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인생(요2:1-5)
목사 주태근 : 추수감사절/초청전도주일
한 사내가 부부싸움을 하고 홧김에 차를 몰고 달리다 그만 교통사고를 내고 의식을 잃고 기절해 버렸습니다. 병원에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가 3일 만에 깨어나 보니, 깨어난 사내의 곁에 예쁜 두 명의 간호사가 번갈아 그를 간호해 주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가 천국입니까? 당신들이 천국에서 기다린 내 부인들입니까?” 그때 옆에 서 있던 아내가 놀라면서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이 양반 아직도 정신 못차렸구만, 빨리 정신 차리고 일어나요.” 이런 호통에 정신을 차린 남편이 민망해 하면서 말합니다. “당신이 있는 것 보니 천국은 아니 구만!”
모든 종교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 좋은데 가는 사람이 있고, 나쁜데 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슬람교 는 천국에도 등급이 있는데, 이 땅에서 충성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천국에 올라가면 1천명의 미인들에 둘러싸여 살게 됩니다. 그 다음 2등급에 올라가면 9백 명의 미인들과 함께 즐기며 삽니다. 미인들과 둘러싸여 즐기는 향락의 자리 그곳이 바로 무슬림들의 천국입니다. 여자에 대한 천국은 전혀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좋은 세상을 극락이라고 말합니다. 불교는 이 세상을 고통의 땅으로 해석합니다. 이 땅에서 왜 인간들이 고통을 당하는가?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극락은 욕심이 없는 세상입니다. 바로 열반의 체험입니다. 열반은 ‘아무것도 없다’란 뜻입니다. 무상무념의 곳입니다.
도교의 천국은 ‘한가함’ 그 자체입니다. 신선도에 의하면 정자나무 아래 바둑을 두는 노인, 낮잠 자는 사람, 그 옆에서 차를 끓이는 소년, 할일 없이 빌빌 노는 곳, 그곳이 도교의 천국입니다.
19세기 미국의 대 각성운동을 이끌었던 기독교복음 전도자 무디가 어느 날 교인이 죽어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습 니다. 그래서 장례식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수님은 장례식 설교를 어떻게 하였는가를 참고하기 위해 예수님의 장례설교를 찾았으나 장례식설교가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죽은 자들을 모두 살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하여 무디는 매우 큰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기독교는 죽은 자의 종교가 아니라 산 자의 종교요,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라 잔치의 종교이다.”
오늘 성경본문은 어느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한 해프닝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혼인 잔치에도 무언가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 잔치의 가장 중요한 음료수인 포도주가 동이 나 버린 사건입니다. 갈릴리 가나라는 작은 동네에서 즐거운 혼인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요즘 치러지는 서구의 결혼식과는 달리 당시 근동 지방의 결혼 예식이란 정말 성대한 잔치입니다. 보통 그 잔치가 삼일씩 연이어 계속됩니다. 멀리서 흩어져 있던 친구들, 친척들이 다 함께 만나, 먹고 마시며 즐기는 기쁨과 환희가 넘쳐 나는 신나는 잔치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어머니도 와 계셨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집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인척 관계가 있었던 집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이 잔치를 차려 주는데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가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는 데 당황하는 주인과 하인들의 얼굴들을 예수님의 어머니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혼인 잔치에 일어난 문제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포도주가 동이 나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래 유목민입니다. 양고기가 주식입니다. 그런데 양고기에는 반드시 곁들이는 음료수는 포도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음식입니다. 그런데 잔치 집에 주 음료인 포도주가 동이 났으니 혼인집의 주빈인 신랑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잔치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입니다. 활기 있고, 명랑한 웃음소리와 노래 소리가 들려야 할 잔치집이 갑자기 침울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넉넉히 준비되어야 할 포도주가 떨어 질 때 잔치집의 분위기는 설렁해 진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원래 포도주란 기쁨을 상징합니다.
시편104편15절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잔치의 포도주란 기쁨과 환희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기쁨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쁨을 상실하고 방황하며 슬퍼하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잔치집이 순식간에 초상집이 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잔치 집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최상의 포도주, 최고의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적막하고 침체했던 잔치집의 분위기를 일신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슬픔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생은 잔치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초상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과연 우리의 인생마당의 슬픔을 축제의 기쁨으로 바꾸는 기적을 보고 싶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주 예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의 사건에서 무엇보다 먼저 관찰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거기 계셨고 거기에 초청함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세례요한의 증거에 의해 요단강 일대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가난한 작은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이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쁘게 이 초청을 수락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마을은 중요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잔치는 중요한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었던 작은 사람들은 중요한 사건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성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가나가 아주 작은 마을임에 불구하고 그들의 여행 스케줄에서 이 마을을 빼놓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초청되어 기적을 행하셨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초청하는 잔치마다 중요한 잔치가 됩니다. 예수님을 초청하는 가정마다 중요한 가정이 됩니다. 예수님을 초청하는 개인마다 중요한 개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1:12)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든 예수님을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잔치에도 문제는 존재합니다. 어느 가정에도 어느 공동체에도 문제는 존재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피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직장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한 청년이 유명한 '적극적 사고방식'의 저자인 놀만 빈 센트 필 박사를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상담을 마치면서 "선생님, 저에게 제가 지금까지 겪어온 그런 문제가 없는 직장을 하나 소개해 주실 수 없습니까?"부탁했습니다.
박사는 그에게 "당장 소개하지요"답하더니 그에게 "내 차를 타라"고 하더니, 즉시 그를 데리고 나가 그의 사무실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공동묘지로 데리고 가서, "형제여, 저 곳이야 말로 문제가 하나도 없는 직장이지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피해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직면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리아는 잔치집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런 문제조차도 해결하실 수 있는 주님이심을 알았고 믿었던 것입니다. 믿었기에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먼저 예수님께 나아와 "포도주가 없다"(3절)고 잔치집의 문제를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려면 기도가 있어야합니다. 마리아는 훌륭한 기도자의 모범입니다. 그녀는 가톨릭의 주장처럼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들과 동등한 인간으로서 기도의 훌륭한 모범자 이십니다.
이런 마리아의 요청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여기에 "여자여"라는 말 때문에 시험에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여기서 사용된 '여자'라는 말은 본래 로마의 황제 어거스투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사용한 최상의 존칭이었다고 하면서 영어로는 "Lady"라고 번역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최상의 극 존칭어 입니다.
마리아는 "내 때가 이르지 못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요청이 받아들여질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문제가 있으십니까? 포도주가 떨어지셨습니까? 어떤 제한 속에 살아가십니까?
포도주는 유대인들에게 인생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격언처럼 사용되던 말에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없어지는 고난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험은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 기도할 수 있어야합니다. 오직 기도를 배운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기적의 시작입니다. 또한 본문이 소개하는 기적의 결정적인 열쇠는 순종이었습니다. 특히 하인들의 순종이 돋보입니다.
7절에서 예수께서는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도주이지 물이 아니라고 항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8절에 예수님께서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명하셨을 때 그들은 당신이 우리를 망신시킬 작정이냐고 항의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순종했던 그들은 기적의 비밀을 이해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9절에 "하인들은 알더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기적은 믿음의 기적이고, 순종의 기적입니다. 때로 주님은 우리에게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일을 요구하실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합리적 이성의 틀 안에서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적은 체험되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제가 합리적 이성을 존중하지만 이성에만 묶이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적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순종이 가져온 기적은 무엇입니까? 돌 항아리 여섯에 넘쳐나는 포도주의 기쁨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항아리에는 20-30갤런의 물을 부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섯 항아리면 120-180갤런의 포도주가 예비 된 것입니다. 학자들은 한 사람에게 열 잔씩 돌아가도 200명분을 대접할 만한 분량이었다고 말합니다.
풍성한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양만 풍성함이 아니라. 질적으로 비할 데 없는 맛을 지닌 포도주였습니다. 오죽하면 손님들은 처음보다 나중에 더 좋은 포도주가 나왔다고 말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가까스로 우리의 필요만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이런 풍성한 축제의 기쁨으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적은 단순히 기적이 아닌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이 표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결정적으로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믿게 하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위해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예수님 역시 오늘의 제자들을 위해서도 동일한 기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의 이름 없는 마을에서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오늘 우리의 마을에서도 동일한 기적을 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름도 표기되지 않은 무명의 가정을 위해서, 아니 이 무명의 신랑 신부를 위해 이런 기적을 행하셨다면, 나 같은 무명의 가정을 위해서도, 우리 같은 무명의 인생을 위해서도 동일한 기적을 행하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그분을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에게 이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종을 결단해 보십시오. 기적의 축제가 시작될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며 사는 인생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은 축제의 기쁨으로 사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못 사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 이 기쁨을 빼앗긴 인생들을 위해 이 땅에 오사 친히 우리의 슬픔과 슬픔의 원인인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신 그분은 오늘 우리의 주가 되셔서 이 기쁨을 우리에게 돌려주고 싶어 하십니다. 넘치도록 말입니다.
만일 이 예수님을 우리의 인생의 축제의 주인으로 모신다면 이제 곧 여러분에게도 잔치가 시작 될 것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기뻐하며 사는 잔치인생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 아멘. -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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