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설교원고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습니다(막12:30) : 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3. 5. 6. 15:49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습니다(12:30)

 

 

목사 주태근

 

시카고 트리뷴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빌 맬로리라는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러 인도를 여행했습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그 해답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브론(Chevron)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Gas를 넣다가 주유소에 쓰여 진 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여행을 하시려면, 저희에게 물어보세요." 그래서 그는 안으로 들어가 일하는 종업원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여행자인데요. 물어볼 게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뭘까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 그 종업원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저 여기서 일한 지 얼마 안 되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그는 옆의 다른 종업원에게 다가가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여행자인데요. 물어볼 게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뭘까요?" 두 번째 직원은 잠간 기다리라고 하고서 한참 고객 서비스 매뉴얼 책을 살펴보더니 하는 말이 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에 대한 설명을 볼 수가 없는데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똑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는 교회와는 별로 상관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귀찮은 듯이 그를 쳐다보면서 자동차 앞 유리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빌이란 사람은 세브론(Chevron) 주유소를 들릴 때마다 돌아다니면서 인생의 목적이 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빌 맬로리 씨는 주유소 메니저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희 직원들에게 항상 같은 질문을 물으시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만을 들으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저희 주유소 본사에 그 질문을 해 보시지요?

 

그래서 빌은 주유소 본사에 그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적어서 서신을 보냈더니 몇 주가 지나서 답장이 왔습니다. 편지를 뜯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신용카드 신청서 용지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위인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목적이 없는 사람은 키 없는 배와 같다. 한낱 떠돌이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목적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지으시고 존재케 하신 데는 그분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제일 큰 목적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할 때 기뻐하십니다. 시편의 기자는 주는 그의 예배를 그의 사랑을 신뢰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147:11)고 말씀했습니다.

 

경기도 광명시에서 한 장로님이 목욕탕을 개업했습니다. 장로님은 목욕탕 개업예배 때 담임목사님이 주일성수를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신신당부를 하시기에 주일에는 철저히 영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목욕탕 수입은 주일에 30%이상을 차지하는데 목욕탕을 하면서 주일에 휴업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상 사업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목욕탕 수입은 갈수록 어려워져 수도세를 내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장로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지하수를 파기로 결정했습니다. 150m가량을 파니 물이 터져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구정물 같았고 계란 삶은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이상한 물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처음에는 무척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물을 끓여 놓고 보니 물이 깨끗하고 투명해졌습니다. 그 물은 바로 유황온천이었습니다.

 

그 후 장로님의 목욕탕은 성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도심지에서 유황 성분이 다량 함유된 온천이 개발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겠습니까? 이 장로님은 주일을 꼭 지키겠다는 그의 마음 때문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얼마 후에 이 장로님은 교회의 교회건축위원장이 되어 건축헌금을 가장 많이 드리는 복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그리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내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한 율법사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예배드리는 자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해야 하느냐,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그 첫 번째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열정적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너희 관심과 주의를 전적으로 기울여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주 사려 깊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뜻을 다하여 하는 내용은 사려 깊게 세밀하게 배려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실제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반응하는 예배는 실제적인,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된다는 그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뜻하는 히브리어의 본래 의미는 섬긴다”“부복한다의 뜻을 갖습니다. 또 헬라어도 경배한다”, “받들어 섬긴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이라고 하는데, Worship이란 말은 가치라는 의미를 가진 Worth란 말과 신분을 뜻하는 Ship이란 말이 합쳐서 이루어 졌습니다.

 

,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최고의 가치를 지니신 하나님께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과, 복종하는 마음과 경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갓피플닷컴이 크리스천이 주로 하는 나쁜 예배습관은 무엇일까?’를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대부분 응답자들이 설교시간에 잠깐 다른 생각을 하거나 졸음에 빠진다고 답했습니다. 가장 많은 응답이 나온 답은 설교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으로 응답자의 31.5%421명이 답변했습니다.

 

이어 18.3%가 예배에 뒷자리를 찾아 앉는다고 답했고, 14.1%는 친구와 대화, 그림낙서 등 주보에 각종 글을 써넣는다고 응답했습니다. 또 말씀만 시작되면 졸거나 주보에 있는 광고나 다른 글을 읽는다는 답변도 각각 13.8%11.2%를 차지했습니다.

 

이밖에도 한시라도 핸드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한 핸드폰 애착형성도가 있으며, 축도 전에 미리 짐을 챙기고 끝나자마자 총알같이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칼퇴근형성도도 있으며, 예배시간에도 다정한 연인성도도 있으며, 친구들과 예배시간에 소곤대는 반상회성도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일까? 예배의 영성을 진단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합니다.

 

여기서 "신령"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spirit)'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즉 예배하는 심령은 성령의 감화 감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정으로"라는 번역 역시 '진심으로'라는 뜻으로 오해되기 쉬운데, 이 단어는 그냥 '진리로(in truth)'라고 직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과 풍성하고도 깊은 지적 교통을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적어도 예배 시간만큼이라도 세상의 딴 생각, 내 속의 못된 생각들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진리만이 나의 사고 작용을 온통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이처럼 '성령과 진리'를 통하여서만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가리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니라 ''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신 까닭에, 우리는 그 앞에서 사람을 만나듯이 예배할 수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 인사하듯이 무슨 '삼천 배' 따위로 허리를 굽실거리는 것이 예배가 될 수 없고, 무슨 사람을 식사 대접하듯이 제사상을 가득 차려 놓고 예배라고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바른 예배의 자세는 오직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서도 서로 대화를 나누듯이, 예배 시간 중에는 오직 하나님과 영적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영감 있는 찬송을 통하여 우리의 기쁨과 영광돌림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감사와 간구가 하나님께 전달되어야 하며,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히 깨달아져야만 합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성경 말씀의 계시만이 이런 예배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예배 시간에 우리의 사고 활동의 100퍼센트가 이처럼 하나님과의 영적 의사소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예배 본다'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보다'라는 말은 '무엇을'이라는 직접 목적어만을 취할 수 있지 '누구에게'라는 간접 목적어를 취할 수 없는 동사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본다."라고 말하면 문장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예배 본다'는 말은 '하나님께'라는 예배의 대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저 '본인이 예배 그 자체를 구경한다.'는 의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영적 예배생활이 전혀 없고 그저 예배의 방관자에 불과한 형식적 예배자가 오늘날 얼마나 많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 '예배본다'는 말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자는 당연히 '예배보다'가 아니라, '예배드리다' 혹은 '예배하다'라는 표현을 써야 마땅합니다.

 

예배의 구경꾼이나 방관자 그리고 예배의 연출자가 아니라, 성령의 뜨거운 감화 감동하심과 성경 진리의 밝은 계시를 통하여 예배 그 자체에 깊이 동화된 가운데 그 예배의 대상되신 하나님과 끊임없는 영적 교통을 나눌 줄 아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자신의 심령은 아무 관계없이 그저 몸만 이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한 시간 동안의 지겨움을 참고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예배가 끝나면 후련한 듯이 바삐 떠나면서 '오늘 예배드렸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이 주일예배 시간만큼이라도 참 하나님과 진정한 영적 교통을 나누는 신령과 진정의 산제사를 드리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말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렇게" "신령과 진정"이라는 올바른 예배 자세를 갖추고, "자기에게" "하나님 아버지"라는 참된 예배의 대상을 향하여 바른 예배드리는 자들을 그 성부 하나님께서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배는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1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말씀하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반응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든 행위를 포함하므로 의식화된 예배뿐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심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한국 초대 교회 때는 예배당이 평양에만 있었습니다. 어떤 믿음 좋은 여성도가 평양에서 진남포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평양에서 진남포까지는 너무 먼 거리이므로 주일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토요일에 출발하여 월요일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두 아들이 달구지에 짐을 싣고 가다가 길에 떨어져 있던 막대기가 튕겨나가면서, 공교롭게도 달구지 옆을 지나가던 말을 세게 찔렀습니다. 이에 놀란 말이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는 바람에 말을 타고 가던 갓을 쓴 점잖은 노인이 그만 땅에 떨어져 중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두 아이도 경찰서로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검찰청을 거쳐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이 어느 아이가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형은 형대로 제가 그랬습니다.” 동생은 동생대로 제가 그랬습니다.”라며 형과 동생이 서로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재판관은 증인도 없는 일에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불러서 어머니의 의견은 어떻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벌을 받을 바에야 작은 아이에게 주는 것이 정당합니다. 큰 아이는 전처에 소생이요. 작은 아이는 내가 낳은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가정이라 생각한 검사는 당신은 무엇 하는 사람이요?”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배드리러 가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에 큰 감동을 받고 예수 믿으면 다 그렇게 됩니까? 내가 돈을 줄테니 이 진남포에 예배당을 세우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진남포에 예배당이 세워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삶을 통하여 예배드릴 때 세상이 감동을 받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주간은 목적이 이끄는 예배목적주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큰 인간의 응답입니다. 예배의 영성을 회복시킵시다. 주일예배는 하나님과 약속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지키면서 정성 있게 준비하여 예배해야합니다.

 

주일 낮예배만 예배시간으로 이해하며 예배를 드렸습니까? 주일오후예배, 삼일기도회, 새벽기도회 모두가 공예배입니다. 우리의 삶을 예배로 승화시킵시다. 예배가 생활화됩시다. 이번 주간 예배목적이 이끄는 주간이 되어 예배의 삶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12:1) 아멘.

 

 

 

 

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