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설교원고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19-29)-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21. 13:40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19-29)

 

 

목사 주태근

 

영국의 식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연구실에서 고치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황제나비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고치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나비에게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문제입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나비의 투쟁을 지켜보던 월리스는 순간, ‘내가 이 나비를 도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칼로 고치의 옆 부분을 살짝 그었습니다. 그러자 예상 밖의 결과가 빚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비는 고치를 빠져 나와서 날개를 폈습니다. 하지만 곧 축 늘어지더니 죽고 말았습니다. 나비는 고통과 험난한 투쟁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을 지니고 세상에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어쩌다 영혼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하는 육체를 지녔고, 일을 하며,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원칙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유지하도록 만듭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미국에서 7년 연속 베스트셀러로 5백만 부 이상 팔렸습니다. 그 책의 저자인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 박사의 리더십 이론이 불황에 빠진 1980년대의 미국 기업들을 구해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그는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입니다.

 

지난 날 한국을 방문한 코비 박사가 I M F의 감독에 들어간 한국 경제의 각종 상황을 살펴본 후 '코비식 해결책'을 월간 조선에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제목은 한국 경제의 일곱 가지 딜레마 - 원칙 중심의 리더십을 중심으로라는 내용입니다.

 

그 글에서 스티븐 코비 박사는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원칙은 내 것이 다르고 다른 사람 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며, 토론해서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남자나 여자, 대통령이나 농부에게나 모두 적용된다.

돈을 주고 사는 것도 돈을 받고 파는 것도 아니다. 원칙이란 지난 수세기 동안 모든 위대한 사회와 문명에 걸쳐 점진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자연법칙이자, 지배적인 사회가치이다.” 그가 원칙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은 윤리, 도덕성이 해이하여지고 권위가 무시당하며 추락되어 가는 오늘의 현실 사회 전반에 걸쳐서도 좋은 충고와 교훈이 될 만한 삶의 원리입니다.

 

아산의 현충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입구현판에 큰 글자로 씌어진 글이 있었는데 바로 '선공후사'(先公後私)였습니다. 나라의 일은 항상 개인의 일보다 앞선다는 뜻입니다. '선공후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항상 마음에 담고 있었던 철학이요, 원칙이었습니다.

 

이 원칙이 있었기에 이순신 장군은 원균의 모함으로 유배를 당했다가도 나라가 다시 그를 부르자 백의종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제는 수많은 나라를 점령하면서도 '승리를 도적질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듣고 있습니다.

 

제임스 로간이라는 정치인이 미국 캘리포니아 지구의 하원의원으로 일하면서 한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다른 정당이 우세했던 지역에서 매우 근소한 차이로 하원의원으로 당선이 되었던 그에게 도덕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아주 중요한 사회적 문제 하나가 놓이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양심을 따르면 재선이 힘들게 되고, 정치적으로 유리한 방법을 따르게 되면 재선이 보장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결단의 자리에서 로간은 그의 신념에 따라 옳다고 생각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원칙과 신념을 따르다가 낙선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패배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공직자로 한번 선출된 사람들은 자신이 계속 공직에 있으면 선한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원칙과 신념을 떠나 편법을 따르고 불의한 방법을 따라 자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큰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16세기 르네상스 시절에 이탈리아의 정치학자요 역사가였던 마키아벨리는 그의 유명한 저서 군주론에서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하여 권모술수를 써도 좋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마키아벨지즘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채용하여 온갖 비인도적이요, 악랄한 수법으로 인민을 억압하고 자기들의 정권욕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았습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수단 자체도 역시 정당하고 옳아야 합니다. 생의 가치는 반드시 정로(正路)를 걸어서야 얻어지게 됩니다.

 

좀 수고가 되고 약간 더디더라도 바른 길을 찾아 바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곳에 의미의 결실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으면 다 자신은 옳고 바르다 주장함에 따라 그들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사회에는 점점 더 불의가 더 기승을 부리고 있는 무질서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원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나치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때 그들에게는 정당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그들은 정당한 사유를 갖고 있었고, 독일 신학자와 교회는 그 명분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인류적 범죄 집단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바른 원칙을 갖고 있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지니고 적용했던 게르만적 원칙이란 그릇된 야망과 폭력의 원칙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바른 일을 바른 명분으로 행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무엇보다도 바른 원칙을 소유하고 그 원칙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바른 원칙은 진리를 말합니다. 진리로 이 땅에 오시어 진리의 원칙을 삶으로 보여주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러한 바른 원칙이 없을 때 내가 무엇을 행하던 그것은 만행일 수 있고, 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어도 실은 나치 군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그때까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면서 문들을 꼭꼭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을 친히 찾아오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은, 제자들이 여전히 허물투성이지만, 여전히 부족하지만, 여전히 문제 덩어리이지만, 그러나 계속하여 주님의 제자로 중용 하시고 변함없이 신뢰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언약입니다.

 

그것은 실로 위대한 주님의 사랑이요 은혜였습니다. 그 큰사랑과 은혜를 입은 제자들이 그 이후 복음 증거의 현장으로 주저 없이 나아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아무 원칙도 없이 자기 신념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그냥 마구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거기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아버지께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 같이 주님께서도 역시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이 주님의 원칙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너희들도 역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제자들이 지켜야 할 원칙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원칙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보여주셨던 진리의 삶 자체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목적은 제자들을 통해 당신의 삶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참 진리의 삶, 참 생명의 삶, 영원한 구원과 사랑의 삶을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하여 만방에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이후 제자들은 철저하게 이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온전히 주님 안에 감추었습니다. 그들을 통하여는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이는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되기를 원한다.' 라고 고백할 정도로 원칙에 투철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을 통하여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원칙에 충실치 않았더라면 그들이 아무리 주님을 사랑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했다 할지라도 인류의 역사가 B. C.에서 A. D.로 전환되는 대변혁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원칙이 없는 곳에 남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뿐이고, 인간의 이기심과 이기심이 부딪히는 곳에는 그 열정의 도가 심할수록, 끝없는 다툼과 분열로 귀결되어 지고 마는 것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주님의 말씀은 2천년 전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2천년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과 생명 그리고 진리를 이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해 삶의 현장에 보내어진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불신자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 행위가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우리의 삶이 반드시 지켜야 할 바른 원칙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로교회 전 장로님(,70)의 간증입니다. 교회생활도 등한히 하고 철강회사 운영도 방만하다가 그만 부도가 났습니다. 그래서 부정수표 단속범으로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졌습니다.

 

동업자가 부도를 내니까 같이 부도가 나게 되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수십억의 재산을 다 정리하고 아들집까지 압류 당했는데도 그 빚을 다 청산하지 못해서 결국 이리저리 피해 다니면서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피해 다닐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40일 작정 기도하고 하루에 네 번씩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회개하고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장로가 되면서 교만했던 것,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등한히 했던 것, 교회봉사에 순종하지 못한 것, 주님의 일에 물질로 인색했던 것 등 낱낱이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40일 작정 기도의 마지막 날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 다닐 것이냐? 자수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는 자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자수해서 만난 담당 검사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재산을 다 정리하고도 빚을 갚지 못한 그의 사정을 듣고 난 후, “당신은 그래도 악질은 아니군요. 하면서 피해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했습니다.

 

검사는 이 사람이 최선을 다해서 빚을 갚으려고 하였으니 그만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하면서 피해자들을 권면하고, 전 장로님에게는 관선변호사를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변호사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검사와 변호사가 힘을 합쳐 전 장로님을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그는 풀려나게 되고, 또한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때, 8·15 특별 사면으로 복권되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엄청나게 큰 사건이라 어려울 줄 알았는데, 막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수하라는 말에 순종했더니 좋은 검사와 변호사를 만나서 모든 일을 쉽게 처리 받게 된 것입니다. 원칙의 회복이 삶을 회복시켜준 것입니다.

 

바른 원칙의 회복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철학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심은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함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함입니다.

 

원칙의 주인 되신 하나님은 이 땅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바른 원칙을 실현하였습니다. 이재 제자들도 바른 원칙의 통로이신 주님의 뜻을 따라 원칙의 삶에로 부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4: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