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설교원고

한 여인의 상처와 회복(요 8:1~11) : 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3. 4. 24. 13:44

한 여인의 상처와 회복(8:1~11)

 

 

목사 주태근

 

스무 살에 혜성처럼 나타난 미국 뉴욕발레단의 천재 무용수가 뉴저지에 있는 자기 아파트에서 어는 날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약물과다중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식에 한 여인이 찾아와서 너무나 처절하고 슬프게 울어 됩니다. 그 여인은 울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얘야, 너를 죽인 것은 바로 이 어미구나. 너희 아버지가 갑자기 소리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퍼부을 때 그것이 나의 상처가 되어서 그것이 너를 기를 때 너를 때리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구나. 알고 보면 네 아버지도 네 할머니의 희생자란다. 내가 화가 나고 짜증난다고 그렇게 너에게 욕설하고 때리지만 않았더라면 네가 이렇게 슬픈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몸부림치고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죽은 청년의 이름은 월터 패트릭 비쉐라고 하는 천재 무용수입니다. 그 어머니 패트리샤는 교회학교 교사와 성가대로 봉사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아이에게 화가 나면 던지고, 때리고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폭발시켰습니다. 피곤하고 지칠 때 신세를 한탄하면서 자기 아들에게 이유 없는 매질을 할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따뜻한 사랑과 격려를 기대했던 이 아들은 기대했던 부모로부터 받은 모욕적인 사실과 고통, 갑작스런 매질 앞에, 외로움과 고독 가운데서 약물에 의지하지 않고는 자기 인생을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유서에는 나는 약물로 망가지고 있다. 될 대로 되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사는 아파트 단지는 아파트 평수가 크면 차 두 대의 주차공간이 주어지고, 평수가 작으면 한 대의 주차공간이 하나 주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아파트에 사는 어떤 변호사는 두 대의 주차공간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항상 두 개의 주차선 중앙에 주차합니다.

 

경비가 말려도 자기 것인데 왜 그러냐고 말하니까 주민들이 그 변호사를 비웃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 목사님의 아들이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하고 한참 돌다가 씩씩거리며 들어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지금 변호사 차를 칼로 긁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입으로는 "그러면 되겠니?"라고 했지만 마음속에는 십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시원하게 생각하다가 갑자기 "저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옛날 혈기를, 아들이 그대로 가진 모습을 보고 등골이 오싹했다고 고백합니다.

 

대개 보면 부모의 것이 그대로 아들에게 물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것도 물려지고, 나쁜 것도 물려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넉넉하면 자녀도 넉넉한 마음을 가진 자녀로 자랄 것이고, 부모가 상처가 많으면 자녀도 상처가 많은 자녀로 자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상처받을 수 있는 가장 약한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릴 때 가족 관계 속에서 부모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로부터 상처를 남긴 사람들도 있고 친구 관계에서 상처를 남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금전 때문에 상처를 남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상처들은 때때로 자신에게 큰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남긴 상처가 열등감의 반응을 일으킵니다. 부모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부모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대인관계에 상처를 남깁니다. 교사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때로는 배우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독신을 자처하면서 살아갑니다. 아내와 남편에게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지 못합니다. 금전 때문에 상처가 된 사람들은 돈에 관련되어 따지기를 좋아하며 다른 사람들을 금전적으로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사실은 어느 한사람도 이러한 상처를 가지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살아오면서 형성된 상처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 모두가 상처 입은 자들입니다.

 

히브리어로 상처를 라짜즈 라고 말합니다. 그 뜻은 산산 조각나다. 깨뜨리다. 타박상을 입히다. 눌러 부수다. 낙담시키다.’ 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로 사용되는 상처는 블랍토 라고 말합니다. 그 뜻은 방해하다. 해롭게 하다.’ 입니다. 두 단어의 뜻만으로도 상처는 남을 해롭게 하고 낙심시키고 산산 조각나게 하고 방해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처가 갖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단순한 사건이 큰 상처를 가져옵니다. 상처는 지극히 사소한 말 한마디, 사사로운 행동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작은 행동과 말이 눈 덩이처럼 불어나 큰 상처가 됩니다.

 

둘째, 가까운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함께 사는 사람, 늘 만나고 교제하고 접촉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상처란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형제가 형제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늘 만나던 사람, 함께 사는 사람이 던지는 말 한마디는 큰 상처가 되어 각인됩니다.

 

셋째, 상처는 점점 커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상처는 치료하면 아물고 회복이 되지만 방치하거나 건드리면 점점 커져서 생명을 위협하게 됩니다. 넷째,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30년을 하루도 편한 날 없이 상처만 받고 살았다는 사람과 상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목사님도 상처를 받으십니까?" "어떻게 보입니까?" 라고 되묻자. 그는 "목사님이야 무슨 상처가 있겠습니까?" 그때 목사님은 말합니다. "제가 일생동안 목회 하면서 겪고 받았던 상처들을 이야기 해 볼까요? 그걸 책으로 엮는다면 삼국지 분량보다 많을 겁니다. 다만 저는 그 상처들을 그 때 그 때 치유하고 떨쳐버리고 지우려고 노력하며 살아 왔을 뿐입니다. 어떤 상처를 받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치유하느냐 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도 대통령도, 장군도, 회장도, 의사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생이라면 상처가 있기 마련입니다. 다만 그 상처가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다섯째, 상처 중에는 마음의 상처가 가장 크고 깊다는 것입니다. 성형수술의 발달로 신체 각 부위의 성형은 물론 흉터 역시 감쪽같이 없애는 의술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상처는 성형도 수술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은 드러나거나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깊고 깊어서 측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수에 긁히고 찔린 상처는 없앨 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은 채 오래 오래 남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가장 불행한 과거를 가졌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두 여인이 있습니다.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던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로서 즉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지난날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습니다. 특히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겪은 수치와 모멸감은, 물을 길러 우물에 왔던 수가 성의 여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고통이었습니다. 간음 장소에서 끌려와 뭇사람 앞에서 인민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고통을 본문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라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붙잡혀 변명의 여지도 없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았습니다.

 

또한 그들로부터 끌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돌로 쳐 죽이려고 많은 사람들이 둘러 선 가운데에 여인이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인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두려움, 절망, 수모 그리고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간음한 여인이 겪은 수치, 상처, 괴로움 뒤에는 교활한 음모가 있었다는 사실도 역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간음 현장에서 붙잡혔다는 것이 수상합니다. 그것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 체포됐다는 사실이 더욱 수상합니다. 사람들에게 들킬 만한 장소에서 간통하는 남녀는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 어떤 음모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현장을 덮쳐 데려왔다는 것은 계획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간통한 남자는 없고 여자만 끌려 왔다는 점입니다. 레위기 2010절 말씀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222절에도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을 희생양으로 삼는 어떤 음모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빠지고 힘없는 여인만 걸려든 것입니다.

 

확실한 이야기가 본문 4절에서 6절 말씀에 나타납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으나 매번 실패하여 이 여인을 희생양으로 잡은 것입니다. 많은 군중들이 이 여인을 둘러싸고 모두 다 외면한 채 돌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공의와 정의 실현을 위해 여인을 죽이려고 돌을 들고 서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군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그리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여인이 어떤 상처를 받고 있는지 아셨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활한 죄도 목격하셨고, 정의의 사도처럼 흥분한 군중들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몸을 굽혀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대꾸하시지 않고 고개를 숙여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자 시간이 흐르면서 분노하여 돌을 집어 들고 서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한 사람씩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당사 상황을 본문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 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수모와 치욕의 순간들이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일순간 정죄, 고발, 분노, 심판의 분위기는 반전되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고 다시 평정을 되찾았습니다. 저주와 어둠과 죽음이 떠나고 한 순간에 안식과 평안의 빛이 온 것입니다. 상처를 치유하시고 회복을 주시는 조용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여인은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그때 예수님이 응답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여인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시고 계십니다. 받은 여인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그의 삶을 회복시키십니다.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용기와 재기의 삶을 허락해 주십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충격, 감동, 환희, 기쁨, 자유, 희망,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진정한 예배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 후 여인은 헌신, 봉사, 전도, 구제, 거룩한 삶,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는 라이벌인 그 동료가 너무 미워서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의 모습으로 그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그의 모습으로 그리면 그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이 그의 얼굴을 경멸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얼굴을 그의 모습으로 완성했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은 그림을 보고 그 미술가의 얼굴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을 때 전혀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인가가 그를 계속해서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문제가 바로 그 동료에 대한 자신의 미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가룟 유다의 얼굴을 지워 버리고 예수님의 얼굴부터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속의 증오가 사라지면서 그는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는 미움과 원한과 분노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며 살아야합니다. 용서는 영혼과 육체를 치유합니다. 삶을 회복시킵니다. 인생을 살면서 상처를 받으셨습니까? 원한이 생기고 복수심이 불타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는 자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자이며 자신의 삶을 회복하는 자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이 여인은 용서의 은혜로 삶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동등한 용서의 은혜로 다가오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아멘.

 

 

 

상처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