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죽음/마14:1-12
목사 주태근
교부 크리소스톰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로마 황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엄명을 받았으나, 그는 죽어도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하며 맞섰습니다.
그가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로마황제는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신하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을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게 고독한 개인감방에 집어넣어라"그러자 그 신하가 울상을 하며 대답했습니다."황제님, 크리소스톰은 크리스챤입니다."
황제가 고함을 지릅니다. "크리스챤이면 별 놈이냐? 빨리 집어넣어라!""황제님은 모르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거기다 가두어 넣더라도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으면서 중얼중얼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한답니다. 그러니까 혼자두면 그에게 좋은 일만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황제가 다시 명령합니다.
"그러면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신하가 고개를 흔들며 말합니다. "황제님, 그건 더욱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오히려 전도할 기회가 생겼다고 매우 좋아할 것이며, 얼마 있지 않아 그 안의 사람들은 모조리 크리스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 극악무도한 악질죄인도 변화시켜 오히려 상급을 받게 해주는 일입니다." 황제가 노발대발합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당장!" 신하가 사색이 되어서 다시 말했습니다.
"아이쿠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 중에는 처형당할 때 두려워하거나 우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한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제일 좋은 것을 안겨주는 셈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고함을 질러댑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아이고" 하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 중국 청년이 미국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마치고 좋은 관리직을 제공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미국 정부의 관리가 되기를 굳게 사양하고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왜! 그처럼 좋은 자리를 거절하고 목사가 되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의화단 사건이 있었을 때에 중국의 내륙 지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우상을 섬기는 큰 신당이 있었는데 하루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군인들에게 끌려서 그 신당으로 왔습니다. 군인들은 그들에게 우상에게 절하고 신앙을 버리도록 위협했습니다. 우상에게 절을 하면 살려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한 줄로 세우고 우상 앞을 지나가며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끌려온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절을 하기는커녕 고개도 숙이지 않고 우상 앞을 걸어 지나가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는 군인 앞에서 목이 땅에 떨어져 구르며 순교하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절만 한 번 하면 사는데, 163명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나는 어렸지만 그 사건은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의 죽음의 보고서입니다. 백성들이 참 선지자로 알고 그렇게 따랐던 선지자, 청빈과 거룩, 경건의 산 증인이었던 세례요한이 그것도 헤롯의 부인인 헤로디아와 그의 딸 이 두 여자의 공모에 의해서 순교했다는 내용입니다.
더구나 헤롯이 술김에 한 맹세에 의해서 목이 잘려 죽었다는 사실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세례요한이 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는지 사람들은 알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또 안 사람들은 분노에 떨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허망하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런 비극적인 죽음도 있는가? 사람들은 황당해 했습니다. 우리들 역시 많은 의문을 가집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하시는 지를 바로 알기를 원합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가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에 갈릴리의 분봉 왕은 헤롯 이었습니다. 분봉 왕이니까 정확하게 말씀드린 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왕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허락을 받아 갈릴리를 다스리는 갈릴리의 지역 영주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헤롯 안디바 입니다.
이 헤롯은 배다른 형제인 동생 빌립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이름은 헤롯 빌립인데 성경에서는 혼동을 피하려 빌립 이라고만 부르고 있습니다. 이 빌립의 아내 이름은 헤로디아 입니다. 헤롯은 이미 결혼한 사람으로서 부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아내, 즉 제수를 좋아해서 제수하고 결혼했습니다. 동생 부인을 빼앗은 것입니다. 좋아했다기보다는 헤로디아의 힘을 빌려 로마로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얻어내려고 결혼을 한 것입니다. 야망을 위해 조강지처를 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첫 번째 부인과는 이혼을 했습니다.
이 결혼사건은 당시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한 마디 권고했습니다. 본문 4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여기서 '취했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간 것입니다. 헤롯은 근친상간에다 간음이라는 죄까지 같이 범했습니다. 레위기 18:16,20:21의 금한 말씀을 어겼습니다.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에게는 헤롯은 눈에 가시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들고일어난 것입니다. 화가 난 헤롯은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헤롯이 동생부인을 빼앗은 것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세례요한을 보내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 지 헤롯의 두 번째 부인 헤로디아의 반응과 헤롯의 반응을 통해 깨닫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을 마가복음 6장에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19절에,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되 하지 못한 것은" 그랬습니다.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의 지적에 회개는커녕 원수로 여겼습니다.
요한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못하자 죄지은 자신이 더 분노하고 있습니다. 요한을 원수로 여겼습니다. 마음으로만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실제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 19절 입니다.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되..." 분명히 죽이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진리를 전하는 사람을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까? 그가 외친 진리 때문입니다. 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왜 돌에 맞아 죽었습니까? 그가 전한 진리 때문입니다. 무슨 범죄 한 게 아닙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돌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회개하고 진리를 따랐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설교했을 때 모인 사람들은 그 설교를 듣고 받아들였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들을 따랐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돌을 던지지 않습니다.
죽이려고 이를 갈지 않습니다. 진리는 항상 두 가지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회개하든지 돌이 날라 오든지 전도해보면 이런 두 가지 극단을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욕하고 신경질을 내면서 가버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는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죄인들로 하여금 듣고 가만히 있게 못합니다. 가슴을 치며 회개하게 하든지 죄가 드러난 것 때문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분노와 수치로 떨게 하든지 찔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반응이 없는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영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말씀을 들으면 반응이 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반응이 온 다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합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삶이 바뀌어 집니다. 죄를 지었지만 그 죄로 인해 회개하고, 더 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헤로디아 는 그 반대입니다. 요한의 지적에 대해서 회개하기는커녕, 원수로 여겼습니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요한만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겠습니까? '저 인간 언제 죽이나?' 그 생각밖에 안 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22-24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여기서 우리는 두 단어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22절의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라는 단어입니다. 누가 요청한 것도 아닌데 헤로디아의 딸이 자원해서 친히 들어와 많은 사람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처럼 춤 솜씨를 한번 자랑해보려고 했을까요? 여기에는 뭔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소 헤롯의 성향을 잘 아는 엄마와 딸의 합작품 임을 짐작케 합니다.
그 다음 24절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보통의 경우 이런 일이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면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엄마는 생각할 것도 없이 즉시 답을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이런 얘기를 들은 딸은 끔찍해서 놀라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25절을 보면 더 이상합니다.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급히'라는 단어와 '소반에 담아'라는 단어, '곧'이라는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었다는 듯이 딸이 급히 왕에게 나갔습니다. 요한의 머리를 지금 곧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것도 소반에 담아 달라는 것입니다.
소반에 담는 것은 먹을 것을 담는 것입니다. 식탁 위에 올려놓고 먹기 위해 소반에 담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여자들은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테이블에 올려놓고 식사하면서 보고 즐기려는 의도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통해 들려진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그 강팍한 마음 때문에 여러 사람 죽게 됩니다. 진리는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전한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마음으로 죽이고, 입으로 죽이고, 공개적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반면 헤롯은 어떻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헤롯은 그래도 요한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두려워하면서도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된 이유가 뭡니까? 2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헤롯은 요한의 말을 들을 때 달게 들었습니다.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달게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원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 말씀은 맞는 말씀이다. 내게 유익이 된다,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 말씀 전하는 요한이 원수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든지 마음을 열고 달게 듣는 사람은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새로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아직 심방이나 말씀전하는 것이 서툴러서 실수를 많이 합니다. 하루는 장로님 댁에 심방 갔는데 사무엘 상 3:18-21절까지를 읽는다 생각하고는 잘못하여 삼상 4:18-21절을 읽었습니다.
삼상4:1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 년이었더라"
어떻게 들으면 '당신 나이 많이 먹었는데 이제 빨리 죽어라'는 말로 들립니다. 이 목사는 당황해서 어떻게 말씀을 전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장로님 집에 가서 이 말씀을 읽었으니 목회 하겠습니까? 시험 들게 생겼습니다. 얼굴도 쳐다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죽지 말고 은혜롭게 죽어야지' 하면서 이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아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감정을 품지도 않고, 문제 삼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든지 달게 받아들이는 사람--복된 사람입니다. 성숙한 사람입니다. 물론 전하는 사람이 잘 전해야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달게 듣기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듣기 바랍니다. 어떤 말씀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는 기쁘게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헤롯은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들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고 청산해야 합니다. 그런데 헤롯은 거기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그냥 그 여자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버텼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었지만 무시해버렸습니다.
진리의 지적을 받았지만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통해 지적했지만 듣고도 가만있었습니다. 청산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의 소리, 양심의 소리, 신앙의 소리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일 이후에 헤롯은 두 가지 치욕적인 경험을 합니다. 첫 번째 부인의 아버지인 나바티아 왕이 이 문제로 헤롯과 전쟁을 벌여 헤롯이 패배하게 됩니다. 헤롯은 아주 굴욕적인 전쟁을 겪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헤롯의 패배는 세례요한을 목베어 죽인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이 사건을 봤습니다. 또 하나는 후에 헤롯이 헤로디아를 설득해서 로마에 왕이라는 칭호를 달라고 간청하다가 일이 잘못되어 부인과 함께 리용이라는 곳에 추방되어 버립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만약에 세례요한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였더라면 그의 인생은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악이 승리하는 법은 없습니다. 항상 진리가 승리합니다.
헤롯이 죽인 것은 세례요한의 육체뿐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가 요한은 죽였지만 그의 메시지는 죽이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죽였지만 그의 영향력은 죽이지 못했습니다. 무슨 이적만 생기면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착각할 만큼 요한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본문을 잘 읽어보면 요한이 헤롯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왕인 헤롯이 요한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정말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돈 있고 권력 있는 자가 아닙니다. 신앙의 칼라가 분명한 사람, 하나님께 붙들린 표시가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을 세상은 두려워합니다.
거룩한 사람, 죄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내가 신앙인 인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과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기 원하십니까? 거룩하십시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이 되십시오. 신앙의 칼라를 분명히 하십시오. 진리의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세상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죽어도 영광이 됩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은 이 세상에 진리가 승리한다는 승리의 죽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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