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부자(눅 12:13-21)
목사 주태근
〔어느 낚시꾼이 새벽에 푸른빛을 띤 큰 잉어를 낚았습니다. 그때 물고기가 눈물을 흘리면서 낚시꾼에게 애원합니다. "나는 용왕의 아들입니다. 당신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줄 테니 나를 놓아 주시기 바랍니다." 낚시꾼은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다섯 가지 소원을 들어주면 내가 놓아 주겠다"하고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랬더니 물고기가 대답합니다. "안 됩니다. 저에게는 세 가지 이상은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럼 네 가지만 들어주게, 그러면 놓아 주겠네" "세 가지밖에는 안됩니다." "그럼 세 가지 반만 … "하는데, 물고기는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뭍에서 너무 오래 지체했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새벽에 몸집이 아주 좋은 신사 한분이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 왔습니다. 친구들에 의해 업혀온 이 신사는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의사는 이미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죽은 그 사람을 보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죽을 때는 일반적으로 손을 펴고 죽는데, 이 사람은 오른손을 펴고 왼손은 꼭 움켜 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시신에게로 다가가 움켜쥔 왼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기 시작했습니다. 시신의 마지막 손가락이 펴질 때, 그의 손에서는 화투 두장이 떨어졌습니다.
그 두장을 보는 순간 의사는 자신도 모르게 “어어, 삼팔 광 땡 이네”하고 말했습니다. 이 신사가 죽은 사연은 이랬습니다. 이 사람은 초상집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도록 화투를 쳤습니다. 새벽녘 가진 돈을 모두 잃어갈 즈음 판돈이 잔뜩 쌓였는데, 화투 두장을 받아들고 살며시 댕겨보니 삼팔 광 땡이었습니다.
이런 패가 나오면 약속에 따라서 이미 건 판돈의 세배이상을 거둬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남자는 너무나 감격하고 놀란 나머지, 화투 두장을 미쳐 펼치지도 못한 채, “삼, 삼, 삼…” 하다가 그만 쇼크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사상가 가운데 에맄 프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쓴 "소유냐? 존재냐?" 라는 책은 유명한 책입니다. 에맄 프롬은 오늘날의 물질문명이 소유위주의 형태로 변해감에 따라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가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지고 많이 소유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고, 인간다운 삶이나 모습은 사라지고 남들에게 나누어주는 노력은 감소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더 가지려하는 소유 갈망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소유가 적은 사람은 사람대접을 못 받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결과는 항상 부정적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도시빈민, 공장노동자, 농어민 등 생존권 투쟁이 날로 가속화 되어가고, 강도, 살인, 유괴, 폭력 등 사회적 문제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이 감소하고 인간 영혼이나 정신이나 마음에 대한 무관심이 팽해하여 공해 사업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악독 기업가들과 권력 형 부조리를 통해서 돈을 소유하려는 몰염치한 사회악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많이 가지려는 정신은 타인에 대한 경쟁의식을 부채질하여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교육열과 과소비가 날로 치열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이렇게 무서운 소유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에 해당하는 모델이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에 소개되는 한 부자입니다. 그는 오늘날의 시대를 반영하는 인물입니다.
그 부자는 밭에 소출이 풍성해지자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 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짖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누가복음12:17-19)
소유에 대한 지나친 생각이, 과소비하는 향락적 소비풍토로 전락했습니다. 이러한 소유나 소비위주의 삶은 반드시 이기주의로 흐르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학자들은 에고이즘(egoism)이라 부릅니다. 나밖에 모르는 인간... 남들에게 관심이 전무 한 인간... 이는 가장 죄악스러운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이 부자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요, 현대인과 현대 사회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의 서두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 하리라."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 해서 그가 사람다운 사람이고 옳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 보훈에서도 이와 같이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예수님은 모으기에 급급한 소유위주의 삶을 분명히 경계하셨습니다.
민수기 22장에 재미있는 탐심의 이야기 속에 "발락"과 "발람"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발락은 모압 국가의 왕입니다. 이스라엘의 세력이 점차 확장되자, 이 모압 왕 발락은 위기를 느낍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스라엘의 세력을 약화시킬 방법을 찾다가, 선지자가 복을 빌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받는 것을 알고, 미디안 선지자 가운데 발람이라는 사람을 고용하여 그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만듭니다.
선지자 발람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는데도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그가 나귀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이 나귀가 멈춰 서고는 꼼짝도 하지 않더니 갑자기 날뛰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자가 바로 앞에서 칼을 들고 가로막고 선 광경을 본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선지자 발람은 나귀가 움직이지 않자 나귀를 계속 때리자, 나귀는 입을 열어 나를 왜 세 번 때리느냐고 대듭니다. 그러자 발람은 내게 칼이 있었으면 너를 죽여 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선지자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습니다.
탐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안보이니 인간이 주인 노릇합니다. 탐심의 지배를 받으면 내가 탐하는 그것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됩니다. 역시 본문의 주인공도 발람처럼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지 못합니다.
첫째로 자기 재산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재물의 관리자일 뿐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께서 잠시 그에게 맡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재물의 주인인 줄 착각했습니다. 자기 손에 있기에 내 것이라고 하는 단순한 사고방식이 그를 어리석게 만듭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대상29:11)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두려워 떨며 청지기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되는데, 이 부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청지기 인생입니다.
둘째로 재물을 쌓고 즐기는 데만 사용했지 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해야 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재물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선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돈을 벌면 벌수록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내가 즐길 수 있는 나의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물질의 종으로 삽니다.
셋째로 쌓아 놓은 재물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거나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쌓아 놓은 재물도 자신을 오래 살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즐기고 건강관리를 하고 모든 면에서 노력해도 자기 생명은 자기 맘대로 할 수 없음을 그는 몰랐습니다. 물질이 우리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을 지키십니다.
넷째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면 빈털터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땅에 있는 곳간에는 잔뜩 쌓아 놓았지만, 막상 천국에 가보니 빈손이었습니다. 설령 자기가 그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땅에서는 부자인줄 모르나 하늘에서는 가장 가난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부자는 4가지를 모르고 살다가 인생을 끝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숙한 자세를 가지고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부자가 되는 한 생을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부자가 되는 한 생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돈이란 원래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재물이란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으로, 바로만 쓰면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을 살면서 인간답게 살고 인간답게 대우 받기 위해 돈이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건입니다. 특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우리의 힘입니다. 기독교는 돈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돈이 없이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킵니까? 돈이 없이 어떻게 가정을 행복하게 꾸려갈 수 있습니까? 돈이 없이 어떻게 인간답게 여가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돈이 없으면 어떻게 선한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돈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천하게 여기거나 정죄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목적도 내가 수고한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입니다. 수고한 만큼 거두는 것이, 눈물로 씨를 뿌리는 만큼 기쁨으로 수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반면에 이 돈은 불의한 재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물, 돈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폐, 수표가 아닌 그 이상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돈은 사악하고 무서운 힘을 지닌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을 지배하는 폭군으로서 군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신까지도 마음대로 유린하는 천하무적의 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돈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돈 앞에서 쩔쩔 매고 아부합니다. 돈이 마치 하나님인 양 엎드려 절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돈을 버는 데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돈을 법니다. 이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두 번째는 쓰기 위해서 돈을 법니다. 관광 다니고 여행 다니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쓰기 위해서 벌지 않습니다. 쓸 만큼 다 써보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쓰기 위해서는 벌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돈을 버느냐...자아실현을 위해서 돈을 법니다.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의를 세우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금만능주의의 마지막 단계는 자기 숭배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고, 탁월한 비즈니스맨이요 자본주의 시대의 영웅이요 신화적 존재라는 것을 떨쳐 보이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이 사람은 물질숭배의 단계를 넘어서 자기 숭배의 단계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종교화된 이기심입니다.
본문에 등장한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만 의지하고 장래에 대한 설계를 그럴듯하게 했지만,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결론은 이런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나님께 대하여는 매우 인색하고 아까워하는 자는 끝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보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아 둔다는 의미는 바로 주 하나님을 위하여 부요한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한 일에 인색하지 않고 넉넉함으로 충성 봉사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모아도 하나님을 위하여 모아들이고 또한 재물을 사용하여도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함이 바른 모습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생각하였지 정작 주님을 위한 헌신과 봉사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자기 자신을 위한 부질없는 삶에 매달렸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기에 자기 자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탐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탐심을 다루기에 쉽게 농락당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없는 자들은 탐심을 제어할 능력이 없기에 철저하게 농락당합니다.
비유 속의 어리석은 부자가 내가 아니라 할지라도 부자의 어리석은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물이 많아 자기만 알도록 금은보화를 지하실 깊숙이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는 혹시 누가 손을 댔을까봐 의심스러워 매일 같이 몰래 지하실로 내려가 확인하고는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몰래 감추어 둔보물들이 안전한가 불현듯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밀 지하실에 가서 문을 조금 열어 놓고 보물을 만지며 웃고 있을 때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분 날인지라 지하실의 조금 열어놓은 문이 그만 바람으로 인해 닫혀져 버렸습니다. 이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부자는 밀실에서 아우성을 쳤지만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집이 무너졌을 때 한 인부는 금은보화와 해골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부자는 보물을 하나님처럼 섬겼지만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처럼 섬긴 재물은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렸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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