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 마태를 제자로(마9:9-13)
목사 주태근
남아프리카의 한 다이아몬드 광산업자가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를 발견했습니다. 그 크기가 레몬만 하였으니 그런 다이아몬드 덩이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이 다이아몬드를 런던으로 옮기기 위하여 가장 신임하는 직원들과 네 명의 경호원을 고용해 비밀리에 운반하게 되었습니다.
런던에 도착한 직원들과 경호원들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은행 금고로 직행하여 다이아몬드를 담아 온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석탄 덩어리 하나만이 달랑 들어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오히려 사장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몇일이 지난 뒤에 런던에 있는 사장의 사무실에 일반 소포가 우체부에 의해서 남아프리카로부터 배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가 담겨있었습니다. 그 사장이 생각한 가장 안전한 운반방법은 평범한 소포 우편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평범한 일반 소포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값진 귀중한 하나님의 초청장이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말 그대로 세리마태가 기록을 했습니다. 그가 기록한 이 복음서 안에서 우리는 많은 진리를 배울 수 있고, 많은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이 마태복음을 통하여 마태 자신에 대한 간증을 들음으로 우리가 도전 받는 은혜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그 부분을 여러분들과 같이 나누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어부 출신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물을 만지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마태는 자신이 근무하던 세관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9절 말씀에서 그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좆으라 하시니 일어나 좆으니라."
그런데 지금 이 사실을 누가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마태 자신입니다. 마태는 지금 자기 자신의 일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술적 표현은 예사 표현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된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사실인데, 그 사실을 마태 자신이 스스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강조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간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부르신 것은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일입니다.
"세리"는 지금 직업으로 말하면 "세무 공무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예수님 당시와 오늘 우리 현실과는 정반대입니다. 현대시대에 세무공무원은 자국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가진 자들에게서 세금을 내도록 하여 국가 발전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는 매우 훌륭한 업무로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업입니다.
단지 그들이 욕을 먹는다면 권력을 이용하여 국세를 착취하는 일을 함으로서 부정부패한 공무원으로 욕을 먹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의 세리는 지배국 로마의 이익을 위해, 민족에게는 엄청난 불이익을 주기 위해 일하는 매국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세금 징수권을 불하 받아 악착같이 세금을 거두어 들여 로마 당국과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에 혈안이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법정 증인으로 설 수도 없었고, 공적인 자리에 청함 받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에 대하여 국가관에 투철한 바리새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악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비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선생은 어찌하여 저런 것들과 어울리느냐고.....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부르신 것은 단순히 한 죄인을 부르신 차원을 넘어서 이 세상 어떤 죄인일지라도 다 부르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어떤 죄인도 구원하여 주시기 원하여 매국노, 파렴치범, 강력범, 흉악범, 그 어떤 죄인도 주님은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도저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그에게 '나는 이제 너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노라'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이 세리를 열두 제자의 하나로 삼으심으로 그를 한 지파의 수장으로 세우시는 것과 같은 의미를 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그와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무더기로 들어와서 완전히 하나의 지파를 형성하게 될 약속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앞으로 이런 식으로 비인도적인 삶에 빠져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왔던 사람들도 누구든지 마태처럼 예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제자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다고 해서 그의 직업이나 그의 과거의 삶이 옳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의 직업은 분명히 도둑질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노력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많은 재산을 갈취했습니다.
단지 다른 도둑들과 다른 점은 로마 당국의 정식인가를 받은 도둑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을 보였을 때 예수님은 그를 자신의 제자로 삼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마태같은 수많은 죄인들이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로 오라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한 사람이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으로 넘어왔는데 남한에서 그에게 시민권을 받았을 뿐 아니라 중요한 직책까지 받았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을 받아 줄 분 아니라 그렇게 사용하겠다는 뜻입니다. 마태는 바로 그런 첫 열매였습니다.
일본 작가 중에 우리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작가가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라고 하는 작가입니다. '길은 여기에', '빙점'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쓴 분입니다. 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간증적인 작품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는가를 밑바닥에 깔면서 작품을 그려나갑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작품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 약 8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자연히 인정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쓴 책이 일본에서 만도 수백만 권이나 팔렸고, 우리나라에도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을 읽는 사람마다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마음에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엄청난 기여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미우라 아야꼬를 전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그가 어떤 환경에서 예수님을 만났는지 아십니까? 당시 미우라 아야꼬는 폐병 환자였습니다. 생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서 매일매일 각혈을 하며 투병해야만 하는 수용소 안에 있을 때, 어떤 청년이 찾아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했습니다. 각혈을 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을 확률이 큰 초라한 여자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겉으로 볼 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동정하고 지나가면 끝인, 그저 한번 쳐다보고 눈물을 흘려주면 그것으로 끝인 존재, 죽으면 더 이상 찾아갈 필요도 없는 존재가 아닙니까?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를 찾아온 청년은 그 여인을 어떻게 보았는지, 각혈을 하면서 파리하게 말라있는 그녀를 붙들고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믿으면 당신은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라며 전도했습니다. 아마 그 청년은 이 여인이 나중에 일본 열도를 후끈하게 데울 수 있는 엄청난 작가가 되리라는 가능성을 못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여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수백 명이 나가서 전도하는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했지 않습니까? 이만큼 한 사람의 가치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합적으로 묶어 '세상'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이 세상은 전 인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안에 '나'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통합적인 용어 속에 전부 묶어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조금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라는 개인은 그 전체 속에 묻혀버리고 드러나지 않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했지? 그러면 나 하나 정도는 눈에 띄지도 않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서신서를 통해서, 특별히 사도 바울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은 죄인 세리를 부르신 것처럼 나를 역시 부르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해야할 사항은 세리마태가 예수님을 쫓아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를 먼저 보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를 먼저 부르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예수님은 세리마태에 집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초대되어 그들과 식사를 같이 하신 것은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새로운 친구로 대하여 주시는 계약 체결행위입니다.
주님은 지금 세리마태와 함께 많은 세리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나누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알지 못한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용납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세리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는 앞에서 밝혔습니다. "매국노"라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욕하는 "죄인"이란 단어 또한 단순히 실수한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Anderson이라는 신약학자는 "죄인"이라는 단어를 "사악한 자"라고 번역해야 정확한 번역이라고 말했습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할 거룩한 구세주가 매국노와 같은 세리와 사악한 협잡꾼들 즉, 인간쓰레기 같은 사람들과 기꺼이 교류하고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오늘 우리들의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착하게, 선하게, 의롭게 꾸며야 하는 줄로 알고 그렇게 노력하지만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을 가까이 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다가 지쳐버리고 스스로 적당히 신앙인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율법적인 신앙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오면 내가 용서해주고, 고쳐주고, 회복시켜주겠다고 초청합니다. 마 9:12∼13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오늘 우리는 이러한 주님 앞에 우리의 죄를 벗어버리기 위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꺼이 나아갑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건져 주시고,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여 주십니다. 마태는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제자의 길을 출발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부름에는 부름 받는 대상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응답하는 자들입니다. 부르는 자가 있으면 응답하는 자가 있습니다. 누구를 부르실 것인가 택한 자들을 부르십니다.
요15:16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나 같은 죄인 택하시고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순종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택함 받은 자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계의 선교기관 가운데 '위클리프 성경 번역회'라는 선교기관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에 투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어학에 특별한 재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미나 아프리카나 조그마한 나라부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 ,쓰는 말은 있어도 글이 없는 그곳 사람들의 언어를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그 언어를 가지고 성경을 번역합니다. 한사람이 마태복음을 번역하고 죽으면 누군가가 뒤를 이어 다시 그곳에 가서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또 죽으면 다음 사람이 가서 사도행전을 번역합니다.
이 선교회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 한 사람이 남미의 어떤 마을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말인 '순종' 이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을 하여야 좋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을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일을 꼭 하라고 하면서 " 네 모든 마음으로'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심부름 가는 아들 뒤에 아버지가 "네 마음을 나누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순종'이라는 단어를 번역하기를"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길게 번역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세리 마태는 부르심을 받고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예수님 만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어두움에 살던 자들, 죽을 수밖에 없던 자들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아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학문과 인격을 겸비한 훌륭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뛰어난 학문 세계와 고매한 인격을 흠모하여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한 번은 제자들이 교수님의 생일에 제각기 선물을 하나씩 드렸습니다.
그 중 한 제자는 자기가 그 교수님의 제자라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너무 가난해서 선물을 준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교수님께 "저도 선물을 드리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교수님은 "무슨 선물인가? 자네는 선물을 준비할 돈이 없었을텐데"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 제자는 "교수님께 드리는 선물은 제 자신입니다. 제 마음을 교수님께 바칩니다."라고 부끄럽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교수는 "난 이 세상에서 참 많은 선물을 받아 보았지만 지금 자네에게서 받은 선물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네. 내가 제일 원하던 선물은 바로 자네가 준 선물이라네. 나도 나 자신을 자네에게 선물로 주겠네"라고 감격해 했다고 합니다.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 그것이 바른 순종이요 제자의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죄인이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찾아 오셨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죄인 세리마태를 부르심은 바로 우리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두려워 말고 주님께 손을 들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드려 새로운 인생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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