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이끄는 삶(고전10장 31절 ~ 33절)
목사 주태근
어떤 아줌마가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지금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습니다. 택시 운전사에게 어디로 가자고 말을 하긴 했는데 언니 집으로 가자고 했는지, 아니면 동생 집으로 가자고 했는지 생각이 안 났습니다. 그래서 앞에 앉아서 운전하는 아저씨를 건드리면서 ‘아저씨! 내가 언니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까? 동생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 운전수가 뒤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손님 언제 타셨습니까?’현대인의 삶을 그대로 표현한 풍자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톨 후랑켈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절망은 삶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서구 문화가 발달하고 물질이 풍족해졌지만, 사람들이 삶의 가치와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끝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스이스턴 일리노이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휴 무어헤드박사(Dr.Hugh Moorhead)가 세계의 저명한 철학가, 작가, 그리고 학자 250명에게 “당신은 삶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설문조사에 갖가지로 응답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좋은 답을 제시했노라고 자부합니다. 일부는 확실치는 않지만 나름대로 각자의 확신대로 썼다고 말했으며, 또 몇몇은 삶의 목적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고 말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학자들 가운데 몇 명은 이 무어헤드 박사에게 만일 그 답을 발견하거든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인생들이 대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어느 랍비의 개’에 관한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랍비 개가 자기의 인생을, 아니 아마 견생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견생을 깊이 연구한 결과 자기 꼬리에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개는 자신의 꼬리를 잡으려고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꼬리를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습니다. 잡힐 듯 잡힐 듯하지만 잡히지 않는 행복이었습니다.
드디어 랍비 개는 힘이 다하여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어느 늙은 개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나도 자네처럼 열심히 행복을 잡기 위해 돌고 돌았지만 결국 잡지 못하고 한 가지 사실만을 깨달았네, 꼬리를 잡으려고 열심히 돌면 어지러울 뿐이지만, 내가 한 목표를 향해 달릴 때 그 꼬리는 나를 따라 오더라네.” 이것이 유대인의 지혜입니다. 행복은 열심히 노력하고 탐구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바른 삶의 목표를 정해 놓고 그 인생을 달리는 사람에게 꼬리처럼 붙는 결과라는 말입니다.
2006년 세계를 움직이는 100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릭워렌 목사님이 쓴 ‘Purpose driven Life’라는 책입니다. ‘drive’라는 동사는 ‘이끌다’, ‘통제하다’, ‘방향을 제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운전한다는 의미로 제일 많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Purpose driven Life, 즉 목적이 이끄는 삶’ 이란 이 책에서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삶이 잘못된 가치에 의해서 이끌려 간다고 다섯 가지를 지적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가 죄의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에 의해 끌려 다니며 삽니다. 이렇게 과거의 죄의식에 끌려 다니는 삶은 후회에서 벗어나고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서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허비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는 원한과 분노의 쓴 뿌리를 씹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입은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고통의 순간들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하면서 분노를 품어내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침묵의 분노로, 때로는 쏟아 붓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셋째는 두려움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려움이란 매우 충격적인 경험, 비현실적인 기대, 엄한가정환경, 유전적요인 등으로 생깁니다. 그러나 그 원인에 상관없이 두려움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종종 좋은 기회들을 놓쳐버립니다. 모험을 싫어합니다. 현 상태를 유지하기에 급급한 삶입니다. 넷째로 물질에 이끌려 사는 사람입니다. 소유가치와 존재가치를 혼동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소유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여준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소유가 많은 자들 앞에서는 비굴한 자가 되기도 하고, 자신이 좀 가졌다 싶을 때는 없는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그들 앞에 우쭐거리고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부모나 배우자, 자식이나 스승, 친구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가 자신의 삶을 이끌도록 내버려둡니다. 무슨 일을 하면서도 주변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고민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군중을 따라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군중 속에서 헤매며 길을 잃게 된다고 말합니다. 목적을 잃은 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미국의 한 기자가 어느 날 아르헨티나의 한 정치지도자를 만났습니다. 국민들로부터 가장 추앙 받는 그 지도자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오히려 이 기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유럽의 백인들이 먼저 정착한 곳은 북미가 아니라 남미였습니다. 지하자원과 물도 북미에 비해 부족하지 않고, 기후도 좋습니다. 그럼에도 왜 북미가 남미보다 잘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기자는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지도자는 웃으며 이렇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남미는 스페인사람들이 황금을 구하러 찾아온 땅입니다. 그러나 북미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을 위해 찾아온 땅입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을 찾아온 그들의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목표가 없는 달음질과 싸움이 헛수고인 것처럼,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인생은 방향키 없는 배와 같이 바다를 배회하는 헛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목사는 암살당하기 두 달 전 설교에서 "저는 남기고 갈 재물도 없습니다. 또 제 인생에서는 남기고 갈 화려한 사치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다만 헌신된 생애를 남기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남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 것인가? 그것은 바로 목적이 이끄는 삶에 자신을 헌신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저 유명한 미국의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M.Anderson.1902-1973)은 정말 세계적인 가수였습니다. 그는 천재적 가수로서의 노래 때문에 23개국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케네디 대통령 취임 식장에서 미국 국가를 독창하였습니다. 1958년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를 유엔 대표로 지명한 적까지 있습니다. 1963년에는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훈장인 대통령 자유상패를 받았습니다. 40년간 성악가수로서 명예를 떨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그가 은퇴하는 시간에 남긴 말은, 그 동안에 끼친 영향과 감동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감동과 영향을 주었습니다.
"나는 보잘것없는 노예밖에 될 수 없는 인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내가 유명해진 것이지 결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하나님께 명예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성경에서 영광이란 히브리어로 '카볻' 이라고 말합니다. 그 기본 뜻은 ‘무거움, 무게, 존귀함, 명성, 명예’ 등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주로 ‘지극한 부와 지위와 지고한 명예와 존경 그리고 권능이 있는 자’에게 사용된 말입니다.
대부분의 구약성경에서 이 말이 하나님께 사용되었을 때는 '광채로 인한 밝음'에 사용되었습니다(출 24:17). 즉 하나님 자신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말씀합니다(출16:10).
십계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 전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가운데 가득하였다고 표현하였습니다(출24:16).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즉 성막 작업이 모두 끝났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고 하였습니다(출40:34). 솔로몬이 성전 공사를 완료하고 봉헌을 드릴 때에도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했다고 표현하였습니다(왕상8:11).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환상 중에 보니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했다고 말하였습니다(사6:3). 에스겔 선지자도 영감의 황홀 속에서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을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겔1:28). 모두 다 예외 없이 하나님 자신의 임재와 관계된 밝음의 표현이 바로 ‘영광’입니다.
신약성경의 경우 이 말은 주로 '독사' 라는 헬라말로 번역했습니다. ‘명예, 명성, 부와 존귀, 높은 의견’이라는 뜻으로, 역시 광채와 같은 밝음(brightness)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탄생 시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는 모습을 표현하되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취매"라 했습니다(눅 2:9).
그리고 이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경우에서도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말하였습니다(요 2:11). 즉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이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산물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알고 믿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영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생의 삶의 목적을 아는 일입니다. 목적을 위한 삶이 바로 인생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제일의 목적이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시19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전도서 12장 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본분'이란 말은 인생의 전부란 뜻입니다. 인생이 받은 전 시간, 전 호흡, 전 활동, 전 소유, 전 재능, 전 행복은 다 하나님 경외를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마 4:10). 또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마 22:37).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내 존재의 원인이요, 내 구원의 근거요, 내 궁극적 행복의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목적을 위해 지음 받았고 목적을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집트 카이로에는 시 중앙에 우뚝 솟은 산이 있습니다. 마치 서울의 남산 같이 올라가면 카이로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는 산입니다. 이 산을 ‘모카탐’이라 부릅니다. ‘모카탐’이란 말은 아랍어로 ‘베어냈다’는 뜻입니다. 그 산의 반대편에 바위가 움푹 파인 천연동굴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성(聖) 사만(St.Samaan)을 기념하여 세운교회입니다.
성(聖) 사만은 10세기 사람입니다. 어느 날 사만과 그의 주변의 성도들은 함께 모여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특별한 기도를 드리는데 바위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큰 동굴이 생겼습니다. 그 때 떨어져 나간 바위가 약 100톤 이상이나 되는 큰 바위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념하여 동굴교회가 설립된 것입니다. 이곳은 참 아름다운 천연동굴인데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이 교회를 명물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들어가는 좁은 입구가 완전히 쓰레기 동네가 되도록 방치했습니다.
사만은 지난 날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두를 고치러 온 어느 여인이 다리를 올리자 사만은 그 여인의 맨다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만은 여인의 다리를 본 것이 가책이 되어 자신의 칼로 한쪽 눈을 찔러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눈이 범죄 하면 한 쪽 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만은 이때부터 자신의 전 삶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예배하며, 경건하게 일하며, 전도하며, 바로 섬기면서 살아 마침내 성자라는 칭호를 받는 모범적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에 자신의 삶을 올인 한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승리입니다.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starbucks)는 전 세계에서 급성장함으로써 기업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 회사의 성공 비결을 데이비드 슐츠 회장이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 회사는 ‘항상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되풀이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확실하게 답하기 위해서 온 종업원들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다 보니 커피 맛이 좋아지게 되었고, 서비스 질이 최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성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적이 이끌어야 합니다. 목적에 충실할 때 사업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스타벅스 종이컵에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 릭워렌 목사님의 글이 기록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종이컵에 인쇄될 여러 가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부모는 계획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생명을 주셨고 또한 목적을 주셨습니다. 당신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면 결코 당신의 진정한 목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당신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우리의 근원과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의미와 목적과 중요함, 그리고 운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인생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로 지음 받은 인생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신앙의 선진들 역시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도바울도 역시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4:12,14).” 아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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