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주태근
고대 문화가 자랑하는 전설의 7대 불가사의의 유적들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바벨론의 공중정원, 에베소에 있는 다이애나 여신 전,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로즈 섬의 항구에 있는 거대한 청동상, 그리스 올림피아에 있는 이방신 제우스 상, 그리고 페르시아 왕 할리카르나서스의 무덤 등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7대 불가사의에 또 하나의 불가사의가 더해져야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리비아의 대수로 공사입니다. 사하라 사막의 동남부 및 서남부 내륙지역의 땅 밑 600미터에 매장돼 있는 지하수를 퍼 올려 북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주요 도시에 공급하는 “거대한 인공 강 프로젝트”입니다.
현재 영국 템스 강 유수 량의 2배에 해당하는, 하루 250만 톤 이상의 물이 송수되고 있습니다. 이제 리비아는 어느 정도까지는 식수와 공업용수, 그리고 농업용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현재 진행되는 5단계의 모든 공사가 끝나면 우리 한반도면적의 6배에 달하는 죽어 있는 땅 3억6천8백만 평이 숨쉬는 땅으로 바뀌어 지게 됩니다.
사막의 황폐한 땅이 녹색의 기름진 땅으로 바뀌어 지어, 각종 실과나무가 자라서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는 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죽어있는 땅이 숨쉬는 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저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물의 중요성입니다. 죽어있는 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물이 들어가면 됩니다.
물이 들어가면 황무지가 옥토로 바뀝니다. 먼지만 풀썩풀썩 날리는 땅도 물이 공급되기만 하면 초원으로 변화되고 생명도 살게 됩니다.
《아라비아의 한 대상이 신부 집에 줄 선물과 낙타를 이끌고 사막을 지나가다 물이 동이 나는 바람에 심한 갈증으로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눈에 익혀 두었던 샘을 찾아갔으나 유난히 뜨거운 날씨에 말라버려 한 방울의 물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달리 물을 구할 방책이 없어 낙심하고 있던 터에 일행 중 노인 한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 집 선물로 가져가는 사슴을 사막에 놓아주십시오. 그 두 마리를 사막에 놓아주면 물 냄새를 맡고 그 곳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죽을 지경에 이른 대상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사슴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사슴들은 머리를 높이 들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기를 몇 차례 하더니만 사막을 가로질러 뛰어갔고, 일행은 낙타를 타고 사슴의 뒤를 쫓은 지 두 시간 만에 물을 발견하여 그들 모두가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물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은 피의 85%가 물이고, 뇌의 75%가 물이며, 근육의 70%가 물입니다. 물을 떠나면 사람의 생명은 죽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물을 늘 마셔야 하고, 건강한 사람일수록 물을 많이 마십니다.
4대 문명의 발생지도 물을 끼고 발생한 것입니다. 황하 강을 끼고 중국문명이, 갠지스 강과 인더스 강을 끼고 인도문명이, 나일 강을 끼고 이집트 문명이,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 강을 끼고 바벨론 문명이 발전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금강을 끼고 백제가, 대동강 유역을 끼고 고구려가, 한강을 끼고 이씨 조선이 흥왕하였고, 어디서든지 풍부한 물을 가지고 국가와 민족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 땅 지구는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습니다.
지구 표면의 71퍼센트가 물입니다. 깊은 곳은 바다 깊이가 11킬로 입니다. 필리핀 해역은 8,000미터 되는 에베레스트 산보다 바다가 더 깊습니다. 육지의 민물은 깊어 봐야 25미터 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닷물은 깊습니다.
바닷물이 물의 97퍼센트입니다. 우리가 쓰는 물은 전체 물의 3퍼센트 정도 입니다. 강물 전체 다 계산해도 우리가 쓰는 물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남극, 북극에 있는 빙산의 69퍼센트는 영원히 쓰지 못하는 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가운데 물의 선물은 우리에게 필요 불가결한 선물입니다. 생명체의 존재 여부는 물과 절대적인 관계입니다. 사람과 짐승은 다같이 물을 찾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짐승은 육적으로만 목마르기 때문에 땅의 물만 있으면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체도 목말라 물을 찾지만은, 또 다른 심령의 목마름, 영혼의 목마름이 있어 주님이 주시는 영생수를 받아먹어야만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목마름은 두 가지입니다. 인간의 두 가지 목마름, 육적인 목마름과 영적인 목마름이 다같이 채워져야만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바라보며, 위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을 찾게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늘의 물, 위에서 내리는 물, 영적인 물을 마셔야만 흡족함과 만족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똑같이 땅의 물만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람은 땅의 물, 육의 물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 신령한 물, 영적인 물을 받아 마셔야만 만족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목마름은 땅의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신령한 목마름은 거룩한 목마름이요, 영원한 목마름이기 때문에, 인간은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만 인생의 갈급함이 해결 되는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여행하시다가 수가성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긴 여행에 지친 예수님은 수가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 걸터앉아 물을 길러 온 한 여인에게 물 한 그릇을 청하셨고, 물을 길러 왔던 여인과의 대화가 오늘 복음서의 줄거리입니다.
예수님은 13절에서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금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느끼는 갈증은 사막의 유목민들이 느끼는 갈증입니다.
중동이나 아프리카에 사는 유목민들은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에서 낯이면 4-50도를 오르내리는 뙤약볕 아래서 느끼는 그 갈증은 아무리 물을 마셔도 도무지 해갈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갈증은 그러한 갈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조상이었던 구약의 족장들이 가는 곳 마다 제일 먼저 한 일이 우물을 파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우물을 팠고, 이삭은 르호봇에 우물을 팠고, 지금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수가성 우물은 예수님의 조상이었던 야곱이 판 우물입니다. 이와 같이 사막지방에서의 우물은 사람이나 가축에 있어서 생명 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목마름은 물이 없음으로 생기는 갈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영혼의 목마름으로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여인의 형편이 바로 그러 했던 것입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그녀의 목마름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아모스 8장11절에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우리가 이미 경험한 바대로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본성적으로 강렬한 갈증, 끝없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3절에 이르기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목마름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의 원하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갈증이 입습니다. 도무지 끌 수 없는 불타는 정욕의 불길,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끝없는 욕망의 갈증,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 바닥에 숨겨져 있다가 기회가 되면 꿈틀대고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철학자 홉스는 인간의 변함없는 본질은 바로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두면 모두가 다 자기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적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목마름이 저주스러운 것은 그 무엇으로도 이것을 해갈시켜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5 장 10절에서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온 천하를 다 얻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온 천하보다 더 큰 존재로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결단코 해갈이 안 됩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이 신문에 광고를 하나 내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인생에 정말 만족한다고 자신하는 사람, 그리고 만족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만 달러를 상금으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들을 썼습니다. 좋은 직장을, 아름다운 아내와 착한 자식을, 유명한 명문 학교의 학위를 받아서 각기 나름대로의 행복의 이유를 증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상금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광고주가 던진 마지막 질문에 대답을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은 이러합니다. "당신이 정말 그토록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다면 왜 내가 주겠다는 만 달러에 욕심을 내어 찾아 왔습니까?" 일만 달러 상금을 타기 위하여 달려온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영적인 목마름의 해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서울의 한 교회에 어떤 여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의 남편이 과거에 육군 중령으로 국방대학원에 다니던 실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장래가 아주 촉망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주일을 밤낮으로 일하다가 그만 과로로 쓰러졌는데 열이 매일 40˚까지 올라가서 그만 두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그 병은 1000명중 1명도 살리기 힘든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았던 삶은 이제 문이 닫혀 버렸습니다. 모든 길이 막혀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세상의 모든 소망을 버리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부인의 부축을 받아 나왔는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물로 기도하고 생수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생수의 근원 되신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주님께서는 "안심하라 내게 오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 같이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병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열이 내려가고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게다가 오른 눈이 희미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 설명을 못합니다. 이분은 성령으로 더욱 뜨거워져서 날마다 은혜를 받고 설교말씀 한 시간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항상 나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은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대학 총장이 한국에 와서 이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대학으로 불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 받을 때까지 전부다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워서 할 수 없다고 하니, 타자기만 치면 출력물로 리포트를 제출하고 그리고 강의를 들으면서 녹음을 해주면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게 된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유명한 소설가인 헤밍웨이가 왜 사냥총으로 자살했습니까? 명예가 그 마음속에 행복을 갖다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돈도 있었습니다. 부인도 여러 번 바꾸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서에서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공허하다’고 말했습니다.
A. D. 900년 초에 사라센 제국의 압둘라만 3세는 당시 세계에서 최강국의 강자였습니다. 그는 후궁이 3천3백21명, 자녀가 6백16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나는 오랜 세월 명예로운 통치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행복을 누린 날은 단 14일 뿐이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지난 주간 이은주 영화배우가 자살했습니다. 뛰어난 배우이면서 미모의 25세의 젊은 나이입니다. 미래가 있는 여성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룬 자리가 그의 삶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우울증이라는 병원의 진단도, 노출연기 후유증이라는 언론의 분석도, 그녀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그녀 자신 외에는 누구도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꽃다운 청춘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나라의 30-40대 남자 중 상당수가 행복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무엇이 여러분을 만족시키며 보람 있는 인생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겠습니까? 행복의 근원되는 생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아멘.
생수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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