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강의록(11) : 교수 주태근
Ⅵ. 교회와 성례전
성례전은 2000년전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적 구원의 사건을 성령의 교통하심 안에서 오늘의 사건으로 일어나게 하는 수단이 된다는 데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을 통하여 일어난다. 즉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사건은 현재화되고 구체화된다.
1. 성례전의 용어의 개념
성례(Sacrament)라는 말은 라틴어 'Sacramentum'에서 온 것으로 본래 소송하는 두 당사자가 지불한 공탁금 총액을 가리키는 말이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성례전(sacramentum)은 musterion(뮈스테리온: 동방교회의 용어), 혹은 사크라멘툼(서방교회의 용어)로 불리웠다. ‘뮈스테리온’은 원래 이 말은 고대 동방교회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신비종교의 제의나 교리 속에 있는 신비스럽고 비밀스런 종교적 내용을 뜻했다. 이 종교적 내용은 인간의 정상적 능력으로 파악될 수 없는 신비스럽고 초월적 성격을 지닌다. 그에 반해서 신약성서의 ‘뮈스테리온’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계시로 보여지는 것을 뜻한다. 서방 교회의 ‘사크라멘툼’은 원래 법적인 개념으로 선서, 종교적 형식으로 거행된 입단식에서 표명하는 충성 맹세를 뜻했다. ‘뮈스테리온’이 희생적, 구원론적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는데 반해, ‘사크라멘툼’은 법적 의무와 구속의 의미를 강조한다. 벌코프는 ‘사크라멘툼’이라는 말이 원래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예수께서 제정하신 규례에 적용될 때 원래의 의미대로 사용되지 않고, 교회의 교리와 율례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비판하며 이 용어를 회피하기도 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례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주저할 필요가 없음을 밝힌다. 그는 성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례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규례로 이 성례라는 감지될 수 있는 표징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언약이 주는 유익이 신자들에게 제시되고, 인쳐지고, 적용되며,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충성을 표현한다.”
2. 성례전에 대한 이해들
성례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해가 존재하는데 그 논의의 초점은 성례전의 은혜가 객관성을 지니는가, 주관성을 지니는가라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1) 가톨릭교회 : 화체설(transsubstantiation)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몸의 상징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또 그리스도는 '이 안에 내 몸이 있느니라' 또는 '이것과 함께 내 몸이 있느니라'고도 말씀하시지 않고, 절대적으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명백하게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로마교회의 정의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임재는 사제가 성만찬시의 예수 그리스도가 하셨던 말씀을 친히 말함으로 빵과 포도주를 우리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완전히 변화시키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이렇게 성찬의 화체설은 9세기초에 정식으로 제안되고, 12세기에 정의를 받아 화체의 교리로 지명되고, 13세기의 제4차 라테란 회의에서 정식으로 채용되었으며, 16세기 트랜트 회의에서 최종 작성을 보았던 것이다. 중세 신학을 보존하는 가톨릭교회에서 성례전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거룩케 하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보았다. 화체설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한 성찬 교리의 설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존재는 우유(Accident)와 본질(substance)로 이루어진다. 성례전에서 사제의 축성에 의해서 우유는 변하지 않지만 본질은 변화한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
2) 루터 : 공재설(consubstantiation)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한다. 즉 주님의 몸이 성찬 물질의 안에, 밑에, 함께 계신다고 했는데, 이는 14세기에 있었던 오캄의 유명론에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루터는 믿는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질 수 있도록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의 지역적인 임재를 믿었고, '공간속에 연장된 몸'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서도 피를 흘리셨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들을 제외시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권한은 천사에게도 없고 교항이나 공의회의 권한에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루터는 평신도들의 성만찬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사제가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루터의 신학은 전통적인 가톨릭 사상과 매우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그의 강조점은 ‘희생적인 미사’가 아니라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룩한 교제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에 동참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례전은 죄의 용서에 대한 약속의 말씀과 외적 행위가 결합됨으로써 성립된다. 말씀 없는 성례전은 성례전이 아니다. 루터는 말씀과 외적인 성례전을 동시에 중요하게 보았다. 즉 외적 성례전을 경시했던 재세례파와는 달리 루터는 감각적 인간이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례전을 세우셨다고 판단했다. 특히 루터는 성찬의 친교에 그리스도 자신이 실제로 임재하시는 현실적 임재를 주장했다. 즉 “이것은 내 몸이다.”에서, “이다”(est)라는 말은 사실이라고 문자적으로 보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공재설을 주장했다. 특히 루터는 성례전에 있어서 “위엄의 종류”(genus maiestaticum)로 설명한다.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원래 인성에 속하는 것이지만 속성의 교류에 의해서 편재성을 띠게 된다.
3) 츠빙글리 : 상징설(Symbolism), 기념설(Remembrance)
츠빙글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예배에 임재하신다. 하지만 그의 몸과 피 곧 그의 인성은 하늘 곧 아버지의 우편에 제한되어 계신다. 성만찬은 우리가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회고하는 점에 있어서 그것에 감사하는 '기념'일 뿐 이라고 하여 ‘기념설’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성만찬을 단지 기념적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념과 신앙 공동체 의식의 근거로써 단순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성만찬을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기념적 행사로 간주하여 년 2회로 함이 좋다는 견해를 펴 성만찬 예배의 경시 현상을 개신교에 유산으로 물려주고 말았다.
츠빙글리는 성례전을 상징적 행위로 보았다. 그 의미로 첫째 이것은 그리스도가 과거에 이루신 구원을 상징하는 표지인 동시에 그것을 회상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둘째로 성례전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그들 자신과 세계에 대하여 행하는 신앙고백의 표지와 인식의 표지라고 보았다. 성례전이 믿음을 세우거나 강화시킬 수 없으며, 성례전은 믿음을 전제한다. 성례전의 주체는 하나님이라기보다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들의 공동체이다. 세례는 몸이 정결한 물로 씻음을 받는 의식이며, 이 의식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의 단체로 모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내 몸이다”는 “이것은 내 몸을 표시한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리스도는 성찬에서 본질변화나 함께 있는 실체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믿는 믿음의 명상에 임재한다. 그는 기독론적으로 하나님 우편에 있는 그리스도는 성찬에 임재할 수 없다고 본다. 성찬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일이다. 루터교회와의 성례전에 대한 이러한 이견에 따라서 1529년 아우그스부르크 회담은 이 문제에서 결렬되었다.
4) 칼빈 : 영적임재설(Spiritual presence Theory)
칼빈은 성만찬에 있어서 츠빙글리와 루터 사이의 중간 위치를 취하였다. 칼빈은 성찬은 주님이 우리 마음에 인쳐 주시는 외적 표시로써, 우리에게 향한 그의 선한 뜻의 약속으로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북돋아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물질적 요소인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표상과 상징에 불과하며, 그리스도는 떡의 물질에 부가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성령의 힘에 의해 성례는 일어남으로 우리들의 마음으로는 그는 이해할 수 없고, 신앙으로 받아들일 뿐이라고 했다. 성찬의 효과는 말씀에 달려있고,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과 물질들을 분리시킴은 잘못이라 했고 성례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 신앙을 봉헌하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칼빈은 성례전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말씀을 통하여 전달된다고 보았다. 성례전은 보증으로서 이에 추가된다. 그러나 보증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성례전은 성령의 활동에 의하여 효력을 얻는다. 칼빈은 성례전과 성령을 구분한다. 성례전은 성령 아래에 있는 도구이며, 성령을 통하여 효력을 얻는다. 칼빈은 어거스틴 전통에 따라 성례전을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보이는 표시”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피상적이고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 성례전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진리와 은혜를 인치는 방식이다. 물질세계에 길들어 있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우리의 수준에 맞도록 영적 은혜를 물질적 표시로서 확증하고 인쳐주시는 것이 성례전이다.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신앙을 보이는 표시로서 확증시켜주는 것이다. 성례는 말씀이라는 공문서에 찍힌 도장과 같다. 그러나 내용이 인장보다 중요하듯, 말씀을 떠나서 성례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다. 성례전에서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를 향하게 한다. 세례 자체가 구원의 수단은 아니지만 세례는 이미 주신 구원의 은혜를 더욱 확실하게 인쳐주는 외적 보증의 은혜로 볼 수 있다. 성찬 역시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가 떡과 포도주와 함께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와 실질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성찬의 실체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며, 성찬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제정의 말씀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셨다는 것이다. 성찬의 효력은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구속, 칭의, 성화, 영생 등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영적임재설’이다.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로서 먼 거리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연결시켜주신다. 성령은 성례전을 매개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신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가 되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매개. 성령은 물질적 도구들을 사용하시어 우리를 끌어올려 하늘의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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