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생활의 회복(눅17:11-19)
목사 주태근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온천이 솟고, 그 옆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올라 동네 여인들은 빨랫감을 가지고와 온천에서는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는 헹구어 집으로 가져가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관광객이 안내하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참으로 많겠습니다.”하였더니, 그러자 안내원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천만에요. 이 마을 사람들은 불평이 더 많습니다.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것은 좋은데 빨래 비누까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이 아주 많습니다.”
화단 구석에 장미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미는 얼마나 불평이 많았는지 눈만 뜨면 불평을 털어놓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장미는 밤이면 춥고 어두워서 화단에 못 있겠으니 거실로 옮겨 달라고 주인을 졸랐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화분에 옮겨서 거실로 옮겨 두었습니다. 얼마 후 장미는 또다시 주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여기는 나비가 찾아오지 않으니 창가에 옮겨 달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은 장미를 창가에 옮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장미는 창가에는 고양이가 지나다녀서 싫다며 방안 꽃병에 꽂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인은 다시 장미를 화분에서 꽃병으로 옮겨 방안에 두었습니다. 며칠 뒤 장미는 또다시 주인에게 햇살이 있는 바깥 화단으로 옮겨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장미는 이미 뿌리가 잘려 시들어버렸고 주인은 장미를 뽑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맛좋은 음식을 먹어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은 불편하고,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만족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40대 초반의 남자가 혀에 암이 생겨서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됐습니다. 집도하는 의사가 그 환자에게 "이제 당신은 혀를 절단하면 영영 말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하시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사형수가 사형 집행 직전 마지막 말을 남기라는 집행관의 말을 듣는 것처럼 비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가족들 특히,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그 환자는 입을 열어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 혀로 말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내 일생에 꼭 하고 싶은 한마디 그 말이 감사였다면 그 분은 말을 못하고 산다 해도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란 사실을 확실히 안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아홉 사람은 유대 사람이고,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과 격리되어서 따로 떨어진 곳에서 격리되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그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찾아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 긍휼을 구했습니다. 우리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곡히 호소했습니다.
그런 뒤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찾아 갔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가는 도중 열 명 모두의 병이 깨끗이 나음을 입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열 명의 행동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뒤로는 아홉 사람과 한 사람이 갈라졌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그냥 그대로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이방 사람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돌이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최고의 경의를 표하면서 예수님께 사례했습니다. 예수님은 열사람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셨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달려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더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의 복 있는 삶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에게 자기의 몸을 보이러 가다가 도중에 자기가 깨끗함을 입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할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입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그는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몹쓸 병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몸을 깨끗하게 해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어떻습니까? 큰 소리를 외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속으로 기도했겠지! 속으로 감사했겠지!"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속으로만 사랑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분이 재미난 글을 썼습니다. 주님께 돌아오지 않고 사라져버린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이 과연 무슨 이유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 진짜 나았는지 확인해 보아야겠다. - 나은 것은 분명하지만 앞으로 또 재발하지는 않을까? -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 돌아갈 것은 없고 나중에 잘 된 다음에 천천히 감사를 드려도 되지 않겠는가. -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찾아갈 수 있겠는가? - 이제 보니 내가 앓고 있던 병이 문둥병은 아니었던 것 같아.
- 아니야 다 나은 것이 아니고 그저 약간만 나았을 뿐이야. - 얼른 제사장에게 가서 증명서를 받은 다음 남이 보란 듯이 돌아다녀야지. - 아니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특별히 해 준 것이 뭐가 있어? 물론 병이 나아서 감사하기는 하지만 주님께서 나를 꼭 끌어안아 주시고 며칠씩 밤을 새워 가며 애써 주신 것도 아니잖은가?
내가 불쌍하다고 언제 한번 먹을 것 입을 것 제대로 챙겨주신 적이나 있나 뭐? 그저 단지 가서 제사장에게 보여라 이렇게 말씀만 하셨을 뿐 아닌가? 말이야 누군 못하나? 그러니 구태여 찾아가서까지 감사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바로 거기서부터 불행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당연이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당연한 것이 있다면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나병보다 더 비참하고 더 불행하고, 더 무서운 병은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냉담해지는 병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무관심해지는 병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배은망덕해지는 병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만백성이 보는 눈앞에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속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마음으로만 감사하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과 감사를 떳떳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감사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다.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사례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표해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절을 갖추어서 경배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최상의 경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최고의 예절을 갖추어서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깊은 감사의 정을 느끼는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오기만 하면 절로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에 뜨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찬송을 불러도 절로 눈물이 나오고, 기도를 해도 눈물이 터져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해도 구구절절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러분, 그 나머지 아홉 사람에게 믿음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으니까 예수님께 나아와 부르짖고, 긍휼을 구하고,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사장들에게 자기들의 몸을 보이기 위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는 도중에 병 나음을 입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 나음을 입을 수 있었다는 믿음은 작은 믿음이 아닙니다. 큰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부족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주시옵소서"의 믿음은 있었지만, "감사합니다"의 믿음은 없었습니다.
받는 믿음만 있었지, 드리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칭찬하신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시옵소서"의 믿음입니까? 아님니다. "감사합니다"의 믿음입니다. 받는 믿음보다 드리는 믿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이 있습니다. 행20:35의 말씀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마리아 사람은 받는 믿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드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있는 믿음입니다. "주시옵소서"의 믿음에 머물러 있지 말고, "감사합니다"의 믿음을 소유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 본시 그 분의 이름은 손영준 목사였습니다. 그는 여수에 있는 애양원이라는 나환자가 모인 교회에 초빙되었을 때, "나는 여기서 내 목숨을 걸고 죽도록 충성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도 애양원을 따서 손양원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손목사님은 그곳에서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여수반란사건 때 목사님은 그의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잃었습니다.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했던 것입니다. 손목사님은 아들들 장례식 때 답사를 통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 자식이 나오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둘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 나에게 이와 같은 영광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 가장 잘난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바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영광인데 두 아들이 순교를 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를 믿다가 병중 자리에서 죽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전도하다가 순교 했으니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에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을 갔으니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덟째, 이와 같은 역경 속에서도 기쁜 마음과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 합니다. 아홉째, 주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면서 그 엄청난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행복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는 답사를 이렇게 끝맺음했습니다. "이것은 옛날 내 부모가 새벽마다 36년 동안 눈물로 기도한 결정이요, 내 형제 자매들이 23년 동안 눈물로 기도해 주어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임을 믿고 감사합니다." 그는 감사로 답사의 끝맺음을 했습니다.
감사를 회복하면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됩니다.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감사하면 절로 효도하는 자녀가 됩니다. 감사하지 못하니까 효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절로 그 가정은 화목합니다.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만 회복하면 저절로 충성할 수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 여사, 그녀의 반평생은 병주머니의 반평생이었습니다. 폐결핵, 척추카리에스, 띠 모양 습진, 파킨스씨 병, 암 등 갖가지 질병 속에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 속에서 그는 위대한 작품들을 생산해 냈습니다.
이 여인이 고통 속에서 암송한 시가 하나 있는데 작자 미상의 시입니다. “ 아프지 않으면 ” 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뵈지 못할 성안이 있다. 아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 없다. 아픔이 있기 때문에 기도가 있었고, 노래가 있었고, 신앙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아픔 속에서 영광스런 작품들이 나왔고 그 작품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아야꼬 여사가 누워 있는 병실에는 다른 환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야꼬 여사는 아픔 속에서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을까? ” 그녀는 기도하는 가운데 “ 비록 나는 아프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기쁨을 보여 드려야겠다. ” 하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그녀는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호사가 오면 부드럽게 웃었고, 옆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녀는 주님의 절대적 은총을 알았기에 병주머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감사가 회복되면 인생이 행복합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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