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14:8-14)
목사 주태근
미국에서 가장 큰 은행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라는 은행이 그 은행에서 신용을 평가하는 기준을 네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그 사람이 무엇 하는 사람이냐? 즉 직업이 무엇이냐? 입니다. 둘째는 그 사람이 가진 것이 무엇이냐? 즉 소유가 무엇이냐? 어떤 것을 가졌느냐? 입니다.
셋째는 그 사람의 평판이 어떠냐? 즉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주나? 입니다. 네 번째는 그 사람이 우리 은행과 어떤 거래를 했는가? 하는 네 가지 은행 신용 평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그렇게 하니까 「뱅크 오브 스탠다드」라는 한 미국의 은행이 우리는 사람을 평가하고 대출할 때 두 가지만 본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그 사람이 직업이 무엇이냐? 네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하는 직업을 보고, 둘째는 우리와 어떤 거래를 했느냐? 이 두 가지를 우리는 본다고 광고를 했더니 그 두 가지를 말한 「뱅크 오브 스탠다드」쪽으로 고객들이 12%나 더 많이 밀려왔다고 말합니다. 신용을 첫째로 여기는 오늘 날의 모습입니다.
요즘 시대는 기업의 가치를 따질 때 기업의 유형자산, 즉 현금이나 부동산만을 가지고 그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무형자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브랜드라던가, 고객과의 관계라던가, 인적자본과 같은 것이 무형자산이 되어서 그것을 이 기업의 가치를 계산하는데 포함시킵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신용사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용이 있으면 살기 편하고, 신용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투명한 사회입니다. 때문에 신용을 인정받는 일과 신용을 잃는 일은 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면 어디서든지 현금거래 외에는 신용거래를 할 수 없습니다. 반면 신용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면 카드 한 장만으로도 외국 여행을 할 수 있고 생활에 무한한 편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신용은 일반적으로 물질의 유무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행의 관행은 신용보다는 담보물이 우선입니다. 물질이 사람의 가치를 우선합니다. 그 사람의 신용보다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담보물, 즉 땅과 건물을 보고 대출을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혼란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신용이 없는 물질만 숭배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없을지라도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세상이 된다면 사회는 좀더 신용 있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신용이라는 말은 한 사람에게 투자하거나 빌려주거나 맡겨주면 반드시 갚아준다는 확신입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용은 사람을 신뢰하고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생활에도 이 신용이 반드시 적용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신용이 뒤 따르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믿음을 통한 신용 있는 사회건설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이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족하겠나이다" 라고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사실 이 빌립의 질문은 오늘 우리가 꼭 하고 싶은 질문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실체를 경험해 보고 싶어 합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지고 보아서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는 것이 아니시고 영이시기 때문에 만질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며 실재로 경험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는 욕구는 구약시대부터 있어 왔고 현대에도 하나님을 보기 원하는 욕구들이 있습니다. 보면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수많은 기적들을 통하여 보여주셨는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이는 형태로 만들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형상으로 만들기도 하고, 송아지 형상으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말라는 제 2계명을 율례로 주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구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요청에 대하여,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는지를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르치신 말씀이 이러합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본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할 부분은 성부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님의 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빌립의 요구에 대하여 예수님을 본 자는 바로 아버지를 보았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 내 안에"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시므로 차등이 없이 하나님과 서로 직접 교제하시는 동등한 존재이심을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연합하여 하나가 된 존재로서 하나님이십니다. 일체이신 하나님 존재방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예수님이 같은 분으로 믿지 못하겠다면, "나의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믿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주장은 처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를 교훈하실 때 유대인들이 질문하기를 "당신이 그리스도이거든 확실하게 증거를 보여주시오" 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하신 일을 바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나나내신 일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표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표적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증거요 이를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데 그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표적은 항상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소개하고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데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일이요 하나님을 보고 체험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을 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형상이요 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보여 주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보이는 것만 믿을 수 있다"는 철학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무신론자들도 많이 있고 불가지론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불가지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지의 여부를 증명해 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를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고 또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와 영원히 교제하는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새주로 믿고 순종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생활입니다. 금세기 유명한 신학자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과거 우리믿음의 조상들이 늘 해왔던 방법인 예배출석과 성경말씀을 읽고 순종하며, 기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 보면, 경험되는 세계가 바로 믿음의 세계입니다. 그때부터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혼란스러워하는 빌립에게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하면서 그의 믿음의 영성을 다시 한번 촉구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신비한 어떤 세계를 보고 가지는 믿음보다 이미 보이는 것을 통한 믿음의 확립입니다.
사람에게는 믿음의 영성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이 영성이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영성이 회복되는 길을 성경은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으로 주신 말씀을 배우고 따르고 실천하면서 영성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육신으로 오신 아들 예수님을 믿을 때 영성이 회복됩니다.
신용을 가진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믿음의 영성 회복입니다. 믿음이 회복되면 신용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믿음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조각할 대리석을 사기 위해 가게들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땅한 재료를 구하지 못해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데, 어느 가게에서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대리석 덩어리를 구석으로 밀쳐놓으려고 했습니다.
지나다가 그 모습을 본 미켈란젤로는 급히 달려가 물었습니다. "이 대리석의 값이 얼마요?" "그 대리석은 아무 쓸모가 없으니 그냥 가져가시오." 미켈란젤로는 그 대리석 가게에서 10년이나 안 팔려 누가 그냥 가져가기를 바라던 큰 대리석 하나를 한 푼도 주지 않고 얻어왔던 것입니다.
그 뒤 1년이 지나자 미켈란젤로는 그 대리석 가게 주인에게 찾아가 조각상이 완성되었으니 언제 한 번 들러달라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어느 날 대리석 가게 주인은 미켈란젤로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와 천사들이 조각된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가 쓸모없다고 업신여기며 거저 준 대리석 덩어리였던 것입니다. 대리석 가게 주인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물었습니다. "어떻게 선생님은 그 볼품없던 대리석을 이렇게 훌륭한 조각품으로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대답했습니다. “그 대리석 안에 갇혀 있는 천사가 나를 부르더군요. 그래서 내가 풀어주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불가능이 가능해집니다. 믿음이 회복되면 미래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립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영성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삶을 자유하게 만듭니다. 행복하게 만듭니다. 믿음 있는 사회를 건설합니다. 바로 신용의 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신용 있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집사님 한 분이 아주 오래 전에 친구 빚보증을 잘 못 서서 집을 팔아 그 빚을 대신 갚은 적이 있습니다. 채권자가 그 집사님에게 당신 친구가 빚을 갚지 못하니 보증을 선 당신이 갚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그 집사님은 집을 팔아서라도 갚아 줄 터이니 조금만 참아 달라고 대답합니다. 집을 팔아 보증 선 친구의 빚을 갚겠다는 말에 그 채권자는 그것이 정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집사님은 채권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 한대로 실천 합니다" 그 집사님은 정말 집을 팔아 보증 선 친구의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서울 변두리로 나아가 땅을 사서 다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변두리가 어디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곳이 바로 한남대교를 건너가면 리버사이드 라는 호텔이 있는데 그 호텔 바로 옆의 땅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곳이 변두리였습니다. 그때 집사님이 고백한 말이 우리를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듭니다.
"목사님 지금 이 집을 팔면 그 때 보증 때문에 잃어 버렸던 집 세 채 사고도 조금 남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말 중에 하나가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 한대로 실천 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 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신용을 얻는 것입니다. 신용 있는 사람이란, 말을 바르게 하는 것과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면 신용의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믿음이 신용을 낳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세상에서 신용 있게 산다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손해를 보아야 한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신용 있게 살면 바보가 될 것 같습니다. 손해 볼 것 같습니다. 망할 것 같습니다. 실패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탄의 생각을 물리쳐야 합니다.
신용 있게 살면 복을 받습니다. 신용 있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이 인생 승리요 성공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신용을 지킨 자에게 반드시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바로 신용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신6 :18) 아멘.
'복음서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샘이 넘치는 교회(요4:13-14)-목사 주태근 (0) | 2022.10.09 |
---|---|
주께 은혜를 얻었느니라(눅1:30-38)-목사 주태근 (0) | 2022.09.16 |
디지털 시대의 리더(요10:1-10) (0) | 2022.08.23 |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19-29)-목사 주태근 (0) | 2022.08.21 |
생수의 강(요4:5-14)-목사 주태근 (0) | 2022.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