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을 이룹시다(행28:30-31)
한 남자가 아들과 함께 동네 놀이터로 나아갔습니다. 놀이터는 너무나 누추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 때 그 남자는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좀 더 근사한 놀이터를 마음속에 그렸습니다. 과학과 자연이 어우러진 환상의 놀이터를 그렸습니다. 결국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남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30만평 규모의 오렌지 숲을 매입했고, 그곳에 ‘디즈니랜드’를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디즈니랜드로 만족하지 않고, 좀 더 넓은 곳, 자연친화적이며 좀 더 첨단과학적인 요소가 담겨진 아름다운 곳을 만들 수 없을까? 생각하면서 디즈니랜드보다 열배나 더 큰 ‘디즈니 월드’건설을 꿈꿉니다. 그리고 플로리다의 올란도의 한 부지를 구입합니다. ‘디즈니 월드’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쉽게도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월드’가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 테마파크인 미국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는 월트 디즈니 사후 5년 만인 1971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개장식에서 한 직원이 미망인 릴리 디즈니 여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디즈니 씨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그 때 디즈니 여사는 대답합니다. “그는 이 모습을 벌써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디즈니랜드가 건립된 것이지요.”월트 디즈니 그는 죽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이미 디즈니월드가 하나의 그림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아름다운 공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월드를 구상하던 그 순간부터 이미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미래를 앞서서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월트 디즈니는 몽상가였습니다. 그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시야를 항상 '미래'에 두었습니다. 월트 디즈니의 형 로이는 동생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합니다. "동생이 죽기 전날 밤 병실을 찾아갔더니, 그는 최악의 상태에서도 평생 그랬던 것처럼 온통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전은 미래를 창조합니다. 미래를 희망으로 만들어 갑니다. 역사는 한 마디로 꿈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많은 교훈을 받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꿈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를 이끌어 갔고, 어떻게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는가를 기술한 것이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우리나라에는 ‘꿈이 없는 사람들만 사는 곳’과 ‘꿈이 있는 사람들만 사는 곳’이 있다고 말합니다. 꿈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의 주소는 이렇습니다. '살기도 어렵군 죽으면 편하리 44번지' 반면에 꿈이 있는 사람들만 사는 곳의 주소입니다. '은혜도 풍성하군 믿으면 행복하리 77번지' 여러분은 어느 곳에 살고 싶습니까? 꿈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를 바랍니다. 세계 인류 중에 가장 많이 읽는다는 성경 역시 많은 부분이 꿈의 이야기로 연속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꿈을 꾸고 비전을 가진 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어 나가는 내용입니다. 현대적인 용어로 그런 꿈과 환상을 ‘비전’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노아를 비롯해서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이삭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다니엘이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성경에 나오는 성공적인 인물들을 보면 한결 같이 비전의 사람들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꿈을 꾸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전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의 주인공 사도바울은 나름대로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유대교의 걸림돌이 되는 기독교를 지구상에서 쓸어내고, 자기가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그런 꿈입니다. 젊은이로서 아니 종교인으로서 엄청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꾼 꿈은 허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가 핍박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 순간 그의 지난 날의 꿈은 완전히 깨어져 버리고, 새로운 비전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꿈의 사람이 아닌 비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난날 꾸었던 그의 꿈은 자신의 꿈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선택하신 목적을 발견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선지자 아니니아는 바울에게 이렇게 예언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180도로 인생이 전환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남으로 비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전이 삶을 승리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았을 때, 그가 죽은 줄 알고 내다 버릴 정도로 온갖 고난을 다 겪으면서까지, 1차, 2차, 3차 선교 여정을 승리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비전 때문입니다.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는 바울이 이미 이룬 3차 선교 중에 단 한 차례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일이었을 것 같이 판단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바울의 비전은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길을 찾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음을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이렇게 바울은 로마로 갈 수 있는 길을 계속해서 찾았으나 아직까지도 막혔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바울이 굳이 로마 선교가 아닐지라도 지금까지 수고한 것만으로도 온 교회와 성도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사도바울이 로마 선교를 포기했더라면 불필요한 고난을 겪지 않고 얼마든지 노후를 대접받으면서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행복은 달랐습니다. 세상에서의 부요함이나 평안함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에게 준 비전을 위해 사는 것이 제일 큰 행복임을 깨달았습니다. 온 세상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임을 알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일을 위해 온갖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다 바칠 수 있었습니다. 비전을 품고 비전을 위해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지치지 않는 열정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의 나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으시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비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변명할 것입니다.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 이제 무슨 비전과 꿈이 있겠느냐? 아니면 나 같이 무식한 것이, 못생긴 것이, 무능한 것이, 성격 고약한 것이, 죄 많은 것이 무슨 비전이 있겠느냐? 핑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들에게 역설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성경에 나타난 비전의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의롭고 선한 사람들만, 또한 젊고 힘 있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살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고,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고, 요나는 어떤 사람이었고, 다윗과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고, 바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같이 우리와 크게 다른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달리 평생 하나님의 주신 비전을 위해 살았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에 대한 비전을 본격적으로 품게 된 것은 1차, 2차, 3차 선교를 다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였습니다. 로마서에서 그는 말합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여기서 ‘보아야 하리라’는 말은 현재 계속해서 열망하였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열정입니다. 마음에 열망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고난과 생명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남달리 인내심이 많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을 때면 주님이 아시고 그 때마다 위로와 용기로 비전을 더욱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옥중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유라굴로 광풍중에 배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도록 비전을 바로 세우는 주님의 격려의 말씀입니다.
비전을 가로 막는 상황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바울에게 배워야 할 점은 아무리 현실이 견디기 어려워도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좌절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사도행전 본문 역시 그렇게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27:25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렇습니다. 로마를 향한 사도 바울의 비전을 유대 종교집단의 음해도, 지중해의 광풍도, 밀레도 섬의 독사도, 사단의 그 어떤 궤계도 막지 못했습니다. 비전 때문이며 비전을 이끄는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렇게도 간절히 소원했던 로마에 마침내 도착하였습니다. 얼마나 감회가 컸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때로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비록 더딘 것 같아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에 이렇게 도착하였다고 해서 바울의 처지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소원했던 로마에 도착하였지만 바울의 처지는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로마에 도착한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유와 해방의 기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행28:16입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여기서 ‘지키는’ 이란 일거수일투족을 계속적으로 감시하는 연금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죄수 상태를 면치 못한 바울의 형편을 말합니다. 바로 재판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황제 앞에 설 때 까지 연금 상태로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허탈해 하거나 자신의 그와 같은 처지를 조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비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 로마에 도착했을 뿐이지 그는 로마에서의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땅에서의 복음전파의 비전입니다. 로마에서의 세계 선교를 위한 복음의 전파입니다. 바울이 로마를 꿈꾼 것은 자신의 출세나 성공이 아니라 로마에 사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만드는 복음 전파입니다. 롬1:15에서 이르기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첫 번째 대상을 동족 유대지도자들로 목표를 삼고, 그들을 자기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초청하는 일을 로마에 도착한지 사흘 만에 즉각 실행에 옮겼습니다. 행28:17입니다.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당시 로마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 일곱 개 정도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자유의 몸이었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 회당들을 순회하는 일을 제일 먼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수의 몸으로 연금 상태였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을 자기가 있는 곳으로 초청하여 자기가 왜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까지 오게 되었는지 경위를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행28:19-20입니다.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이러한 바울의 변명에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날짜를 정하여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소상하게 듣기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의 몸으로 그들을 향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이렇게 로마에서 혼신을 다한 바울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반응은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기로 결심을 한 사람과 끝까지 믿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과 충격도 대단히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마음 문을 열지 않는 다고, 자기 사역을 실패라고 보거나 낙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른 방편인 오히려 이방인의 마음 문을 열어 믿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이방인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울에게 처음부터 주신 비전이며, 이를 위해 바울을 로마에까지 오도록 섭리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의 2년 동안의 연금 상태에서 오히려 자유롭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곳에서 옥중서신을 집필하여 교회들을 더욱 건강하게 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이곳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는 순간까지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결국 로마 교회가 땅 끝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비전이 이루어집니다. 땅 끝을 향한 선교는 계속되어졌습니다. 복음이 세계로 뻗어나가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은 너무나 위대합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나 그의 꿈은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비전이 그를 이끌어 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복음으로 구원 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니 바울의 비전은 오늘날 우리들의 비전이기도 합니다. 열방과 민족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오늘도 부르짖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있음을 발견해야합니다. 새로운 인생설계입니다. 새로운 인생설계는 비전을 말합니다. 신앙인은 비전으로 인생을 삽니다. 바울은 자신의 꿈을 접고 하나님의 비전으로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여 새로운 인생의 승리와 영광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을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나름대로 있습니다. 비전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비전이 이끄는 삶을 사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에게 비전을 주셔서 그 비전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비전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반드시 비전을 성취시킵니다. 비전으로 살기 원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합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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