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및 기념 예배 설교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막9:2-8)-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11. 6. 10:44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9:2-8)/산상변모주일

 

 

목사 주태근

 

인도의 민족 운동 지도자 간디는 예수님의 산상 보훈을 보고 독립운동의 개혁의 힘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미국의 스탠리 존스라는 선교사가 간디 운동을 서구에 알리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교사는 인도의 간디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당신과 당신의 운동을 서구에 알리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저는 당신이 기독교의 핵심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러나 당신은 원리는 파악했지 원리를 넘어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놓친 것 같습니다. 그 분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라고 썼습니다. 편지를 받은 간디는 제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하다그런 응답만 했다는 것입니다.

 

간디가 아무리 산상 보훈을 인용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도덕가로 철학자로 성인으로만 알았지 인생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디는 역사에 남는 위인은 될 수 있어도 결코 하나님의 자녀는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한 때 많이 부른 복음성가 중에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주의 복음 전하리.' 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게 된 그 동기를 보면 참 은혜롭습니다. 이 노래를 작사한 분은 서울 경기고등학교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29세의 나이에 극동건설에 취업을 해서, 사우디아라비아에 공사 책임자로 나간분입니다.

 

29세 나이로 책임자로 갔으니 얼마 나 빨리 성공한 사람입니까? 그러니까 거기에서 자기 머리가 좋으니까 머리를 굴리는 대로 돈을 막 모아줄 수 있고, 거두어들일 수가 있는 사람으로서 돈을 마음껏 쓰면서 온갖 여성들과 온갖 향락을 즐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벤츠 420을 몰고 신나게 달리는데 앞에 오던 차와 정면충돌해서 그 순간에 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8일 만에 정신이 깨어났는데 두 다리가 잘려진 채로 서울대학병원 17층 입원실에 불구자의 몸으로 입원된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즐기던 한 순간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두 다리가 이미 사우디아리비아 사막에 묻혀진 그런 지체 장애자로서 자기 모습을 본 순간에 그는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데 마침 서울 경동교회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가 있는 교회를 보면서 그는 거기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가 글을 썼는데 그 순간에 쓴 글이 죄악 된 세상을 방황하다가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 죽을 세상이 왜 그리 더러운지 이제야 알았네눈물로 눈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이 기독교 월간지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음악성이 있는 분이 이 글을 읽고 감동이 되어서 곡을 붙인 것이 복음성가로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불리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두 다리를 사우디 사막에 잃어버려졌지만 그는 예수님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 때 그런 향락 오락 연락을 누릴 때보다도 더 즐겁고 더 만족하고 더 거룩한 생활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일이 인생살이에 있어서 너무나 소중합니다.

 

경인제일교회 목회 시절 : 여름성경학교 교사들과 함께(1987년)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사순절 절기 전 주일을 주님의 산상변모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축일은 4세기부터 동방교회에서 대경축일로 지켰으며, 서방교회에서는 9세기 이후부터 지켜왔습니다. 개신교회에서는 사순절을 지키기에 앞서, 참회의 수요일 바로 전 주일을 주님이 산에서 변형되신 것을 기억하면서 축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변형되신 것은 우리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시며, 선지자들이 간절히 고대하던 분으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진리를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되고 있기에 공관복음서를 참고로 하여 재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들은 상호 보완적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어느 한 본문만 가지고 설명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관복음서를 통하여 본문을 이해합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분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는 주님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를 방문하여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던 그 때로부터 한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번에 산에 오르신 것은 운동 삼아 등산한 것이 아니며, 기분 전환하려고 산에 오른 것이 아니라, 분명히 기도하려고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이 때에 오르신 산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헤르몬산입니다. 팔레스틴의 헤르몬 산은 아주 높은 산입니다. 해발 2,730m로 갈릴리 북쪽의 가장 높은 산으로, 현재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국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하여 산에 오른 것은 동양적인 사고와 히브리식 사고방식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서양 사람은 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것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3제자들이 이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의 용모가 변하셨는데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사람이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새하얗게 희어진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심히 곤하여 잠에 빠졌습니다. 이 때에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계신데,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오셔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한 것이 많지만 정확하게 전해 듣지 못하여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한 것을 보아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시는 것이요, 선지자들이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였는데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은 율법과 예언의 성취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동안 말로만 전해 듣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니 정말 황홀한 순간이요, 다시는 있을 수 없는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고하기를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린 것은 두렵기도 하고 몹시 무서운 생각이 들어 얼떨결에 입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드리고 있을 때 구름이 와서 저희들을 둘러 덮었습니다. 이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는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고 엘리야의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일을 목격하니 두렵고 무서워 엎드려 있었는데,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면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이 경고하시기를 "인자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이 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3제자들의 체험은 바로 예수님의 변모하심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 때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남아 있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문득 둘러보니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모세의 율법도 소중하고. 엘리야의 외치는 소리도 중요하지만 우리들 신앙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남아 있고, 예수님의 말씀만 들어야 함을 계시하는 내용입니다. 인간이 구원받음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행함도 아니요 선지자가 일으킨 능력을 따름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 믿고 따라야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회는 산상의 종교는 아닙니다. 영적인 신비한 체험도 있고 죽은 사람이 나타나는 신비한 순간도 있지만 그것들은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주님만이 있어야 하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 산상의 종교, 산상의 체험, 황홀한 순간이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비버리지 주교라는 분이 나이가 많아 임종에 이르렀을 때 주위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늘 함께 지내던 전속 사제 한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하니까 당신 누구요?” 하며 못 알아보더랍니다. 다음엔 그의 아내가 가까이 와서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하니까 역시 당신 누구요?” 하더랍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금방 대답하기를 물론이지요, 나는 40년간 그 분과 사귀어 왔답니다. 그 분은 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하고 분명하게 말씀하더랍니다. 얼마나 훌륭한 신앙입니까?

 

참으로 거듭난 신자라면 육신의 건강을 다 잃어버릴 때에도 오직 예수님만은 잊지 말아야 되고 세상 재물, 세상 친구 다 떨어진 때에도 예수님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이 세 제자가 헤르몬산 높은 산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놀라운 체험을 했는데 그 놀라운 영광의 장면 가운데서 마지막 남은 장면은 오직 예수만 보였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오직 예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에베소서 456절에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참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고 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십니다. 디모데전서 2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했습니다. 참 하나님이 참 인간의 모양을 입고 오신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셨으므로 신성을 가지시고 대속의 피를 흘려 주셨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12절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말씀하셨고, 히브리서 9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데서는 죄 사함 받을 길이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순교의 피로 의롭게 되는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죄의 대속은 그리스도의 피에만 의존해야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순교자의 피도 죄의 사함을 위하여 흘린 피는 없습니다. 속죄를 위한 피 흘림은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며 이로써 그가 우리에게 주신 속죄의 사랑은 우리가 모방하기 위해 하신 일이 아니며 감사하기 위하여 주신 사랑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흘리신 피 외에 어떤 순교의 피도, 어떤 의로운 행동이나 선행도 죄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세상에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어떤 의로운 행동도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지 못 합니다. 요한복음 3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말씀했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들에게 중보자요 구세주요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구원은 오직 유일하신 예수님뿐입니다.

 

지난날 유동천 목사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자신도 유교에 심취해 공자, 맹자 노자 도덕경을 성경이라 부르며 탐독했습니다. 그가 수원 고등농림학교를 다닐 때 기독학생들이 그에게 전도하였는데도 그는 극구 반대하고 기독교를 비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려 경성제대 부속병원에 입원하여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 몸에서 피고름이 계속 흘러나왔고 결국 의사도 포기하였습니다. 절망 중에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져들며 아 이제 죽는가 보다 하는데 어디선가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리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 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1절 찬송이 끝날 무렵 갑자기 몸에 감전 같은 전율이 느껴지며, "너는 무덤에서 주와 함께 살았다"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주님을 반대하던 이 놈이 무엇 하겠습니까?"라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졸업 후 농업기사가 되거나 일본에 가서 신문사 기자가 되어 명성이나 날려 보려던 나였는데 하는 자책감이 생기더니, ! 아니다 나는 예수 없이는 못산다. ! 나를 살리신 예수여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뜻대로 살겠사오니 뜻대로 하옵소서! 하며 외쳤습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난 후 간호원에게 부탁해서 성경을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믿는 간호원이라 성경을 읽어 주고 찬송도 불러 주었습니다. 신약 구약이 자기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 때부터 이상하게 피고름이 나오던 상처가 아물더니 이내 몸이 가뿐해졌습니다. 퇴원하는 길로 교회에 찾아가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세례를 받았으며 본래 이름인 기로(基魯)를 동천(東泉)으로 바꾼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삽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야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변화산의 체험은 오직 예수 신앙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