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시리즈

회복의 영성(눅24:13-35)-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23. 11:07

회복의 영성/24:13-35

 

 

목사 주태근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는 참 좋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출신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세기적인 부흥사였던 무디 선생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일생 동안 버리지 못한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엄격한 신앙인으로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철저하게 시킨 경건한 여성입니다. 어린 헤밍웨이는 주일학교 때 성가대 가운을 입고 노래를 부르는 똑똑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그는 점점 신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가 위대한 문학가로서는 세상 역사에 그 이름이 남을지 모르지만 하늘나라 역사에는 아무 것도 남길 만한 것이 없을 만큼 타락한 사람으로 전락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자주 타이르고 경고를 했으나 듣지 않으니까 한 번은 생일 케이크를 보내면서 거기에 헤밍웨이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권총을 같이 넣어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그런 식으로 하느니 죽는 것만 못하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너무 화를 내니까 헤밍웨이가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나는 예수도 믿고 하나님도 믿어요. 그러니 남부끄럽게 이 편지 누구한테도 보이지 말아요.” 헤밍웨이에게 있어서 남아 있는 기독교 영성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남긴 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운 공허 가운데서 살고 있다.” 결국은 자기 생명을 자기가 끊지 아니하면 사는 의미조차 발견할 수 없는 잿더미 위의 인간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1953년 아프리카 여행을 하던 헤밍웨이는 두 번이나 비행기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었고, 이후 전지요양에 힘썼습니다. 그 후 19617월 갑자기 엽총사고로 죽었는데, 당시 사회는 그의 죽음을 자살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우리 속에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그 어떤 요소를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인간들은 흔히 우리가 가진 이성이나 사랑할 수 있는 감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성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인간을 진흙으로 만드신 다음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생명의 기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영성입니다. 영성은 바로 생명력의 원천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영성이 빠져 버리면 우리의 생명은 병들게 됩니다. 반면 이 영성이 예민하게 움직일 때 우리는 하나님과 만나며, 그분에게서 끊임없는 생명의 기운을 받아 창조적이며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앙의 슬럼프에 빠져 믿음 생활을 중단하고 제자들의 무리를 이탈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직후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 동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글로바'라는 사람과 다른 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이 일으킨 표적과 기사들을 보았으며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광경도 보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생각하고 추종자들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정치적으로 회복시켜줄 왕'으로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대제사장과 관원들에 의해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에도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3일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은 지 사흘이 되도록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간간이 들리는 소문에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는 있었으나 그 소문을 확인해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풍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히려 이들 속에는 핍박의 세력으로 인한 공포가 더 가득 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예루살렘 거리에 나서기를 두려워했고, 실의와 비통함에 빠진 채 배신감과 슬픔을 안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낙심한 이유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예수와 예수의 하는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쉽게 실망하며 낙망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며 우리의 아픔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길가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나그네가 가는 길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엠마오의 두 제자와 자연스런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주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누가는 그들의 얼굴 표정을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17절에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인 글로바가 용기를 내어 역 질문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합니까?" 주님이 그들에게 되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뇨?"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의 이유를 그들 자신보다 더 깊이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픈 이유를 직접 주님께 말씀드리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 예수님은 소경 바디매오에게 "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 원리와 똑 같습니다.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셨듯이 이 두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아픔과 상처 그리고 소망을 주님께 아뢰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 드디어 본 문제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줄 영적 메시야로 본 것이 아니고 로마의 압제 하에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회복시켜줄 왕'으로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엄하게 꾸짖으시면서 노()를 발하였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 책망의 첫마디가 "미련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의 생각이 '바보스럽고 무지하다'는 뜻입니다. '어찌하여 허망한 것을 바라보고 나를 쫓았느냐?'는 말입니다. 두 번째 "더디 믿는 자들아"고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사야에는 오실 그리스도께서 침 뱉음을 당할 것과 곤욕을 당하시나 입을 열지 않을 것과 강도들과 함께 못 박히실 것과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과 고난에 관한 많은 일들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들은 무덤에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가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하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는 모습을 보시고 엄히 꾸짖으신 것입니다.

 

만일 두 제자가 부활신앙을 확실히 믿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할 것입니다. " 우리가 직접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분은 반드시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믿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무엇이나 잘 믿습니다.

 

그러나 안 믿고 의심하는데 길들여진 사람은 무엇이나 안 믿고 믿지 못합니다.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셔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련한 그 제자들, 더디 믿는 제자들을 책망만 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27절에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이때 이들은 자신들의 속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엠마오 상에서 예수님과 두 제자가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날이 저물어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어갑니다.

 

이때 두 제자들은 자기들과 함께 유하자고 예수님께 강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함께 식사를 나누고 그 후에 못 다한 이야기들을 더 나누자며 강권하여 주막으로 모셨습니다. 저녁 만찬 때의 일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며,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먼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실 때에 그렇게도 믿음이 없었던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영의 눈이 떠져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보게 된 엠마오의 두 제자는 그 자리에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 33절입니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자들이 모여 있어."라고 했습니다. "곧 그 시()""바로 그때"라는 뜻입니다.

 

29절을 보면 그때는 이미 저물었을 때입니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려면 12나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말씀을 깨닫고 부활의 주님과 성령의 능력을 받고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날이 밝은 그 다음 날 떠날 올 수도 있고 아니면 2-3일 더 지체하다가 떠날 수도 있었건만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큰 기쁨을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전하고 싶어 즉시로 엠마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서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간증하자 이 두 사람도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고 당당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잃었던 신앙이 회복되고 그리스도의 영성이 그들의 삶 가운데 거하는 은혜가 있게 된 것입니다.

 

주식회사 영성 대표 회장 이 장로님 이란 분의 이야기입니다. 33세 나이인 1969년 갑자기 피를 토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당시 결핵은 치명적인 불치병이었습니다. 진료를 받아 보니 사망 선고였습니다.

 

"가망이 없습니다." 의사의 한 마디에 충격을 받고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바로 서대문 시립병원 근처 폐병 환자들이 모이는 집이었습니다. 그 곳으로 가 보니 매일 수많은 폐병 환자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그는 간절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한번만 살려 주시면 결핵 환자들을 위하여 이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생명을 건 필사적인 서원기도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완쾌되었습니다. 건강이 회복된 후 그는 사업 전선에 뛰어 들었습니다. 오직 하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사업의 이익금은 모두 결핵환자들을 위하여 사용하겠습니다."그렇게 사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장로님은 <베데스다 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폐병환자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종로 YMCA 옆 금싸라기 땅 500(당시 시가 1000억원)과 인천시 내오리 산 28번지 18,900(당시 시가 30억원), 그리고 가지고 있던 현금 26억여 원을 모두 바쳐서 폐병 환자들을 위하여 복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간 매월 평균 200명 정도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모두 7만 명 환자에게 약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는 늘 말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 빚진 자로서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일을 실천에 옮기는 것뿐입니다" 영성이 회복되니 사람다운 삶을 바로 추구하는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영성은 바르고 건강한 삶을 위하여 우리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필수적요소입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가려지고 망가진 영성이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회복되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새생명의 영성이 인간들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생명의 영성을 회복할 때 인간은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며 창조적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삶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성과 감성만이 아닌 영성을 회복하여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성도들이 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분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