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의 삶(시113:1-3)
목사 주태근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여류 작가 스토우 부인과 남북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대통령이 만났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스토우 부인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부인을 만나서 매우 기쁩니다. 부인의 글을 읽고 난 후 이 글을 쓴 사람은 강대한 장군이거나 아니면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정치가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이렇게 만나고 나니 아주 몸이 연약한 부인이시군요. 나는 부인의 글을 읽고 너무 큰 감동을 받았지요. 어떻게 그런 글을 쓰시게 되었습니까?" 하는 링컨 대통령의 물음에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것은 제가 받을 칭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재능을 주셨으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뿐이지요. 그보다 많은 흑인을 비참한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킨 각하의 업적이야말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겸손한 어조로 "그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그저 하나님의 종일뿐입니다. 내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영광은 주님께만 돌릴 뿐입니다."
노예 해방의 두 주역들은 서로가 자기에게 돌아오는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이 대화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이 두 사람의 업적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예배를 살펴보면, 찬송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찬송이 빠지는 예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찬양의 종교요, 찬양은 기독교의 시작이며 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마치 '잔치집 같은 종교'라서 늘 기쁘고 즐거운 찬송을 부릅니다.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찬송을 부르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시인은 시로서, 문인은 글로서, 음악가는 노래로서, 그리고 화가는 그림으로서, 각기 자신의 고귀한 감정의 결정을 표현 하지만,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바로 찬송으로 표현합니다.
음악은 우리 생활에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오선 위에 그려진 것만 음악이 아니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가 음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유명해진 '난타'도 주방에서 사용하는 생활도구로 소리를 내어 음 악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 트럼펫 연주자 루이 암스트롱은 음악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당신 속에 음악이 있다면 음악에 대한 정의는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 속에 음악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정의나 학적인 해설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음악은 사람들에게 평안과 용기를 주고 치유하기도 합니다.
음악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찬양은 음악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찬양의 의미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찬양은 '높이다, 존경하다. 자랑하다, 영화롭게 하다'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하고, 존경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찬양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노래로, 춤으로, 연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음악이나 연주나 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가장 우리가 하기 쉬운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을 음악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악기를 연구하는 학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악기는 리듬이나 모든 내용이 감사와 승리와 환희와 축복에 대해서 이미 누리고 있는 한없는 은혜에 대해서 찬양하는 곡조로 되어 있고 악기도 다 그런 악기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저도 악기를 많이 모았습니다. 원시 사회에서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없는 곳에 사용된 악기들은 다 인간의 허무함을, 괴로움을,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슬픈 리듬이고 모두가 슬픔으로 이어져 있다.”
인간의 노래는 한숨입니다. 슬픔입니다. 울음입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찬송이요, 감사요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이는 찬양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찬양의 삶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오늘 본문의 아름다운 찬양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절기 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찬양시를 통하여 찬양의 삶이 무엇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라는 말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 시간을 찬양하라는 말입니다. 아침에 해가 돋을 때부터 저녁에 해가 질 때까지 온 종일 찬양을 부르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찬양이라고 하는 것이 꼭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만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주안에서 거룩한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이 바로 찬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말을 못하는 사람은 수화로써 아름답게 찬양하는 것을 봅니다.
저는 어떤 수술환자가 입과 코에 호스를 꼽았기 때문에 손가락 끝과 눈빛으로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찬양은 꼭 입을 열어서 소리를 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쁘게 살아가는 모든 순간순간이 곧 훌륭한 찬양입니다.
어떤 성도가 바닷가를 걸어가다가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무언가 감사하다는 표시를 하고 싶었습니다. 주님에게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는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모래를 한 움큼 가슴에 끌어안았습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그 모래 한 알 한 알이 모두 사랑스러웠습니다. 그 자매는 주님이 만드신 그 모래를 쓰다듬어 준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리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 자매가 모래 한 움큼을 끌어 모아 가슴에 앉고 모래를 쓰다듬어 준 그 행위야말로 어떤 찬양보다도 훌륭한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집에 있을 때나. 차를 운전할 때나 사무실에 있을 때나 책을 볼 때 마음껏 소리 내어 찬양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조용한 밤중에 성경을 보다가 은혜를 받고 찬양을 막 부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소리 내어 크게 찬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마음으로 불러야합니다 영으로 불러야합니다. 이처럼 진정 은혜 받은 성도들은 하루 종일 찬양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해 돋는 시간부터 해 지는 시간까지 찬양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라는 말은 동쪽에서 서쪽까지 온 공간에서 찬양하라는 말입니다. 해는 동쪽에서 두둥실 떠올라 온종일 대지를 두루 비추이다가 서쪽으로 살며시 살아집니다. 해는 날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전 지역을 고루고루 비춰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라는 말씀은 이 지구상에 전 지역에 살고 있는 전 인류로부터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 분이라는 말씀이요. 전 인류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전 인류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됨은 하나님의 섭리가 온 우주공간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의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겠거니와, 우리 기독교인들은 해 돋는데 부터 해지는데 까지 어느 지역 어느 장소에 있던지 간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예배당 안에서만 찬양할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거리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다윗 왕은 피난도중 동굴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고. 바울 사도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찬양할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 돋는데서 부터 해 지는데 까지 모든 장소가 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장소입니다.
물론 때와 장소에 따라 찬양의 내용이 달라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가정을 방문해서 찬송을 하다가도 우리는 얼마나 감격하고 위로를 받습니까? 우리에게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라도 거기에 적합한 찬송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거기에 맞는 찬송을 택하여 부를 수 있는 훈련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어느 교회의 평신도들이 백일잔치를 하는 성도 가정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마침 담임 목사님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평신도들 중에 한 사람이 예배를 인도해야만 했습니다. 서로 예배인도 하는 것을 미루다가 결국 나이가 제일 많은 집사님이 사회를 맞게 되었는데. 무슨 찬송을 불러야 될지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한참 고민하다가 아기 백일잔치이니까 어린 아기에 관계되는 찬송을 불러야 되겠다고 생각하고서는 찬송가 109장을 부르자고 했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어둠에 묻힌 밤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좀 어색하기는 했지만 1절은 그런 대로 넘어갔는데 2절부터는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하는데 어색해서 일동은 "와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끝내 찬송을 멈추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기독교인들은 “해 돋는데서 부터 해 지는데 까지” 어떤 장소에서든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악 조건의 장소라도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부적당한 장소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온 세계와 인류 피조물들이 주님을 찬양해야합니다.
죠셉 하트(Joseph Hart, 1712-1768)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1712년 영국 런던에서 출생한 사람으로서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미워하여, 기독교를 타도하는 데도 철저히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이분은 글 쓰는 재주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글 쓰는 재주를 가지고 성경의 모순을 주장하는 글들을 많이 쓰면서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반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또 이 죠셉 하트는 신앙을 반대하는 선전문과 반박문을 잘 만들어서 부흥회하는 장소마다 쫓아다니며 뿌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를 추종하는 추종자들과 함께 가끔씩 교회를 출석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그렇게 가끔씩 교회에 출석한 이유는 교회를 비판하는 자료를 구하기 위해서 가끔씩 출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과격한 행동으로 인하여 그는 어느 날 자신이 일하던 일터에서는 결국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는 직업은 잃었지만 기독교를 비판하고 반박하며 핍박하는 것을 자신이 받은 사명을 생각하고는 계속해서 종교 무용론이나 무신론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고 또 그러한 강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1757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45세 되던 해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 가까이에 있는 어느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물론 전에도 그랬지만 그날도 교회에 간 이유는 교회를 비판할 자료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은 그 교회 목사님이 요한계시록 3:9절을 가지고 설교를 하였는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는 통회 자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그의 성격이나 이때까지의 경력으로 보아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난후 그는 완전히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난 다음에 그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나도 모르게 어떤 애정의 늪에 서서히 그리고 깊게 빨려 들어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철저히 회개한 이후, 초기 2년 동안은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글재주로 많은 찬송시를 쓰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를 통하여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목사님이 되어 한 10년 정도 일하다가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그전에는 기독교와 예수 믿는 사람을 그렇게 심하게 박해하더니 예수 믿고 난 이후에는 철저하게 열심히 믿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쳤던 영향으로 그의 장례식에는 약 2만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하며 그의 운구를 뒤 따라 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가 회개한 이후에 쓴 찬송시 중에 우리 찬송가에 실려 있는 찬송이 하나 있는데 그 찬송이 94장입니다. 이 찬송 94장은 그동안 그가 철저하게 반박하던 예수가 누구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싫어했고 반대했으며 반박하였던 예수가 알고 보니 그렇게 좋고 위대하고 아름다우신 분이신 것을 미쳐 몰랐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노래를 많이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찬양으로 시작하여 찬양으로 끝납니다. 어거스틴은 "크리스천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로 채워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대 설교가 스펄전은 "만일 내가 하나님을 찬양치 않고 잠잠히 있다면 온 우주 속에 유일한 예외가 될 것이오. 천둥이 하나님 군대의 드럼 소리요, 산에 부는 바람이 수없는 찬양의 숨결이며, 바다의 파도 소리가 그를 격찬하는 아우성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찬양의 삶이란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떤 종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명상만 하면 됩니다. 어떤 종교는 메카를 향해 하루에 다섯 번 절만 하면 됩니다. 어떤 종교는 목탁을 계속 두드리고 그 목탁 소리에 몰입하기만 하면 됩니다. 기독교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찬양의 삶이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진실로 찬양의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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