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한일서 3: 1- 3)
목사 주태근
동물 나라의 들짐승과 날짐승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들짐승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편에도, 저 편에도 속하지 않고 숨을 죽이며 지켜보던 박쥐가 들짐승들에게 찾아 왔습니다.
"나는 날개가 있기는 하지만 원래는 쥐에 해당합니다. 여러분과 같은 들짐승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싸우겠습니다." 들짐승들이 모두들 좋게 여겨 박쥐를 같은 편으로 맞아 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역전이 되어 날짐승들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판단한 박쥐가 들짐승 나라를 떠나 날짐승 나라로 건너갔습니다. 날개를 퍼덕이면서 날짐승 나라에 도착한 박쥐는 "나는 이렇게 멋진 날개를 가진 날짐승입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싸우겠습니다." 날짐승들은 모두들 좋게 여겨 박쥐를 같은 편으로 맞아 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날짐승에게 유리하던 전세가 다시 반전이 되더니 서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이제 우리 서로 어리석은 싸움을 그치고 평화롭게 지냅시다, 화해합시다, 용서합시다.” 서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동물 나라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전에는 원수였지만 이제는 친구가 되어 사이좋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는데 함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박쥐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들짐승들이 박쥐는 전에 우리 편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날짐승들이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박쥐는 전에 우리 편이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결국 양다리 걸쳤던 박쥐의 행동이 들통이 나고 맙니다. 들짐승, 날짐승 모두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는 간사한 녀석이 어디 있느냐?”라고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박쥐는 모든 동물들을 피하여 동굴로 들어가 혼자 살게 되었다는 우화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자의 비참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정체가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예수를 믿을 때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1:12)"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주로 영접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어 졌습니다. 놀라운 신분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한 가정에 자녀가 태어나면 그 이름을 호적에 올리게 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일 어떠한 이유로 그 이름을 호적에 올리지 못했다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며, 살아있다 해도 주어지는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호적에 등록된 사람이어야 한 국가의 어엿한 국민으로 인정을 받고 국민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호적에 어떻게 등록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법률상 부부관계가 되기도 하고 부모자녀 관계가 성립되기도 합니다.
법률상 부부관계인 사람들 사이에서 한 생명이 태어나면 그 이름이 호적에 기록되어 죽을 때까지 법적인 보호를 받으며 주어진 권한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사생자로 취급을 받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게 되며,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고, 영생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기독교구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죄로부터의 자유 함을 의미하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란 죄인들이지만 구원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 생각하고, 이웃을 형제로 여기며 사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이 분명히 깨달아야할 점은 자신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년 된 자만이 부를 수 있는 특권이므로 굉장한 권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 있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은총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고, 지금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세상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요한사도는 우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어 그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의 자녀 됨을 특권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대부분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헬라어로‘휘오스’로서, 법적인 부자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용된 자녀는 헬라어‘테크나’라는 단어입니다.
이 용어는 실제적인 부자관계를 나타냅니다. ‘테크나’로서의 자녀는 부모에게 특별한 위치에 있습니다. 엄위하신 하나님이지만 내게는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부자의 관계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이런 하느님의 자녀 된 특권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에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믿는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님들은 하느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차라리 대통령의 아들의 친구라거나, 아무개 장관이 나의 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 됨의 축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자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깊이 생각해 보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긍지와 품위를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대학원이나 직장에서 리더십훈련과정이 유행입니다. 리더십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과정 첫 시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순서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가족관계, 잘 하는 일, 좋아하는 일, 꿈과 목표, 리더십 과정에서 배우고 싶은 것들을 모든 참가자가 스스로 발표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같은 직장에 20년 이상 함께 근무한 사람들도 동료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어 공동체 생활에 유익을 얻습니다.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을 비롯한 교무위원 11명이 리더십을 함께 공부할 때 이야기입니다. 이경숙 총장의 순서가 되자 이 총장은 자기의 가족을 소개한 후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 자신은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섬기는 리더십을 실천하고 싶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덧붙였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당황하는 분위기입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리더가 당당하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선포한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가진 정직한 그리스도인의 발표였습니다. 결국 이런 신앙적 자세가 침체된 숙명여대를 변화시키고 학교를 다시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 더 유명한 대학으로 전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앞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담대히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자랑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 몸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자랑스럽게 여겨야합니다.
이 시대의 세상 사람들이 현대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 당신들은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랑스럽게 선포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의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입니다. 우리나라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에 가보면 기독교정신으로 “Why Not Change The World?” 라는 구호로 학교를 이끌어 갑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군을 양성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이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을 때, 동네 사람들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느 날 집 앞에 선반을 하나 만들고 그 위에 실내에서 쓰던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 불을 켜두었습니다.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도 이 일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등은 집안에 두고 불을 켜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어째서 밖에다 등을 내어놓고 불을 켜두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주, 두 주, 한 달이 지나가자 사람들이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밖에 켜둔 등불로 인해 길이 환해져서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를 좋게 생각한 마을사람들이 날이 어두워지면 하나둘씩 집밖에 등불을 켜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온통 길거리가 일시에 환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간선도로에 가로등이 설치되는 시작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남을 위한 배려와 남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이 작은 일이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큰 영향력을 끼쳐 더불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좋은 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운사회로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잭 에커드라는 사람이 미국에서 약국을 경영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다니며 목사님으로부터 성도들은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이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말씀에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과 뭔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이들보다는 더 좋은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우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약국을 좋은 약국으로 만들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부터 없애기로 작정하고, 그 당시 연간 500만 달러의 막대한 부수입을 올렸던 섹스잡지 즉 음란잡지코너를 과감히 없애버렸습니다. 그러자 지배인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그러나 결심대로 순수한 약만 팔기로 작정했습니다.
"큰 수입이 보장된 이 일을 과감히 버리다니 무슨 배짱인가?" 이처럼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이 일을 실행하자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를 지켜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분명히 망할 줄 알았으나 좋은 소문으로 인해 점차 매출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다른 약국들도 이 일에 동조하기 시작했고, 불과 2년 만에 섹스잡지 추방운동이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국에 1,700개의 점포를 가지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약국 연쇄점인 에커드 드러그스(Eckerd Drugs)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축복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 어두운 사회를 밝게 비추는 등대의 축복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열심히 사업을 하여 돈만 벌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바르게 만드는 일에 본이 되어야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자기정체성의 확립입니다.
미국에 [조지 바나]라는 리서치 센터가 있습니다. 주로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하는 매우 신뢰도 높은 조사기관입니다. 이 기관에서 발표된 내용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도덕성에 있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 비해서 40%이상의 격차가 있어야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이 100명중 20명 정도 정직하다고 가정할 때, 기독교인들은 60명 이상 정직해야 이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관에서 미국에서 음란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조사했습니다. 일반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을 때 100명중 40명이 본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보았더니 30명이 본다고 답했습니다.
결국 보통 사람들과 기독교인들과의 차이가 겨우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는 이 사회에 바람직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세 배 정도 정직해야 영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야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토인비는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 속에 있다 할지라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바로 교회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교회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지만 세상의 희망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이 세상이 삽니다. 그리스도인마저 죽으면 이 세상은 죽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도 말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아멘.
하나님의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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