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성도들 (눅19:1-10)
목사 주태근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가 살았던 19세기의 러시아는 부패할 대로 부패했습니다. 급진적인 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그도 그들의 주장에 동조했고 그들의 모임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다가 1849년 봄 19세기 러시아의 정치사건 페트라셰프스키사건에 연루돼 다른 회원들과 함께 사형 틀에 묶였습니다. 영하 50도의 추위가 그의 살을 바늘처럼 찔렀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5분뿐입니다. 그는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면서 3분을 사용했습니다. 이제 2분만 남았습니다.
"아,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나다니. 내게 다시 한 번 더 생명이 주어진다면 정말 보람차게 살 텐데!" 그는 28년간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로 그 때 멀리서 한 병사가 황제의 특명을 갖고 달려 왔습니다. "황제께서 사형집행을 중지하라는 특명을 내렸소."
그는 가까스로 사형을 모면하고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 갇혔습니다. 거기서 수감생활을 하던 초기에 나탈야 폰브예지나라는 여성이 그를 찾아와 신약성경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신약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4년 내내 성경은 나의 베개 밑에 놓여 있었다. 어떤 때는 혼자 성경을 읽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주던 때도 있었다. 어떤 죄수에게는 그 성경으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삶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와 부귀가 있다 해도 그것이 신앙에 위배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편에 설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급진적인 혁명을 꿈꾸었지만 성경은 그 자신을 철저히 성경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10년간의 시베리아 유배에서 돌아와 무신론적인 사회개조 운동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소설 인물들을 통해 러시아 사회를 변화시키는 저술활동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체제에 순응하지 못했고 간질병 때문에 창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항상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가 남긴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같은 작품들은 기독교 신앙의 깊은 차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사망한 지 125년이 지났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소설 인물들을 통해 여전히 문학계는 물론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먼저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바꾸시려고 역사하십니다.
신문과 TV의 보도를 들으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번 이 세상을 확 뒤집어 놓을 수 없을까?' 잘못 들으면 오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한데, 좀 더 신앙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선하고, 좀 더 정직하고, 좀 더 정의로운 사회로 바꿀 수 는 없을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현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기를 사모한다면 아마 한두 번씩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거짓된지? 얼마나 음란한지? 얼마나 사치스럽고 비도덕적인지? 얼마나 잔인하고, 불법이 난무한지요?
이런 현실을 보면 누구든지 '이 세상 좀 바꾸어 놓을 수 없을까?'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과 함께 떠오르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코드가 무엇인가? 기독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리고에서 세리장으로 있던 사람입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의 낙원'이라는 뜻을 가진 아름다운 도성이자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런 부촌에서 세리장의 자리에 앉을 정도면 그가 얼마만큼의 재력을 소유한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이 백안시하는 네 부류의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창녀나 이방인, 그리고 죄인처럼 취급받던 사람이 바로 세리들입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마다 세무공무원을 파송하여 식민지에 있는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 이를 위해 현지인을 고용했는데, 그들로 부과한 세금을 걷도록 할당제 형식으로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러면 이 현지인들은 자기 동족들에게 가서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특별히 열심이 있고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뽑아서 팀장 역할을 하는 세리장으로 세웠습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얼마나 자기 동족에게 미움을 받았을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당시 세금을 산정하는 기준이 있었겠지만, 대부분 세리들이 나름대로 각 가정마다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려면 규정보다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했을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의로운 자, 순결한 자'라는 뜻입니다. 결국 삭개오는 자기 이름값을 못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동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안면몰수하고 자기 인격과 가문을 팔아 돈 버는 데만 생명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에게 있어서는 퍽 불행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그런데 중간에 여리고 동네로 통과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미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여리고 도성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동네를 지나간다고 하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 와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을 둘러싸고 같이 걸으면서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이라도 귀담아 들으려는 아름답고 멋진 진풍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던 일을 제쳐놓고 달려 나왔습니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유난히 키가 작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가까이 접근은커녕 사람들 틈에 끼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체면 불구하고 옆에 있는 뽕나무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린애들이 하듯이 뽕나무에 걸터앉아 예수님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하고 넘어가야 될 중요한 첫 번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상에서 부유하게 사는 사람,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 자기의 어떤 꿈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삭개오처럼 영혼의 갈증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큰 구멍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것이 있을 텐데.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어떤 갈증이 있습니다.
이러한 갈증을 늘 마음에 담고 있다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자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인생을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엘리트층이라 하여도 그들의 내면에는 죄책감과 갈증, 허무감이 있습니다. 어쩌면 영적으로 삭게오처럼 뽕나무에 올라가 앉아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예수님을 쉽게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세상의 것으로 만족과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 다른 대안을 찾아 애쓰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눈을 가지고 그들의 내면 깊은 곳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예수님이 나무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삭개오를 모르고 지나가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다 알고 계시고 기억하시지만, 특별히 한 사람의 갈급함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그가 삭개오인지 어떻게 아셨겠습니까? 그는 메시아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저녁에 너희 집에 들어가 유하여야 하리라." 그 말을 듣고 삭개오가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마주 앉게 되는 은총이 주어진 것입니다. 삭개오의 죄와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어린 양이 되어 죽으실 속죄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 앉은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영혼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얼마 후 삭개오가 벌떡 일어나더니 주님 앞에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보시옵소서! 내 재산 절반을 정리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놀라운 회개입니다.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난한 자를 생각하라.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는 말씀이 있지만 자기 재산을 반이나 처분해서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자 삭개오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그분의 맑은 눈동자 앞에서 자신의 추잡한 모습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났는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바꾸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명령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액수인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를 위해 주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더 나아가 "주님, 제가 세리로서 토색하여 손해를 끼친 사람이 있다면 장부를 확인해서 4배로 갚겠습니다." 이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배상의 액수는 1/5입니다. 토색한 것의 1/5만 더 얹어서 갚으면 됩니다. 그런데 4배로 갚겠다는 것입니다. 돈 주머니가 회개한 것입니다. 생활의 변화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액수의 20배를 갚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감동을 많이 받았으면 예수님 앞에서 이런 약속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고백하는 삭개오를 보고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삭개오가 일어나서 자신의 변화 받은 모습을 간증하자 비로소 예수님이 구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 될 두 번째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로 만나면 삭개오처럼 반드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변화 받았을 때에 비로소 구원 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이 자리에 임재 하셔서 삭개오를 만나시듯 우리를 만나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진정한 변화와 역사가 일어납니다.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될 세 번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이야기의 속편입니다. 성경에는 삭개오의 속편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떠나셨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예수님 앞에 한 약속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약속을 행동에 옮겼습니다. 재산을 정리해서 반을 나누고는 그 동네의 빈민촌을 찾아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기절초풍했을 것입니다.
세리장으로서 악명 높은 그 사람이 갑자기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 "지금까지 당신들이 그렇게 어렵게 사는 줄 미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만나 내 자신이 잘못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받으세요." 하면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사실이 여리고 성을 들썩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장부를 들고는 자기가 토색한 집안에 찾아가 "내가 당신 집에 세금을 지나치게 부과하여 토색했습니다. 약 10만원 정도를 토색한 것 같은데 여기에 4배를 보태서 50만원을 드릴 테니 받으십시오." 하면서 손해액을 배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내 자신이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이렇게 회개합니다.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한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습니까? 이로 인해 여리고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주변에 삭개오와 같은 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을 짓밟고 성공하면 그것으로 인생의 소원성취를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공허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인생들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하면 굉장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인도의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1919년에 간디와 만난 자리에서 간디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기독교를 인도에서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하려면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랬더니 간디는 말합니다. “나는 네 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당신네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하십시오. 둘째, 당신네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십시오. 그 가르침의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저하시키지 마십시오. 셋째, 사랑을 강조하고,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으십시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타종교들을 보다 호의적으로 공부하고, 그 종교들 속에 있는 선한 것을 찾아내고, 사람들에게 보다 호의적으로 다가가십시오.” 그렇습니다. 간디의 말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좋은 충고의 교훈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의 원리로 확고히 붙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섬김을 삶의 중심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요 생명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먼저 내 자신이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진정한 회개와 믿음이 있어야 구원이 있습니다. 이때서야 비로소 세상은 점차적으로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아멘
'복음서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족케 하는 자(마18:1-10) : 목사 주태근 (0) | 2023.06.21 |
---|---|
신세대 리더십(요6:66-71)-목사 주태근 (0) | 2023.06.07 |
세리 마태를 제자로(마9:9-13) (0) | 2023.05.30 |
세례요한의 죽음(마14:1-12) : 목사 주태근 (0) | 2023.05.24 |
세 가지 비유(마13:44-50) : 목사 주태근 (0) | 2023.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