리의 관계에서 체험하며 확인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11:3)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것과 같이 인간들끼리의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친교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교회의 진실된 교제는 철두철미하게 예수를 중심으로 한 성도들의 본원적 관계이며, 인간의 어떠한 기술적 측면이나 단순한 사회적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만약 교회에서의 친교가 인간적 사귐의 차원에서만 머무른다면 그것은 올바른 의미의 친교로 될 수 없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서 교회는 종종 성령을 중심으로 한 교제보다는 사회적인 친목 단체처럼 되어 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신적인 의미의 코이노니아가 인간적 차원으로 하락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나누고 사랑하는 삶을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인간들끼리의 친밀감에 더 초점을 맞추어 자기들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서적 친교(Koinonia),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토대 위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일어난다. 그리스도와 성령을 인하여 일어나는 친교는 남녀노소, 연령, 사회적 지위, 인종, 민족과 국가 등의 이해관계로 야기되는 장벽을 뛰어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한다. 그리고 저들이 다같이 한 복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삶을 가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성립되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연대성(Solidarity)이 그들의 관계를 심오하고 영적인 사귐으로 인도한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코이노니아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5. 봉사(디아코니아:Diakonia)

 

오순절을 통하여 존재하게 된 교회의 또 다른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데 있다(22:26-27). ‘봉사라는 말을 뜻하는 '디아코니아'(Diakonia)는 본시 식탁에서 일을 도우며 급사로 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어원을 가진 이 말을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의 가야할 삶의 근본적인 방향과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일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말로 사용하였다. 예수그리스도는 실제로 교회를 위하여 이러한 봉사의 모범을 보이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10:43-44)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10:45)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빌2:7에서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심을 그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스스로 없이 하시고 종이 되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치욕과 자기 부정, 십자가 그리고 죽음을 짊어지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모든 일은, 봉사자라는 이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하셨던 이 봉사는 예수를 믿고 구주로 고백하며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생활 태도와 교회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교회의 주인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그분께서 일생 동안 세상을 위한 봉사적 직무를 실천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에 대한 봉사적 직무를 실천하며 살아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베드로전서에는 봉사가 기독교인의 생활과 교회 생활의 근본 법칙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그리고 이 봉사적 삶의 근본은 사랑이라고 표현하며 교회와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교회의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내적(內的) 봉사는 물론이거니와 교회의 외적(外的)인 것을 향한 베풂이며 너무나 중요한 교회의 기본 사명이다. 교회는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종 된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이 세상의 고통 받고 소외당한 작은 자들을 위해 손과 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류와 세계에 봉사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특권을 받은 선택이 아니라 봉사에 헌신하는 선택이다. 교회는 교회 자체에 존립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 때문에, 즉 타인을 위한 교회(the church for others)에 존립의 목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