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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음 받았다(벧전4:10) : 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3. 5. 8. 11:34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음 받았다(벧전4:10)

 

목사 주태근

 

오래전 상영된 영화 가운데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앙리 샤리에르는 법정에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나는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그런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다른 죄수들과 함께 한 번 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지옥의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하루는 그곳에서 그는 반입이 금지된 음식을 먹다가 적발되어 독방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생사람도 잡아먹는 곳´으로 이름 붙여진 그곳은 한 줄기 햇빛도 들어오지 않아 그야말로 암흑 그 자체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고독과 허기 그리고 절망으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굶주림에 지친 그는 깜빡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지옥의 재판관을 만났습니다.

 

그는 얼음처럼 차갑게 생긴 재판관에게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곳에 오게 되었음을 하소연했습니다. ´재판관님! 저는 결백합니다. 저는 살인을 하지 않았어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넌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너는 살인과는 관계없다.´ ´그렇다면 무슨 죄로 제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너는 인간으로서 가장 큰 죄를 지었느니라,

 

그 것이 무슨 죄입니까? ’ ‘바로 인생을 낭비한 죄이니라,!’ ‘인생을 낭비한 죄? 그렇다면 유죄로군요, 유죄! 유죄! 유죄!’ 꿈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건만 무엇 하나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기억에 남을 만한 것도 자랑할 만한 일도 하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까지 자신이 아까운 청춘을 낭비하며 헛되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다시 과거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한번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그 지옥 같은 곳을 탈출해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번 들어가면 절대 탈옥할 수 없다는 그 악명 높은 감옥을 무려 9번의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1968년에 그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담은 한 권의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 소설이 1973년에 한 편의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빠삐용´입니다. 빠삐용 즉 나비는 그의 가슴에 새겨진 나비모양의 문신을 따서 부른 그의 별명입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채, 화석이 되어 있던 한 마리 나비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 순간 마침내 생명을 얻고 자유의 날개를 펄럭이며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위대한 성경학자인 폴 트루니는 우리 인생을 세 분기로 나누어 말했습니다. 첫째는 아동기로 이 때는 소유기로, 그저 가지려고만 하는 인생기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는 청년기로, 이 때를 성취기라고 말합니다. 젊고, 힘이 있고, 그리고 꿈을 이루는 인생기를 말합니다.

 

세 번째는 장년기로 이 때를 남을 섬기는 시기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하고, 아무리 나이 들고, 경륜이 있어도 남을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하면 인생의 유아기적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고 말씀합니다. 여기 봉사하라는 말은 섬기라는 말입니다. 이 섬김을 영어로 ‘ministry’라고 번역합니다. 그래서 목사를 영어로 Minister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있는 자가 목사입니다. 그러나 우리기 이 말을 잘 이해해야합니다. Minister 라는 이 단어는 헬라어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디아코니아는 섬긴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minister입니다.

 

또 집사라는 영어 ‘deacon'도 디아코니아에서 나왔습니다. 목사든 집사든 다 섬기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섬김의 사람입니다. 성직자나 평신도나 모두가 섬기는 자요 사역자입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까?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약성경 에베소서 210절에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이란 바로 섬김의 일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사역이 바로 또 다른 인생의 목적입니다. 사역목적의 삶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 이끌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사역하는 사람, 그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자”(100:2)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달라트의 비유를 주셨습니다. 어떤 주인이 먼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에게 재산을 맡겼습니다.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겨 주면서 내가 돌아 올 때까지 잘 사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얼마 후 여행에서 주인이 돌아와 자신이 맡긴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물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열심히 일해서 배로 남겨 다섯 달라트를 가져왔고,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도 배로 남겨 네 달란트를 주인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들을 칭찬하면서 그들이 남긴 이익에 배나 더 상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게을러서 그것을 땅에 묻어 놓았다가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시고 그가 가지고 있던 한 달란트를 빼앗아 많이 남긴 종에게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는 우리에게 중요한 섬김 즉 사역의 원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누구로부터 왔느냐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은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이 땅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을 관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잘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 지식, 건강, 재능....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이 70, 건강하면 80년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간을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고, 생을 마감할 때에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 어느 누구도 무엇인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무언가 가지고 온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빌려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빌려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아무리 수고와 노력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헛될 뿐입니다. 또한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가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는 고백은 거짓이요 우리의 믿음도 거짓입니다.

 

두 번째 사역의 원리는 우리가 받은 은사를 잘 사용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준 한 달란트까지 빼앗아 다른 자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도로 가져가실 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내가 사업을 하는 데 몇 개의 사업처를 가지고 있어서 각 사업장에 메니저를 두었는데 그가 주인의 사업을 게을리 한다면 그 사람을 그냥 두고만 있겠습니까? 당장 해고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사용하지 않으면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물질이 필요하십니까? 능력이 필요하십니까? 재능이 필요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여러분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먼저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 먼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분수대로 섬김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세 번째 사역의 원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평가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은 반드시 평가하십니다. 우리는 종말론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 한 가지 더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그것을 얼마나 잘 사용했는가가 하나님의 평가방법입니다. 인간은 각각 다른 은사를 가졌지만 가치는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한 달란트를 가졌든, 두 달란트를 가졌든, 아니면 다섯 달란트를 가졌든 동일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과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 나에게 주어진 그것이 나에게 맡긴 일이라면 믿음으로 맡은 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충성하면 더 큰일을 맡기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역에 임하지 못하는 것은 섬김의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섬김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중심적인 마음입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둘째, 완벽주의입니다. 완벽주의자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을 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불완전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셋째, 물질주의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지만 돈이 없기에, 좀 더 돈을 번 후에, 더 큰 집을 구입한 후에 섬기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인생의 최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우선적인 일이 무엇입니까? 지혜 있는 일군은 주인의 뜻에 맞게 일하는 종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와 재능 그리고 축복으로 주인 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제인 아담스는 미국 시카고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10대에 사고로 인하여 허리를 다쳐서 결국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걸을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 점 더 짜증을 내고 난폭한 성격이 되어갔습니다. 하인들이 가져오는 음식을 그릇과 함께 내 던져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고 런던의 빈민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사는 어린 아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불구자였지만 이 어린 아이들을 돕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의과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일하는 동안 척추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어서 다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 200만 명의 불쌍한 어린이들에게 소망을 심어 주었다는 이유로 1931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식에서 제인 아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일 침상에서 가져다주는 밥만 먹고 투정만 부렸다면 일생동안 불구자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웃을 섬기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내 인생에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오늘을 사는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왜 사는지를 아는 것이 인생을 승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일입니다. 사역목적을 위해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합니다. 섬김의 삶에로 나를 부르심을 발견해야합니다.

 

크레머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교회의 본질은 봉사'라고 말했습니다. 즉 내가 교인이라면 어떤 봉사를 하고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봉사가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요즘 컴퓨터 용어 중에 서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컴퓨터 단말기의 중심에서 단말기에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가 도와주는 기능을 하는 것을 서버입니다. 이것은 영어의 ‘serve’에서 온 단어입니다. 즉 봉사하며 섬기는 컴퓨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컴퓨터로 인하여 얼마나 편리한 생활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야말로 하나님이 만드신 서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교회를 섬기라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봉사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도들은 그 몸에 붙은 지체들입니다. 몸은 지체들의 역할로 건강한 몸이 됩니다. 지체는 각기 자기의 역할과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지체들의 역할과 기능으로 완성시켜 성장시키십니다. 우리는 사역자들이요, 봉사자들이요, 주님의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성경은 우리들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니라.”(4;11-12)

 

 

섬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