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축복(눅2:8-14)
목사 주태근
어느 교회에 어린이 한 명이 전도되어 교회에 새롭게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성탄절이 다가와 교회에서는 성탄절 준비로 부산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하는 말 "어, 교회에서도 크리스마스해요?" 그렇게 묻더라는 것입니다. 참 우스운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아이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는 지금까지 아무 의미도 모른 채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축제로만 알았고, 그래서 그 날을 기다리면서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그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바르게 알고 본래 그 날을 정한 이의 의도대로 지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일의 정확한 날짜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냥 12월 25일을 정해 놓고 우리가 성탄절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셨다고 하는 것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을 우리는 믿고, 또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 년도와 날짜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1세기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지금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날을 찾아 축제처럼 보낼 형편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생일보다는 사망일을 더 기념하는 풍습이 있어서 크리스마스가 없었습니다.
2세기경에도 거의 비슷한 상황에서 쫓기던 예수님의 사도들이 순교함으로 체계적인 성탄일의 정립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4세기경에 들어와서 당시 만연되어 있던 마니교에 대항하기 위하여 주님의 생일을 정하여 성대히 경축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교부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예수님의 탄생일의 중요성을 언급하여서 354년 로마의 동짓날인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이날은 낮에 길이가 가장 짧다가 차츰차츰 길어지는 날이요. 이는 생명의 상징이라 하여 그날로 정하게 된 것입니다. 5세기 초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최대의 축일로 선언했고, 로마의 유스트니아우스 황제는 주님의 탄생 일자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설을 다 폐하고 칙령으로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확정을 지어서 공포한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지키는 성탄절이 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글자와 예배를 뜻하는 ‘미사’ 이 두 용어가 합쳐서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용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에 그분을 위해 미사를 드린다고 하는 뜻에서 유래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탄생은 온 세계에서 축하하고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신 구세주 예수를 환영하며 축하하며 경배하는 성탄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처음 크리스마스를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책 누가복음 2장에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2장에서 최초의 성탄절에 주어진 메시지를 통하여 성탄절의 축복을 다시 한 번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성탄절의 메시지를 처음 듣는 축복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식이 가장 비천하고 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인 평범한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당시에 목자들은 가장 천한 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돌보며 추운 밤을 떨며 들판에서 보냈습니다. 가족들과도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사나운 짐승들이 사는 거칠고 억센 땅에서 양떼를 지키며 적은 보수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성전 희생제사에 쓰이는 짐승을 키우는 종교지도자들의 고용인에 불과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식이 왕에게로 직접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건한 종교 학자들이나 레위인에게로 오지 않았습니다. 지배하여 군림하는 군인들에게도 오지도 않았습니다.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도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메시지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도 위대한 소식을 가장 먼저 이러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알리셨습니까? 단지 그들만이 중요한 시간에 깨어 있어 놀라운 메시지를 듣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 보이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은 그가 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해야만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특별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선택하실 때 사막의 구석에 숨어 지내는 모세를 발견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을 선택할 때도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지파 중에서 선택하셨으며, 2대 왕으로도 가장 미약한 집안의 가장 어린 아들인 다윗을 지목하셨습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실 때도 어부와 세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평범하고 낮은 자들을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첫 번째 성탄절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은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복음의 기쁜 소식에 신속히 응답할 수 있는 정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첫 번째 성탄절에 가장 먼저 성탄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천한 삶을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성탄절의 메시지를 전한 설교자가 되는 축복입니다.
첫 번째 성탄절 예배의 찬양대는 누가 했습니까? 천사들입니다. 첫 번째 성탄절 예배의 설교자가 누구입니까? 역시 천사들입니다. (눅 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이 왔을 때 목자들은 주의 영광이 그들에게 비취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성전 지성소의 영광과 같은 광채로 나타남을 여러 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성탄절 때도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났고 그들은 갑자기 주의 영광으로 둘러싸였습니다. 목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죄가 순수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서 너무나 확실하게 드러나졌기 때문에 무서움에 떨며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사야역시도 성전 안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에 두려움에 떨며 부르짖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 주므로 목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천사가 첫 성탄절에 전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목자들이 두려워하는 그 때 성탄절의 기쁜 소식이 그들에게 들려왔습니다. "무서워 말라. ..기쁜 소식이 있다. 오늘 너희를 위해 구주가 나셨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은 두려움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두려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두려움과 비정상적인 두려움입니다. 정상적인 두려움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부터 보호합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두려움은 마음을 혼란시킵니다. 불안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다.
그 이유는 비정상적인 두려움 때문입니다. 병원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반은 비정상적인 두려움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입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주원인입니다. 어떤 의사는 최근 그의 환자들 중에서 60퍼센트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제거하면 치료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복음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찾아 온 질병도 떠나갑니다. 다시 용기가 솟아나고 의욕이 솟아납니다. 기쁨이 충만해지며 사랑이 솟아납니다.
여러분의 두려움이 무엇으로부터 온 것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사단의 공격에서 자유케 되고 죄의 권세에서 풀려나 평안하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목자들에게 천사가 전한 메시지는 구세주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구세주만이 당신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구세주만이 여러분에게 새로운 삶을 주실 수 있습니다. 구세주만이 여러분을 강하게 하며 지켜 주시며 복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라고 했습니다. 첫 성탄절 때 천사가 전한 메시지는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죽음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외로움이나 어떤 형태의 두려움이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기쁜 소식은 그 두려움을 충분히 치료하고도 남을만한 복음입니다.
더 나아가 두려움이 사라질 뿐 아니라 큰 기쁨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죄가 용서되고 두려움이 사라질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기쁨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마다 행복하게 됩니다. 여러분 역시 성탄절을 통하여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의 능력이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성탄절의 메시지에 따르는 축복입니다.
평범한 목자들이었으나 성탄의 메시지를 듣고 그들은 곧바로 행동을 하였습니다.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듣는 것은 굉장한 일이지만 만약 그들이 들은 것으로 끝내었다면 불행한 사건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뇨? 우리가 경배하러 왔노라' 하였을 때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선지자의 예언을 들어 베들레헴이라고 가르쳐 주었으나 자신들은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목자들은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양들이 들에 그대로 있었으나 그것을 모두 뒤로 하고 베들레헴으로 나아갔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서둘러 갔다'고 증거 합니다. 자신이 돌보는 양떼보다 구세주를 뵙고 경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목자들과 동일하게 성탄의 기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들은 것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나는 직업상 어쩔 수 없다.' '나는 가족에 매여 있어서 어쩔 수 없다.' '나는 경제적으로 곤란해서 할 수 없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복음을 듣고 즉각 응답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여러분의 발목을 잡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뒤로하고 우리를 위해 오신 구주를 뵙기 위하여 서둘러 목자들처럼 주님께 나아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특별히 성탄절 예배는 우리가 목자들처럼 구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를 찾았던 목자들의 심정이 되어 주님을 찾아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증거 합니다.
“(눅 2: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
목자들은 다시 평상시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삶으로 그냥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뵙고 변화된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송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마음에 주님을 뵈온 감격과 기쁨이 충만하여 새롭게 되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들은 메시지와 그들이 만난 아기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와 주님을 뵙고 돌아간다면 그냥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그냥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감격을 안고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기쁨으로 충만하여 새로운 결단과 변화된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헌신의 열매가 나타나고 새롭고 거룩하게 변화된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가 넘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고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속에서 올라오고 그로인해 확실히 변화가 드러나야 합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모트는 37세까지 캐비닛 제조공으로 일했습니다. 이 사람은 공장에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전혀 의미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습니다. 어느 겨울 그는 런던 거리를 배회하다가 한 교회를 보고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존 하야트 목사가 요한복음 3장으로 ‘거듭나는 도리’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래, 나도 거듭나야 한다’는 강렬한 소원을 가지게 됐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의 문을 여셔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이후 그는 “내 망치 소리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춥니다. 그리고 내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고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습니다. 예수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듭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 소망은 산 소망이었습니다. 그는 전에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행복한 목공으로 완전히 변화됐습니다. 삶도 점점 풍요로워졌습니다. 자기가 일하던 목공소가 그의 소유가 됐고 점점 커졌습니다.
결국 에드워드 모트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됐고 예수님의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찬송시를 기록했습니다. 그 찬송이 찬송가 539장입니다.“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여러분, 성탄절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선물이 아닙니다. 카드도 아닙니다. 산타는 더욱 아닙니다. 그저 흥을 돋우고 신나게 즐기는 것도 아닙니다. 성탄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두려움을 대신 정복해주려고 오신 구주가 아기 예수라는 메시지를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지를 듣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입니다. 메시지에 응답하여 서둘러 주님을 뵈오러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주님을 뵙고는 변화된 모습으로 삶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번 성탄절에는 중요한 것을 하나도 지나치지 않고 특별한 감격을 안고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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