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 강의록(1) : 교수 - 주태근
서 문
오늘날 강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교신학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비록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강단이 새로운 도전을 맞이한다 해도, 설교신학의 관심은 여전히 동일하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설교의 역할과 위치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변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 사이에 있는 현저한 거리감을 줄일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설교신학은 설교를 통하여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루며 이런 이유로 설교를 통하여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설교신학은 공적인 영역을 다루는 설교까지를 포함하여 설교를 강하게 만든다. 신학에 기초를 둔 설교는 공적인 기능을 한다. 설교는 공적인 문제들에 대해 권위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하는 주된 신학적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라이셔(Richard Lischer)가 주장한 것처럼, 현대 설교학은 전반적으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차원에서 설교자가 자신의 신학을 구체화해야 하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존 캅(John B. Cobb Jr.)은 믿음을 구하며 이해하는(Faith-Seeking-Understanding) 진지한 행위로서의 신학이 많은 교회들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슬퍼한다. 그의 지적에 의하면, 설교가 주로 인기 있는 심리학과 상식에 근거함으로 그것들을 재확인하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마련될 뿐, 복잡한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도록 격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학적 사고가 무시된 시대에서 우리의 설교는 주로 목회적 돌봄, 교육, 훈련 또는 상담과 같은 개인적 이상주의나 실리주의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설교의 주된 사명은 목회적 돌봄이나 성서적 교훈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버트릭(David Buttrick)은 다음과 같이 오늘의 설교자들이 다시 한 번 신학에로 돌아가서 신학적으로 생각할 것을 요청한다. “설교는 단순히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의미를 부여하는 사역이며 진정 강단의 사명은 우리가 사는 혼돈된 세상에서 사는 성도들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이 시대를 분별하도록 도와야 한다. 신학은 신앙을 현대 언어로 그리고 현대의 사고 구조 안에서 설명한다. 만일 설교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해석해야 한다면, 그 때는 설교가 사건들과 문제들에 대해 신학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버트릭의 주장처럼, 이 시대는 우리의 설교가 신학에 근거하고 신학적인 생각을 진지하게 취급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설교에서 사회적인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 설교가 분명한 목적과 초점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혼란되고 불확실한 강단은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을 상실하게 된다.
제 1 부 설교의 이론
Ⅰ. 설교 용어의 이해
신약에서 설교를 지칭하는 데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는 ‘케뤼세인’으로서 “선포하다” 혹은 “전하다”라고 번역이 되는데, 여러 가지 어형변화를 통하여 50번 이상이나 나타나고 있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 설교는 보통 “설교하다(preach)” 혹은 “설교(preaching)” 혹은 “선포되어진 설교(preached)”등으로 번역이 되어 진다. 그것은 설교자가 다른 이로부터 권위적 메시지를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약 전체를 통해서 설교라는 특수한 단어가 항상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설교하는 것”을 나타내는 다른 많은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그런 단어는 네 가지로서 ‘디다스케인’,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다.”, ‘디알레게스다이’, “설득할 목적으로 토론하고 권유하다.”, ‘랄레인’, “말하고 토론하다” 그리고 ‘파라칼레인’, “충고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영어의 ‘Sermon’은 라틴어의 ‘sermo’에서 나온 말로서 본래는 담화나 연설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근대적인 의미로는 교회에서 예배의 중심으로서의 설교형식을 갖춘 연설로 이해되었다. 이때 ‘Sermon’은 넓은 뜻으로서 설교를 말할 때 쓰여 진다. 그러나 ‘Preaching’은 설교하는 행위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것은 곧 헬라어의에 해당하는 말의 번역으로서 말씀의 선포 또는 복음내용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preach’란 말 자체는 라틴어의 ‘praedico’에서나온 말로서 “선포하다, 찬미하다, 예언하다”의 뜻을 가진 말이며, 이는 또한 헬라어의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예언을 말하거나 신적 계시인 말씀을 선포하는 의미를 가진 뜻이다.
2. 설교의 본질
블랙우드(Andrew W. Blackwood)는 “설교라는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어떤 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선정된 인물이 거룩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라 하였고 “택함 받은 설교자가 당대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통하여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진리를 선포하고(Proclamation), 해석하고(Exegesis), 이 진리를 회중들의 삶에 적용시키는(Application)것으로, 이것은 반드시 성령의 감화하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정의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설교의 정의를 따른다면, 진정 올바르고 건전한 설교를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첫째, 나는 택함 받은 설교자로서 충실한가? 둘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진리를 바르게 선포하고, 정확하게 해석하고 효율적으로 적용시키고 있는 가? 셋째, 나의 전달방법과 기술이 오늘의 시대와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 넷째, 성령이 감화하시는 역사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가? 이와 같이 제기된 물음에 대해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설교 없이는 구원 없다.”는 칼빈(Calvin)이나, “설교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 강조한 칼 바르트(K. Barth)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아니 하더라도, 설교의 중요성은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신약성서는 설교의 본질을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단어들 가운데 “설교”를 지칭하는 말로서 가장 중요한 세 개의 단어는 ‘didache(디다케)’, ‘euangellion(유앙겔리온)’, 그리고 ‘kerugma(케리그마)’이다. 신약성경에는 때때로 “설교”의 의미로 쓰여 진 세 가지의 다른 용어들이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첫째, ‘propheteuw’ 로서 “예언하다”의 뜻을 가지며 고전 11:4 과 13:9 에서 사용되었다. 둘째, ‘parakalew’ 로서 “간청하다”혹은 “위로하다”뜻을 가지며 딤후 4:2; 히 13:22; 살전 4:1 등에서 사용되었다. 셋째, ‘marturew’ 는 행 4:33과 10:39 에서 “증거하다”혹은“입증하다”등으로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 설교의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 가운데 가장 빈번히 사용된 단어는 ‘kerussw’이다. 일반적으로 ‘kerussw’ 는 “설교하다,” “선포하다,” 또는 “선언하다”등으로 번역되었다. 명사형 ‘kerugma’ 는 선포의 행위를 지적함과 동시에 선포되는 메시지의 내용을 의미한다. 여기서 ‘케리그마적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핵심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케리그마적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로부터 회개함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0:13에서 복음의 선포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21에서는 십자가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밝히고 있다.
토마스롱(Tomas Long)은 『설교의 증언자』라는 그의 저서에서 설교에 대한 직접적인 정의를 내리지 않고, 설교자가 누구냐? 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거기에 대한 대답을 줌으로 설교가 무엇인가를 간접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즉 설교자를 복음 ‘전파하는 자(Herald)’, ‘목사(Pastor)’, ‘이야기하는 자(Storyteller)’ 또는 ‘자기의 견해인’, ‘증언자(Witness)’로 말하면서, 설교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설교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그 개념을 정의하는 자가 어떤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칼 바르트는 본대학교에서 행한 설교학 세미나에서 설교에 대한 이해의 변천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중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홀라츠(David Hollaz, 1648-1713)는 목사의 정당한 직무집행에 대해 다음의 두 가지를 강조한다. 교회의 목사는 적합한 해석방법을 통해 하나님 말씀의 참된 의미를 정확하게 연구함으로 그 말씀을 확실하게 해석하고 상세하게 설명함으로 그 밝혀진 말씀을 교훈과 책망과 교육과 교화 그리고 위로의 목적에 적절하게 적용함으로 가르침의 직무를 정당히 수행한다. 여기서 홀라츠는 경건주의와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하나님 말씀의 참된 의미를 교리에 맞춘 방식으로 이끌어 내어 설명하고 그렇게 설명된 말씀을 회중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설교자의 과제로 제시한다.
2) 쉴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의 설교이해는 설교행위 그 자체보다는 설교자가 갖는 자의식, 즉 설교 중에는 자신이 회중의 위임을 받아서 회중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으로부터 출현했다는 자의식 그리고 설교가 끝난 후에는 회중의 한사람으로 돌아간다는 자의식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설교자는 모든 보편적인 감정으로부터 나오며 신앙의 현실과 비밀에 관해 감정의 주관적 요소와 직관의 객관적 요소의 하나 됨에 대해 이야기 한다.
3) 튀빙겐 대학의 교수이던 퍌머(Christian Palmer, 1811-1875)는 설교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나타났고,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구원을 생생한 증언을 통해 받아들이도록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팔머의 주장에서는 특히 설교라고 하는 것은 생생한 증언 즉 생생한 인격을 말로 표현함을 통해 발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인격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구원 역시 인격-개인의 인격이 아닌 영적 성령적 인격을 내용으로 하는 회중의 대표자이라는 매개를 통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니츠(Karl Nitzsch, 1787-1868)는 좀 더 명료하게 설교를 정의한다. 설교란 주님의 회중을 교화시키기 위한 복음의 지속적인 선포이며 성서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 말씀의 선포인바, 이 선포는 부름 받은 증언자를 통해 현재 상황과의 생생한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설교는 언제나 교회 안과 밖을 향하는 것으로 설교자가 가급적 청중과 동질의식 속에서 설교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는데 설교의 목표가 주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설교학 강의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교개혁기의 설교/설교의 황금기-교수 주태근 (0) | 2022.07.27 |
---|---|
설교의 암흑기-교수 주태근 (0) | 2022.07.25 |
설교의 역사-교수 주태근 (0) | 2022.07.23 |
설교의 다양성(2)-교수 주태근 (0) | 2022.07.22 |
설교신학의 기초 / 설교의 다양성-교수 주태근 (0) | 2022.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