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설교

교회의 거룩성(행5:1-11)

주 바나바 2022. 7. 29. 14:30

교회의 거룩성(5:1-11)

 

 

목사 주태근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1878-1938) 선생이 미국에서 대한인 국민회(Korea National Assembly) 중앙총회장으로 있을 때의 일화입니다. 총회장으로 여러 지방을 순회하던 중, 기차를 타려고 정거장에 나왔을 때, 한 간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 여행에 경비가 모자라 여기 어떤 목사님의 신분증을 빌려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목사 행세를 하시면 철도운임을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에 목사님에 대해서 많은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안창호 선생은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사용하다가 들키면 나의 신용도 떨어지고 또 목사님의 신용도 떨어질 것이니 그럴 수 없는 일이오. 경비가 모자라면 다시 돌아가 며칠 있으면서 돈을 조금 더 장만해가지고 그 때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안창호 선생은 자신과 목사님의 신용도 신용이거니와 특별히 대한민국 사람의 신용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거짓에 눈을 감으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익이 많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익도 거짓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갖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민족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우리 민족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장난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꿈에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바른 정신과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기독변증가인 제임스 패커는 말합니다. “거룩함은 영성과 도덕성이란 두개의 기둥에 놓인 아치와 같아서 두 기둥 중 어느 하나가 가라앉으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는 거룩에는 영성도덕성의 두개의 기둥이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성이라는 주제 아래 많은 이들과 교회들이 여기에 매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성 운동들이 쏟아져 나오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제임스 패커는 그토록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영성이란 바로 거룩한 삶이 없으면 빈 수레와처럼 요란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임스 패커는 도덕성이 결여되면 영성은 무너지고, 마찬가지로 영성이 결여되면 도덕성마저 무너진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도덕성과 영성은 거룩함을 이루는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기도와 금식 등 나름대로 힘쓰는 영성은 추구하지만 생활 속에 도덕성이 결여 된 그런 영성이라면 바른 영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교회는 4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단일성(Unity)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오직 하나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하나님이 하나이심과 같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교회의 단일성은 교회에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자 사명입니다.

 

둘째는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입니다. 교회는 지역 교회이나 전체 교회의 표시입니다. 이것은 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그리고 같은 복음과 성례, 같은 신앙에 의하여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주적이며 보편적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보편성의 의미입니다.

 

셋째는 교회의 사도성입니다. 교회의 사도성은 교회가 교회되는 영적인 척도와 신앙의 표준을 말합니다. 전파되는 복음의 내용과 증거의 사명은 사도적 계승으로 계속됩니다. 이것을 정통교회라고 말합니다. 사도적 계승은 주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며 따르는 신앙의 계승이며 사명의 계승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도성입니다.

 

넷째는 교회의 거룩성(the Holy Church)입니다. 거룩성은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고,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는 지금까지 지은 죄를 용서 받은 거룩한 공동체인 동시에, 죄성을 가진 죄인들의 공동체임을 자각하고 죄와 악에 대항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회의에서 결정한 니케아 신조(381)에서 참된 교회는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됨은 거룩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믿음은 죄에서 구원 받기 위함입니다. 죄에서 구원 받음은 바로 거룩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생활을 소홀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주인공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부부였습니다. “아나니아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삽비라의 뜻은 아름다움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보석 사파이어가 삽비라에서 나왔습니다. 이름 그대로 이 부부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부부였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멤버로서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바칠 만큼 헌신된 부부들입니다. 사도행전 4장 후반부를 보면, 교회의 유무상통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밭과 집을 팔아 교회에 바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성도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어질 정도로 엄청난 효과가 나타냈습니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 436절 이하를 보십시오. 바나바는 밭을 팔아 교회에 바쳤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재산인지 알 길이 없지만 이름을 소개한 것으로 볼 때 대단한 재력가였을 것입니다. 이런 물결에 하나의 흐름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동참합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성전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세 시간 시간차를 두고 부부가 저주를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찬물을 끼 얻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회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에 3천명, 5천명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은 산헤드린공회의 위협과 협박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자기 재산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무상통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5장에 와서 그토록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던 초대교회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일어납니다. 교회의 큰 시험입니다. 외적으로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부흥했던 초대교회 공동체가 내부의 문제로 인해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외적 시험보다 내적시험이 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시험이 올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입니다. 여러 사람의 말에 흔들리거나 이해관계에 치우쳐서 분별력을 잃어버리면 올바른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주목합시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임을 당할 만큼 그렇게 큰 죄를 지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모든 사람이 재산을 팔아 하나님께 드린 것도 아닙니다. 조금 감추었다 해도 그것이 부부가 모두 죽을 만큼 큰 죄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깁니다. 만약 이 잣대를 오늘 우리에게 들이댄다면 여기에 살아있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깊이 담겨있습니다.

 

일벌백계(一罰百戒) 하심으로 초대교회 공동체를 지키시기 위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당사자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억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거룩한 공동체, 성결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재산을 바쳤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시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속이는 자, 성령을 속이는 자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경고를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통해 교회의 거룩함과 순수함을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최선의 선택이십니다. 교회는 거룩해야합니다. 거룩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거룩성을 잃어버렸습니까? 먼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정복 때에 일어난 아간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을 건너 여리고 성을 점령하였을 때에 사탄은 아간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진격을 방해했습니다.

 

아간은 하나님께 드려진 물질을 훔쳐서 몰래 숨겨놓고 자기의 것을 삼으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탄이 배후에서 역사했다는 말입니다. 아간이 사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고 말했습니다. 사탄과 같은 성향을 가진 아간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왜 마귀의 도구가 됩니까?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스승을 배반한 제자 가룟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32절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귀가 벌서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마귀는 마귀의 성향을 가진 자를 자기 밥으로 삼게 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초대 교회가 복음으로 부흥할 때에도 사단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서 교회를 오염시키려고 계획했습니다. 참된 회개가 없기에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마귀의 성향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방향전환입니다. 과거는 과거라도 다시 그 옛길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된 것 중에 일부를 숨겨서 자기의 것을 삼으려고 하다가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 때만 넘어가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아니 이번만은 괜찮겠지 등 이런 과거의 나쁜 습관과 죄성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성을 무시한 이 두 부부는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 두 사건은 모두 다 교회에 악영향을 주었지만, 성령의 역사로 인해 해결되었습니다. 교회의 거룩성이 유지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교회를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의 중앙으로 들어가 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아나니아는 그의 아내인 삽비라와 의논하고 자기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그들은 그 중에 판 것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만을 사도들에게 갖다 주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의 재산 모두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성경에 교훈한대로 일단 하나님께 서원을 한 경우 그의 재산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 되어서 자기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 때부터 작정한 일은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재산을 팔고 난 후에 마음이 변했으며, 모두 드리기가 아까워서 일부를 숨기고 나머지만을 가지고 다 가지고 온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는 그것이 자기의 모든 재산인 것처럼 사도들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솔직히 그는 자기의 재산을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지 않았어도 아무런 죄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관용보다는 물질을 드림으로 얻게 될 명예와 교회의 인정을 바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솔직히 그가 재산을 판 후에 일부 재산을 남기고 베드로에게 와서 이러저러해서 일부만을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말했다면 그가 징계를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부를 숨겨놓고도 모든 것을 드리는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아마도 그의 양심은 계속해서 그에게 정죄와 책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양심을 통해 들리는 성령의 음성을 거역하고, 끝까지 거짓말로 모든 것을 드리는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사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때에 성령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아나니아의 위선과 그 배후에서 사단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두는 경우 마치 아간 사건과 같이 교회에 큰 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아간이 물건에 손을 댄 것을 가르쳐 주신 것처럼, 베드로에게도 아나니아의 위선과 그 배후에 활동하는 사단의 움직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 사실 그는 재산을 팔아 교회에 드리지 않아도 아무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명예심으로 땅을 팔아 모두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후에, 일부를 숨겼다는 사실이 성령의 역사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과 같았습니다. 더구나 그는 일부만을 가지고 와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또 다시 속였습니다. 그들 부부는 양심을 통해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끝내 거부하고 위선으로 행동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그의 행위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었다고 책망했습니다.

 

아나니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아간을 죽여서 부정을 없애셨던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 초대 교회를 위선과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도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 후에 젊은 사람들이 아나니아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서 장사했습니다. 또한 약 세 시간쯤 지나서 그 아내인 삽비라가 다시 성전에 왔습니다. 그녀는 아직 자기 남편이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또 다시 그녀에게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은 그녀가 솔직하게 자백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전부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남편과 함께 거짓을 말하기로 미리 입을 맞추었음을 보여집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베드로는 그녀의 거짓말을 성령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거짓말을 성령이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해 보려는 사람처럼 천덕스럽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그러자 그녀 역시 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그녀의 남편을 장사하고 돌아온 젊은 사람들이 와서 그녀가 죽은 것을 보고 그녀의 시신도 함께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이 일을 보고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초대교회가 거룩해야 한 것처럼 역시 현대교회도 거룩해야 합니다. 수가 많이 모이고 재정이 넉넉한 것이 교회의 자랑이 아닙니다. 모이는 구성원이 어떤 사람들이냐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백을 감당하고 천을 감당하는 실력은 바로 거룩성에 있습니다. 교회가 거룩성을 유지하면 그 교회가 건강한교회입니다.

 

교회 내부에서 사탄이 활동할 때 인간의 말이나 서로의 정에 휩싸이지 마시고 하나님의 거룩성으로 분별해야합니다. 사탄의 역사는 거룩의 정반대입니다. 바로 거짓 영입니다. 진리를 변질시킵니다. 이런 사탄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분별하고 기도로 분별해야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 그렇습니다. 두 가지 영성입니다. 하나는 말씀의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고, 배우고, 암송하고, 실천하며 살 때 거룩의 영성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말씀만이 아닙니다. 기도의 영성도 있어야합니다.

 

생활 속에서 기도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도하며 도우심을 힘입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기도의 영성입니다. 그러면 거룩의 영성이 나타납니다. 거룩의 영성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생활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처럼 될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은 나타나야 합니다. 바로 성화의 생활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거룩하기에 성도들이 거룩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