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시리즈

선교의 영성

주 바나바 2019. 10. 2. 11:48

선교의 영성(28:18-20)

 

레슬리 뉴비긴 선교사는 35 동안 인도에서 선교를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와서는 고국이 세속화된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더 이상 기독교 문화와 가치관이 영국 사회와 교회에서 그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교회를 깨우려는 목적으로 선교적 교회라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1990이 되면서 유럽과 미주지역에서도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도 교회들이 급속도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초대교회가 보여준 교회 본질의 모습을 되찾아야 교회가 교회 다울 수 있다고 하면서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개교회 성장에 온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성도들의 삶을 자기 교회에 국한시켰습니다. 헌신된 교인은 일주일 내내 거의 자기 교회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이런 가치관은 성도를 자기 교회와 자기 신앙생활에만 국한시키는 이기주의적인 성도로 만들게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많이 성장했지만 세상에서 빚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와 원인이 무엇일까? 바른 교회, 바른 성도라면 이런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선교적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적 삶이란 성도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이 선교적 삶을 살면 교회는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선교적 삶을 산 표본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적교회로 우뚝 섰습니다.

 

교회를 참으로 교회되게 하는 길은 선교하는 일이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종탑이 우뚝 솟은 웅장한 예배당, 성직자의 검은 가운, 장엄하게 거행되는 예배의식, 제도와 조직, 교리와 신학 그리고 다양한 교파 등이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도 경하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교회의 본질일수는 없습니다. 애당초 교회는 어떤 교파나 기관으로 존재된 것이 아니라 부름 받은 사람들의 신앙집단으로 시작됐습니다. ‘부름 받은 거룩한 무리는 그들이 부름 받게 된 동기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악세상에서 부르신 그분의 뜻을 충족시키는 일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뜻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게 하고, 주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선교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옛날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에게 두 가지 축복의 약속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는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즉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함이요. 둘째는 네가 복의 근원이 되어 모든 민족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되리라.” 즉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막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도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430동안 노예로 고생하는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구출하여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그 선민을 통해서 세계 만민을 구원코자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해변을 지나시다가 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 잡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독교 박해의 제일인자였던 바울을 다메섹에서 부르실 때도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세계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후 2천년 동안 많은 사람을 부르실 때에도 그의 신분이나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부르신 목적은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묻는 제자들에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었으니 너희가 알바 아니다. 말씀하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얻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잃으면 이 땅에서 교회의 존재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성도가 선교적 삶을 살지 못한다면 바른성도가 아닙니다. 교회가 할 일이 많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사명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즉 구속의 사건을 만백성에게 전하는 일입니다. 바로 선교적 삶입니다.

 

어떤 선교학자의 말대로 등불은 불이 타고 있을 때에만 등불이지 만일 불이 꺼지면 그것은 이미 등불이 아니며 거기에는 싸늘한 심지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선교에 있습니다. 교회에 선교의 불길이 꺼지면 죽은 교회입니다. 성도의 생명도 선교에 있습니다. 선교적 삶이 바로 바른 성도의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화란의 신학자 호켄다이크(J.C.Hoekendijk)는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교회는 아무데도 선 곳이 없다. 교회는 끊임없이 창출되어가는 선교 도상의 실체일 뿐이다. 교회는 땅 끝과 마지막 때를 향하여 열려있으며 결코 정착지가 될 수없는 잠정적인 한 처소에 불과하다. 교회는 이런 한에 있어서만 교회일 수 있다.그렇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선교입니다.

 

오늘날 유럽과 북미 그리고 한국에서 새로운 종류의 교회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선교적 교회 운동입니다. 선교적 교회운동은 전통적 교회를 부정하거나 혹은 대치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유럽과 북미 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이 급속하게 약화되고 성도가 급감하면서 심각한 위기를 느낀 결과입니다.

 

북미와 유럽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현재 진행 중인 교회 운동이 선교적 교회운동입니다. 이러한 선교적 교회운동은 현재 한국 교회 내에서도 시도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하락하고, 교인들의 감소가 뚜렷해지면서 건강한 교회의 모델을 찾는 과정 중에 한국 교회가 선교적 교회를 추구하는 운동입니다.

 

이런 즈음에 우리들은 선교의 영성을 바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선교의 영성은 성경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목적은 선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목적도 선교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목적도 선교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실 목적도 선교입니다. 예수님 전생애가 선교적 인생입니다. 한마디로 선교적 삶을 사셨습니다. 교회 역사서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선교입니다. 교회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여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목적도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도 선교입니다. 선교는 모든 교회와 성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인 선교를 등한시 하는 교회는 바른교회라 할 수가 없습니다. 삶의 궁극적 목적인 선교를 등한시 하는 인생은 삶을 헛되게 보내고 있는 삶입니다.

 

선교의 영성은 선교의 사명을 자각하는 데 있습니다


선교의 사명을 자각한 성도는 반드시 선교적 삶을 살아갑니다. 바로 선교의 영성적존재가 됩니다. 선교의 영성적 존재는 선교를 바로 이해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선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선교의 올바른 정의는 이러합니다.


선교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모든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화운동입니다. 온 인류를 복음화시키는 사명입니다. 이 지구상의 살고 있는 모든 영혼들과 한 사람의 영혼은 온 천하보다 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에 영혼구원의 선교사역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계복음화에 앞장서야 합니다. 교회란 주님께서 구원받은 우리들을 통하여 세상을 선교하기 위해서 허락하신 구원의 방주입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의 초점은 선교와 전도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선교적 교회 미셔널처치가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모든 성도는 선교적 삶 미셔널라이프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선교의 영성적존재의 정체입니다. 또한 선교적 교회, 선교적 삶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재능, 물질, 생명을 선교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잘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학생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성도가 일터에서 일을 하고, 주부가 가정에서 가사를 하는 이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이 선교로 귀결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교적 삶이란 삶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선교에 두는 삶을 말합니다. 선교사가 되어 한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에 먼저 선교적 삶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A 나라로 부르셨는가 아니면 B 나라로 부르셨는가를 고민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과연 내가 선교적 삶, 즉 보내심을 받은 자, 그리고 보내심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보내심을 받은 자 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을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우리들 가운데로 인간이 되어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일을 하시며,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어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세상에 가서 이것처럼 하라고 명합니다.

 

성육신의 핵심은 포기와 동일화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지위, 명예, 대접 받음을 포기하고, 우리처럼 즉 동일화되셨습니다. 그 분은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우리처럼 일하시고, 우리와 같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일을 하셨습니다.

 

어떤 선교지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더 어려운 일은 내가 그 곳에 가서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런 삶에 헌신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선교에 헌신한다는 말은 내가 어떤 나라 혹은 민족에게 헌신한다는 말이기 보다는 내가 내 삶을 예수님께 드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나의 삶을 드린다는 것은 선교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내가 먼저 나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삶이 선교의 영성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선교적 삶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어떻게 살기로 요청한 삶 즉 그분의 성육신의 삶을 따라 우리도 예수님의 보내심의 요청에 반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요청에 반응하는 선교적 삶에 헌신한 이후에 선교사로 헌신하게 됩니다. 무엇이 우선이냐를 파악해야합니다.

 

선교사로 가는 것은 몇몇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선교적 삶을 사는 것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선교사로 헌신하여 내 인생을 다른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드리는 것은 너무나 소중하고 귀중한 일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선교사로 헌신하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선교적 삶에 헌신하지 않고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긴 여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로 선교에 참여 할 수 있습니다. 평생선교사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특정한 기간 동안 선교사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한번 특정한 기간 동안 선교사로 갔다 왔다고 해서 평생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사역이 끝나면 다시 직장인으로, 주부로 살아가게 됩니다.

 

또 내 인생에 특정 기간에는 국내에서 외국인들의 복음화를 섬길 수도 있습니다. 선교사라는 명칭은 그 역할이 주어질 동안만 사용하는 명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교는 그냥 텀으로 끝나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교적 삶은 하나님이 자신을 왜, 여기에, 지금 보내셨는지, 하나님이 나와 나의 인생과 나의 자산을 통해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묻는 삶의 자세입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습니다.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끼리는 나눔도 봉사도 가능한데, 정작 이웃이나 동네 사람들과는 별 교류가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교적 삶은 직장, 마을, 동네, 도시, 카페, 도서관, 학교 등 어느 곳에서든 선교적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선교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로 전하고 교회에 초청하는 전도 행위를 넘어서 그곳에서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고 바로 세우시고 위로하시고 중재하시기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과 교류하고, 그 이웃의 필요와 아픔에 민감해집니다.

 

선교적 삶이란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전 영역, 특히 자신의 주된 일(직업)을 행함에 있어서, 직업이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도구가 되고, 선교를 목표로 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남미, 아프리카, 중동 등과 같은 곳으로만 선교지로 볼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그 현장을 선교지로 삼고, 선교사적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바로 선교적 삶이라 말합니다.

 

선교적 교회선교적 삶을 사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참여적 의사결정 구조도 가능해지고 교회의 선교적 사역의 자발적 실행이 가능해집니다. 바라카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주간 중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도 주된 목적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선교적 교회가 되고 성도들이 선교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데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선교의 영성이 회복되길 축복합니다. 선교의 영성이 회복되면 선교적 삶을 살게 되고 선교적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면 자연스럽게 선교적 교회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선교를 위해 헌신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쉰들러리스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쉰들러가 마지막 돈을 다 털어 유태인을 구출하여 기차를 태워 떠나보낸 후 그는 선로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심코 자기의 손가락에 끼어진 금반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소리칩니다.

 

내가 이것을 왜 끼고 있지? 이 금반지를 팔았더라면 한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을 내가 왜 끼고 있지?하며 앉아서 통곡을 합니다. 이제 우리는 곧 주님 앞에서 우리의 일생을 결산하게 될 겁니다. 그 날에 주님께 드릴 가장 큰 열매는 내가 구원한 영혼들뿐입니다. 5달란트, 2달란트 맡은 종처럼 자신 있게 영혼의 열매를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이 선교의 영성이 회복되어 선교적 삶을 살고, 선교적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