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축하(마2:9-11)
목사 주태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의 천사들과 당시 최고 지성의 대표인 박사들과 보통사람들이었던 베들레헴 목자들이 축하드린 우주적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국경과 인종과 계층과 계급을 초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오늘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이 날을 지키고 반기고 축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대하는 헤롯왕과 박사들의 태도를 대비시켜보면서 우리들의 성탄축하자세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헤롯의 성탄절입니다.
헤롯은 주전 37년에 왕위에 올라 유대나라를 통치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유대나라 왕이 되긴 했지만 정통 유대인이 아닌 에돔 족속의 후손이었던 탓으로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늘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박사들의 얘기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이 나셨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마음속으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 한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라고 했고, 8절을 보면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두 구절 속에 헤롯의 음모가 들어 있습니다.
"가만히 불러 자세히 묻고..." 자신의 흉계를 드러내지 않고 마치 진리를 탐구하려는 구도자처럼 위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교활성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증거 해줍니다. 나쁜 일, 옳지 못한 일일수록 행여 남이 알까봐 쉬쉬하기 마련입니다. 귀에 대고 소곤거리기 마련이고 서로 비밀을 다짐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엔 비밀이 없습니다. 절대로 말하지 않기로 한 그 사람이 입을 벌려 말을 퍼트리기 때문입니다. "이건 절대로 말하면 안 돼. 당신한테만 믿고 하는 얘기니까"라며 천 번, 만 번 다짐하고 말하지만 그 사람 역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열 사람, 스무 사람에게로 번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힘써야 합니다. 남이 들을까봐 겁나고 남이 알까봐 걱정되는 일이나 말은 피하거나 안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다 죽이니"라고 했습니다. 헤롯은 음모, 거짓, 술수, 살인으로 성탄절을 맞았습니다.
성탄절을 맞는 바람직한 태도는 경건과 경배와 감사로 맞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경건한 자세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을 향락과 놀이와 돈 버는 계절로만 여기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박사들의 성탄절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박사들의 성탄절입니다.
박사들은 제일 먼저, 별의 인도를 따랐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떠날 때부터 별을 바라보고,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별이 머물러 있는 곳을 찾아가 거기 계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것입니다.
복음적 성경학자들은 그 별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특별한 계시의 별이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별을 통해 아기 탄생 사실을 천문학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같은 과학자라도 하나님을 믿는 과학자들은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고 그 증거를 밝히고 있지만 무신론 과학자들은 다윈이 말한 대로 진화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같은 천문학자라도 아기 탄생을 알리는 계시의 별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무슨 뜻인지조차도 모르는 학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안드로포스`라는 헬라어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는 단순한 천장이나 하늘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세계,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헤롯은 자신의 욕망과 권력의지와 감정의 인도를 따랐고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따랐습니다.
박사들은 크게 기뻐하며 경배했습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했고, 본문 11절을 보면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뻐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 이름만 들어도 기쁘고 어깨춤을 덩실 추고 신바람이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 이름만 들어도 닭 벼슬이 돋고 기분이 나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최고 지성을 대표하던 박사들인데 그들은 예수 탄생을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이 좋고 기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배드리는 일이 기쁘고 또 기뻐야 합니다. 예배시간엔 졸고 앉아있고, T.V. 드라마 시청시간엔 정신이 반짝 드는 교인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박사들의 경우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멀고 먼 길을 찾아오면서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높은 자나 왕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예물을 가져가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3:15을 보면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라"고 했고, 출애굽기 34:20에서도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다양한 제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제사도 빈손으로 드리는 제사는 없습니다. 피로 드리든지, 짐승의 고기나 기름으로 드리든지, 향품을 드리든지, 곡식을 드리든지 반드시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과 함께 드렸습니다.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에 들어갈 때 그들은 빈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올 때는 빈손이 아니었습니다. 금과 은과 동은 물론 소와 양과 약대를 몰고 나왔고, 보따리마다 가득 채워 가지고 나왔습니다. 애굽에 들어갈 때는 70명이 들어갔고, 나올 때는 장정만 60만 명이었습니다.
그들을 빈손으로 나오지 않게 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나를 만나러 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를 갚으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왕으로 나신 이를 경배하러 오면서 결코 빈손으로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예물은 보통 예물이 아닙니다. 성경 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신학적으로도 뜻이 깃든 예물이었던 것입니다.
황금은 구약시대 제단을 꾸미고 제사도구들은 만드는데 사용되었으며 불변과 영광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황금을 예물로 드린 것은 예수님의 영원한 왕권, 즉 만왕의 왕 되심을 상징한 것입니다. 유향은 당시 일반 백성은 사용할 수 없는 향료였습니다.
출애굽기 30:37을 보면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향을 만들 때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유향을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 즉 하나님 되심을 상징한 것입니다. 몰약은 마취제, 방부제로 사용했는데 그리스도이신 주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선물이나 예물은 뜻이 담겨 있을 때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같은 반지라도 결혼반지와 보통 반지는 그 뜻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박사들은 멀고 먼 길을 찾아 왔고 빈손으로 오지 않고 뜻 깊은 예물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뜻있게 살고, 뜻있게 믿고, 뜻있는 일을 합시다. 뜻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삽시다.
박사들은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 가니라"고 했습니다. 아기 예수를 죽으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는 헤롯왕을 만나면 그의 음모에 동조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헤롯을 만나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 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지시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지시를 받느냐, 누구의 조종을 받느냐, 누구의 지령을 받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집니다. 간첩은 파송자의 지령을 받습니다. 암호나 비밀 접선을 통해 지령을 받고 행동합니다. 죄와 유혹의 지령은 사단이 내립니다. 그러나 믿음과 착한 행실의 지령은 하나님이 내리십니다. 누구의 지시를 받느냐에 따라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둘째는 다른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박사들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헤롯에게 가는 길과 하나님이 지시하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앞에도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마태복음 7:13∼14을 보면 좁은 문이 있고, 넓은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좁은 문은 생명 길이어서 좁고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고, 넓은 문은 크고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그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다 가는 길, 누구나 다 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담배나 술을 예로 들겠습니다.
안 하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해서 그것이 선하고 좋은 일이 아닌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습니다. 동방박사가 선택한 다른 길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길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바로 그 길입니다.
요한복음 14:6에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석가도, 공자도, 마호멧도, 소크라테스도, 나폴레옹도 "내가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길이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십니다. 우린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을 알 때도 있고 모를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 하루 내가 할 일, 가야할 곳, 만나야 할 사람들을 압니다. 그러나 한 시간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약 4:14).
그러나 시편 139:2∼4을 보면 "주님은 나의 앉고 일어섬을,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모든 행동을, 내 혀의 말까지도 아신다"고 했고, 139:16에서는 "내 형체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주께서 나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139:23에서는 "내 마음을 아시며 내 뜻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마태복음 10:30에서 주님은 "너희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나를 몰라도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나는 내 마음을 모르고, 내 행동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내 길을 아시고 예비하십니다.
나는 나를 조절하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조정하시고 통제하십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은 나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계절입니다. 동방박사의 신앙과 태도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예물을 드립시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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