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브온의 전술전략(수 9:1-7) 목사 주 바나바
주 바나바
손자병법 제 1편 시계 란에 보면 ‘병법은 기만전술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능력이 없는 것처럼, 혹은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가까운 곳을 노리면서도 먼 곳을 지향하는 것처럼, 먼 곳을 노리면서도 가까운 곳을 지향하는 것처럼 한다. … 이러한 기만술은 병법가의 승리하는 비결이며, 따라서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서는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철저한 기만전술로 시작 되어 성공한 작전입니다. 연합군은 프랑스 북구 노르망디에 병력을 이동시키기로 결정하고, 이를 오버로드작전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을 속일 수 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 이를 포티튜드작전이라 불렀습니다.
북포티튜드는 노르웨이 침공 협박용으로, 남포티튜드는 독일군으로 하여금 연합군이 노르망디 보다 프랑스의 파드칼레에 상륙할 것이라고 믿게 하기 위한 속임수였습니다. 북포티튜드 작전에서 연합군은 가상의 부대인 영국 4군의 존재를 흘리기 위해 가짜 무선을 치고, 존재 하지도 않은 부대의 이동에 대해 보고합니다.
또한 영국 외교관들은 중립국인 스웨덴과 노르웨이 침공에 따른 이익과 양보에 대해 교섭을 시작했는데, 스웨덴에서의 비행 정찰 임무 권리와 불시착한 비행기를 급유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서도 논의 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독일군의 귀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가짜 교섭이었습니다.
남포티튜드 작전은 독일군이 모든 걸 파드칼레에 집중 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습니다. 파드칼레는 영국에서 가까운 곳이었기에 전략적으로도 합당해 보였습니다. 그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독일군은 노르망디 방어 병력을 줄이는 대신 파드칼레 부근에 병력을 집중적으로 배치했습니다.
남포티튜드의 키포인트는 퀵실버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실제로 노르망디를 침공할 몽고메리의 21군단과 실제로는 침공하지 않을 유령부대인 미군 1군단으로 이뤄진 연합군 병력이 파드칼레로 건너가기 위해 잉글랜드 남동쪽에 집결해 있다는 허위 사실을 독일군이 믿게끔 한 작전이었습니다.
이처럼 실제 작전에 기만작전을 씌우고 그 위에 다시 기만전술을 덧입혀 독일군을 속였기에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기만전술전략의 결과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습니다. 사탄의 기만전술전략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여리고성과 이이성을 함락 시킨 후의 기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출애굽하여 광야의 생활을 마치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비록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가나안 땅에 먼저 살고 있는 7족속을 몰아내야 하는 전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우여곡절 끝에 아이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렇게 여리고와 아이가 정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힘을 모아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기브온 주민들은 도저히 이스라엘은 당해낼 수 없다는 냉철한 현실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기브온 주민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스라엘과 화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더불어 화친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음을 기브온 주민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생명부지를 위해 매우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로 기만전술전략입니다.
기브온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꾀를 냈습니다. 그 꾀는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되 여호수아 앞에 갈 때 자기들이 아주 먼 곳에서 사는 사람인 것처럼 꾸미기 위하여 헤어진 전대와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실고,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 찾아갑니다.
우리는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인데 당신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의 생활과 여리고와 아이 성을 함락한 소문을 들으면서 우리나라의 장로들과 백성들이 당신의 나라와 화친하기를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신과 옷이 낡아지고 빵에 곰팡이가 날 정도라면 최소한 그 여행은 몇 달 이상이 걸렸다는 증거가 됩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들과 그 신들과는 어떠한 약조도 맺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의 기만전술전략에 속고 맙니다. 기브온 밀사들의 행색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들의 말의 전후관계를 주의 깊게 연결시켜 보았다면 그들의 거짓을 간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기브온의 속임수에 걸려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기브온과 더불어 동맹 조약을 맺습니다. 조약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기브온을 침공하지 않겠다는 내용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일방적 요구에 따라 여호수아가 그 요구를 받아들여 협정을 맺게 된 것은 아마도 기브온의 복종적 태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당신들의 종들이니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이러한 기브온 족속의 위장된 감언이설에 속아 동맹을 수락합니다. 조약체결 후 삼일 후에 기브온의 실체가 들어났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조약이기에 그들의 기만전술을 알면서도 취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기브온 주민들은 가까스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거짓말에 대한 책임은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기브온 주민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에 그들을 이스라엘의 영원한 종으로 삼았습니다. 결국 기브온 사람들은 평생토록 성소의 제사용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일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영적교훈을 얻게 됩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마귀의 기만전술전략에 속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귀의 전술전략을 이기는 용병술을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도들이 마귀의 전술전략을 이기는 용병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용병술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16)
이런 민화가 있습니다. 사냥군에게 쫓기던 뱀이 농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농부는 뱀에게 자기 뱃속에 들어가 숨어있으라고 말했습니다. 뱀이 위기를 넘기자 농부가 뱀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말했더니, 뱀은 따뜻하니 나가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농부는 집에 돌아가다가 왜가리를 보고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가리는 농부에게 뱀이 밖으로 나오도록 몸을 꼿꼿이 펴고 쭈그리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뱀이 목구멍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왜가리는 얼른 뱀을 물어 밖으로 끌어내어 죽여 버렸습니다. 농부가 몸 안에 뱀독이 남아 있을까봐 걱정이 된다고 하자 왜가리는 흰새 여섯 마리를 삶아 먹으면 해독이 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네가 흰새이니 너부터 먹어야 되겠다고 하면서 왜가리를 잡아 자루에 넣어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갔을 때 농부의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어떻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즉시 왜가리를 자루에서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왜가리는 나오자마자 그 아내의 두 눈을 파먹고 날아갔습니다. 아프리카 민담인 이 이야기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과 친구가 적이 되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배신을 일삼는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세상에는 억지 논리도 통하고 권모술수가 팽배합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정말 이리떼들이 우글거리는 정글이나 광야 같은 곳이 세상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이런 세상에 보내시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양이 이리 가운데 살아남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것입니다. 지혜와 순결의 영적용병술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지혜의 용병술을 지녀야합니다.
우리는 ‘뱀’하면 언뜻 사탄을 떠올립니다. 그렇습니다. 뱀은 사탄을 지칭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9절에 이르기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3장1절에서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간교하다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도록 뱀이 간교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하필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사탄처럼 지혜로우란 말씀입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탄의 교활한 지혜를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격언처럼 쓰이던 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을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저희는 내게 대해서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나 이교도를 대해서는 뱀 같이 지혜롭다.” 택한 백성들이 이교도들보다 지혜에 있어서 월등함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지혜로 속임을 베푸는 뱀을 하늘의 지혜로 이겨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단은 속이는 자입니다. 간교하다는 것은 속이는 지혜입니다.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남을 교묘하게 속이는 것입니다. 그 속임수는 처음에 달콤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패망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거기에 넘어갔고 지금도 그 유혹에 빠집니다. 그리스도인의 뱀 같은 지혜는 결코 이런 모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악한 뱀을 이겨야 합니다. 바로왕 앞에서 모세와 아론이 행한 표적은 지팡이를 던져서 그 지팡이가 뱀이 되고 그것을 다시 취했을 때 지팡이의 원형을 찾은 사건입니다.
비록 바로 앞에서 행한 표적을 이집트 마술사들도 따라했지만 마침내 모세의 뱀이 그들의 뱀을 삼켜 버렸습니다. 사탄을 능가하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뱀 같은 악한 지혜를 능가해야 합니다. 야고보가 강조하는 하늘의 지혜입니다. 야고보서 3장 17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성도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의 영적용병술을 가져야합니다.
둘째로, 순결의 용병술입니다.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결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타밈(תמים)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성전의 제물들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첫 번째 조건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짐승들은 세 종류로 분류됩니다. 천하 만민들을 위해 배정된 동물들이 첫 번째 그룹이고, 두 번째 그룹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정한 동물들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는 제사 동물들이 그것입니다.
제사 동물에는 소와 양, 염소가 있으며 날아다니는 것들 가운데는 유일하게 비둘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비둘기는 정한 동물이면서 그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정한 동물로서 정결하다는 표현이 바로 본문에서는 ‘순결’이라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순결, 즉 흠이 없다’는 의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짐승은 역시 비둘기입니다. 왜냐하면 고대 히브리 민족이 생각하던 비둘기에 대한 상징적 의미와 잘 부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옛날부터 비둘기를 많이 기르던 지역입니다.
비둘기를 가지고 번제를 드리는 관습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비둘기를 키우면서 비들기 세계에 대하여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시간들은 충분했습니다. 그들이 비둘기를 관찰하면서 느낀 것은 비둘기의 ‘정절’입니다. 왜냐하면 암컷 비둘기는 한 번 짝을 맺으면 그 짝과 영원히 함께합니다.
만약 자신의 짝이 죽으면 재혼하지 않고 자신의 짝에 대한 정절을 지키며 사는 모습을 보고, 비둘기는 정절을 상징하는 동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둘기를 ‘순결’이라는 단어로 표현 했습니다. 또한 비둘기는 정절을 상징하는 짐승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은 여인이 드리는 제물이 되었습니다.
비들기로 제물을 드리면서 부인들은 남편에 대하여 이런 뜻을 가졌습니다. “내가 낳은 이 아이가 당신의 아이가 맞으며, 나는 한순간도 당신에게서 눈을 돌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비둘기처럼 나는 영원히 당신을 바라보는 데서 눈을 돌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의 정절을 다짐하며 서약하는 의미에서의 제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히브리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은 비둘기의 이미지는 상대에 대한 정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가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 가운데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많은 유혹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오직 예수님’께만 초점이 맞춰져서 정절을 유지하므로 흠이 없도록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과 부탁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오는 승리입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께 집중하고 예수님중심의 삶을 사는 자세입니다. 이리와 늑대 떼가 진을 치고 있는 전투장으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마귀에게 속지 않고 승리하는 길은 순결의 영적용별술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의 영적용병술은 지혜와 순결입니다. 지혜와 순결은 성도들의 창과 방패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뱀 같은 지혜가 창(槍)이라면 비둘기 같은 순결이 방패요, 비둘기 같은 순결이 창(槍)이라면 뱀 같은 지혜는 방패입니다. 만약에 지혜로움이 순결함을 상실한다면 교활하게 됩니다.
반대로 순결에 지혜로움이 없으면 어리석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삶은 뱀같이 지혜로우면서 비둘기 같이 순결함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합니다. 지혜와 순결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지혜 없는 순결은 무능력함이요 순결 없는 지혜는 사악함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이길 성도는 이 악한 세상에서 ‘지혜와 순결’이 항상 동행해야합니다. 지혜는 판단력이나 결단력 그리고 추진력에서 나타납니다. 순결은 인격과 도덕성 그리고 가치관에서 드러납니다. ‘지혜와 순결’은 반드시 겸비돼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성도들의 영적용병술입니다.
영적기만전술과 전략으로 악한 마귀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고수하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성경은 이렇게 축복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1서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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