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체험(막9:2-13)
목사 주태근
'연어'는 회귀성 어종으로 유명합니다. 알에서 부화된 새끼 연어는 먼 바다로 나가서 생활하다가, 산란기가 되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어갑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해안 주변의 하천에서 부화된 새끼 연어가 북태평양 베링해까지 나아가서
약 3-4 년을 지내다가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에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해서 강을 타고 오를 때에는, 엄마가 뱃속의 아이를 위해 태교를 하듯, 아무리 맛있는 것이 있어도 절대로 먹지를 않습니다.
연어들은 종족 보존을 위해서 험한 바다 거센 풍랑도 이겨내고 폭포도 힘차게 거슬러, 기어이 자신이 태어난 곳에 도착합니다. 일단 고향에 도착하면, 물이 맑고 물살이 급하거나 느리지도 않은 곳, 그리고 조약돌과 모래가 깔린 곳에다 산란 터를 만들어 갑니다.
이틀에 걸쳐 만든 산란 터에, 암컷이 대략 2-3천 개 가량의 앵두 알 같은 아름답고 붉은 알을 낳게 되면, 그 위로 수컷 연어가 우유 빛깔의 하얀 액체를 내보내어 새 생명을 잉태시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힘을 쏟아 새 생명을 잉태시킨 암수 연어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그 숭고하고 장엄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자기 몸을 버리고 새 생명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연어는 새 생명을 위한 참된 변화가 무엇인가를 참으로 알게 합니다.
《영국의 진화론자인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유명한 책을 하나 저술하였는데 그것이 소위 <종의 기원> 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다윈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모든 생물은 가만있지 아니하고 항상 변화하는데, 그 변화는 바로 자연환경에 의하여 새로운 종이 기원한다는 '자연선택설'입니다.
모든 생물은 변하는데, 그 변화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하여 변화한다는 주장입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변화하지 못하면 그 종은 멸종되거나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힘이 세고 강한 동물이라고 지구상에서 살아남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화석에 나타난 것을 보면, 공룡 같은 짐승들이 분명히 있었는데 오늘 날은 그 종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것을 보면 힘이 세고 몸집이 큰 것이라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변화할 때 변화하는 생물체만이 살아남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다윈을 지지하는 진화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관찰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변화할 때 변화하지 못하면 죽은 믿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없이 교회만 다니고 있다고 살아있는 신앙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 세상 현상에 대하여 나름대로 도전을 받으면서 무엇인가 그래도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저 물 흘러가듯, 아무런 의식 없이 고민 없이 믿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항상 도전을 받으면서 자기 변화의 역사가 부단히 이어져 가야합니다. 그 변화란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신앙으로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길러내야 합니다. 너무 고질적이거나, 너무 독선적인 신앙생활은 얼마 못가 스스로 멸종됩니다. 참 신앙인은 화석화된 인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에 다니는 장로님과 집사님 집에 앵무새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각각 가정에 심방 갈 때마다 앵무새는 그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했습니다. 장로님 집에 가니 앵무새가 말합니다. "우리 다함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다 함께 예배드립시다."
역시 장로님의 가정이라 다르구나 생각하면서 목사님이 이번에는 집사님 집으로 심방을 갔습니다. 그 집사님 가정에 앵무새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우리 다함께 고스톱 칩시다." 목사님 앞에서 앵무새가 그렇게 말하니 집사님은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목사님께 부탁해서 앵무새를 장로님 집에 갖다 놓으면 신앙 훈련이 될 것 같아 몇 일만 맡길 수 있도록 부탁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주가 되어 그 앵무새를 찾아왔습니다. 장로님 앵무새처럼 집사님 앵무새가 말합니다. "우리 다함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다 함께 예배드립시다."
집사님은 자신의 앵무새가 신앙훈련을 잘 받을 것을 알고 좋아했습니다. 목사님이 또 다시 방문했습니다. 앵무새가 하는 말 "우리 다함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다 함께 예배드립시다. 그리고 우리 다함께 고스톱 칩시다." 앵무새는 집사님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주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주님을 닮아가게 되고 우리의 인격이 변하여 새로워지게 됩니다. 변화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요, 신앙생활의 방향입니다
예수님의 변모하심 변화산 사건은 그의 공생애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자신의 가장 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결단이었고, 인류에 대한 최대의 사랑 표현을 위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의 구원 사역을 위한 새로운 출발입니다.
앞으로 있을 고난을 최후로 결단하는 시기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복음서의 위치로 볼 때 새로운 의미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획기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변화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없는 높은 산에서 변화하셨다는 데도 큰 의미를 나타냅니다. 오늘의 말씀은 사순절의 시작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 자신의 모습이 변모하는 새로운 체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옷이 희어졌습니다. 세상 사람이 빨아도 그렇게 희어질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했음을 의미하며, 이 상황이 하나님의 준비임을 시사하는 것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이렇게 변화하신 일이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시위적으로 나타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실제적인 일을 위한 내용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모하신 자리에 신앙의 위인 모세와 엘리야가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곳에 예수님, 모세, 엘리야 이 세 사람이 나타나 서로 대화를 하십니다. 그 대화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우리로 하여금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이 때가 어떤 상황이었는가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대화를 적게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때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인류구원의 길을 시작할 때가 이 때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길에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연약함이 발동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룩한 산상에서의 담화를 통해 예수님은 결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리에는 인간의 욕망을 나타내는 제자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기가 좋사오니'란 현실주의적 욕망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결단에 상반된 일이기에 제자들의 요구는 예수님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하는 자리에 서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데 그의 사명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 모세와 엘리야는 적절한 인물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파송된 사람들로서 예수님을 돕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모르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나타났듯이 인간의 연약한 면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모세와 엘리야가 돕기 위하여 찾아 온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가야 할 험난한 길을 바라보면서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산으로 올라갔던 험준한 길처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상상했습니다. 놀라운 자기 변화의 체험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씀도 없이 산을 내려가셨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들려온 말씀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리는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이제까지 있었던 상황과 결단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출발이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대장정에 오릅니다. 지금까지 가셨던 예루살렘행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갖고 출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를 위한 구원의 행렬입니다. 그의 가시는 모습은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돌아오는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갔으나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실 것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데서 예수님은 혼자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고민 속에서 앞을 향해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인간의 연약함을 배제한 가운데 진행됩니다. 위대한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변화산에서 출발을 알리신 순간부터입니다. 변화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장면이 계시적이고 환상적이라는 데서만 아니라 그 내면에 있는 영적인 의미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 지난날의 사역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의 사역을 그야말로 그의 최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인류역사의 최대 기적이 실행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변화산의 사건은 인간적인 면에서도 큰 의미를 나타냅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나타낼 것인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는 예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삶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생활입니다. 그의 구원의 사명을 함께 지고 가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사명을 잊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한순간도 무의미하게 사시지 않았습니다.
나의 개인적 욕망이나 이기주의를 위한 삶의 목적을 포기하고 주님을 향한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주님의 대열에 참여하는 생활이 바로 사순절을 사는 그리그도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참된 변화는 신앙적 결단을 요청합니다.
사순절은 신앙인인 참회와 절제와 선행 등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변화시켜 신앙과 인간적 성숙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회 절기입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사순절의 시작은 재의 수요일에서 시작이 됩니다. 금주 수요일부터입니다.
이 날에 성도들은 이마에 회개하려는 자세로 재를 바르며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깊이 생각합니다. 아울러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죽음에 관해 더욱 많은 묵상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바로잡고자 노력합니다. 진정한 삶의 변화추구입니다.
예수님처럼 나의 가는 길을 알고 그 길을 변함없이 걸어가는 용기와 결단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변화입니다. 신비로운 환상도 중요합니다.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결단이 진정한 변화의 체험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변화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 땅을 힘으로 정복하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기를 앙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은 십자가를 지는 일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힘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기독교가 외형적 변화에 만족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본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즉 내적인 변화와 더불어 삶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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