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저니어링(행20:22-24)
목사 주태근(청년헌신예배)
1961년 4월 12일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인 유리 알렉세예비치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로 명명된 우주선을 타고 1시간 29분 동안 우주의 공간에 떠서 지구를 한바퀴 돌고 지구로 귀환하면서 그는 유명한 두 마디 말을 남겼습니다. 한마디는 “지구는 푸르다”는 것이었고, 또 한마디는 “우주 어디에도 신은 없더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꼭 10년이 지난 1971년 7월 30일 우주의 공간을 가로질러 달에 도착하여 소위 월면차(Moon Buggy)를 이용하여 달 표면을 시속 11km로 9,6km을 주행하고 돌아온 아폴로 15호 우주 비행사 제임스 어윈은 “나는 우주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달을 주행하며 우주 모든 곳에 가득 찬 그분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우주선이 지구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을 때 이 황홀한 작고 아름다운 지구를 바라보며 성경의 유명한 한 구절을 반복하여 묵상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우주여행이 계기가 되어 그는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 온지 얼마 안 되어 복음 전도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1991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전도본부를 두고, 전 세계를 다니며 이 우주 속에 던져진 연약한 인생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선교사로서 살아가는 20년의 여생을 바쳤습니다.
알라스카는 미국의 50개주 가운데 가장 돈이 많은 주입니다. 매년 거주하는 주민에게 돈을 내어줄 만큼 알라스카는 부요한 주입니다. 오래 전 러시아로부터 미국이 알라스카를 사라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미국 의회에서 의원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재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시워드는 의원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눈 덮인 알래스카를 보고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안에 감추어 있는 무한한 보고를 바라보고 사자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입니다.”결국 알라스카는 단돈 720만 달러에 사들여 미합중국에 편입되었습니다. 생각할수록 러시아는 통탄할 일이며 미국은 횡제를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두 사람의 인생을 짤막하게 소개했습니다.
한 사람은 우주 속에서 제2의 인생을 결단하는 게기가 되어 선교인생을 산 사람이요, 다른 한 인생은 비전을 품은자로서 후대에 큰 유익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다 준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가 비저니어링(visioneering) 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비저니어링이란 영어로 비전과 엔지니어링을 합한 합성어입니다. 즉 비전에 대한 공학입니다. 비저니어링은 새로운 용어로서,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앤디 스탠리는 그의 책 『비저니어링』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립니다.
비저니어링은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좇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생각이나 확신이 실체를 갖게 되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날 하늘을 날았던 라이트 형제는 꿈만 꾼 것이 아니라 실현가능한 실제를 파악했으며, 그들은 날수 있다고 믿었고, 날아야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결국, 날게 되었습니다. 비행기 제작사인 보잉회사가 프로펠러 여객기에서 제트 여객기 시대의 비전을 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보잉 747이 개발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저니어링입니다.
비전은 판이한 결과를 낳게 합니다. 비전은 성장을 낳습니다. 큰 강은 처음에 작은 개울에서 시작됩니다. 비전은 작은 개울에서 큰 강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참 나무는 도토리 속에서 잠을 잡니다. 비전은 도토리 속에서 참나무를 그릴 수 있는 꿈입니다.
새들은 알 속에서 기다립니다. 비전은 알 속에서 새가 날아가는 것을 느끼는 환상입니다. 이렇듯 비전은 아직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손에 잡힐 그림입니다. 비전은 ‘이미’ 마음에 실현되고 있는, 미완의 세계입니다. 명확한 비전은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게 해주며, 일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북미 대초원의 인디언들은 어린 나이에 치러야 하는 비전찾기 (vision-seeking)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무더운 오두막에서 혼자 긴 시간을 보내며, 금식하고 기도하는 의식입니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 즉 부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비전 찾기 의식을 통하여 그들은 산꼭대기에 올라 산 너머에 있는 초원을 바라보고 그 초원을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마음에 담습니다. 비전은 꿈이나 야망과는 다릅니다. 즉 꿈은 이루어도 좋고 안 이루어도 그만이지만, 야망은 자기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은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사명이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이란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비저니어링이 필요합니다. 앤디 스탠리는 그의 저서에서 비전을 공식화하여 설명합니다.
“비저니어링은〓영감+확신+행동+결심+완성” 이라고 표현합니다. 영감을 지녔으면 확신을 가지고 도전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결심으로 목적을 완성하는 과정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비전을 현실화 시킵니다. 이것이 비저니어링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도 어느 한 지역에 머무르는 소극적 선교를 하지 않고, 세계의 도심지 로마와, 대륙의 땅 끝 스페인까지 가는 선교를 꿈꾸었기에 거대한 선교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비전의 사람으로서 비전을 현실화시킨 대표적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의 항구도시이며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가깝게 위치한 밀레도에서 바울과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이 마지막으로 만나고 헤어진 일을 전하는 기록의 일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선교사역이 개척선교로서는 성공적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지중해지역의 동쪽에서는 복음이 계속적으로 확산되기 위한 튼튼한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거기서는 이제 다른 사람이 맡아도 잘 할 수 있으리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제 아직 복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다른 지역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국의 수도 로마는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온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출발기지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애초에 로마에 정착하고 거기서 복음전도를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에는 이미 교회가 서있었고 그는 남이 닦은 터전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궁극적인 목표로 삼은 곳은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이 지중해지역의 서쪽 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페인 선교를 위해서 바울은 후원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로마교회가 그의 마지막 스페인선교의 후원자가 되어 주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고자 한 것은 이미 여러 차례였지만 그 동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의 선교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바울이 지중해지역의 동쪽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여길 바로 그 때에, 에베소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바울을 비방하고 배척하는 큰 소요를 일으켜서 바울을 떠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로 향하는 길을 재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이고 성령의 강권하시는 역사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 사도 바울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에 매여 가는 것이라면 가는 길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 좋은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미 성령께서 그것을 예고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겪어온 일들을 돌이켜보면 결국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사람들에게 잡혀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기 위한 길이라는 확신을 성령 자신이 주신 일이었습니다.
23절에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신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내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은 성령의 모순 된 활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모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바울이 자신의 믿음과 소명을 재확인하게 하시고 고난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예루살렘에서의 결박과 환난의 예고를 그 이후 여정 속에서도 반복하셨습니다. 바울 일행이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떠나 두로에 상륙하여 머물 때에 제자들은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눈물로 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하며 뜻을 굽히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이 결국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을 당하게 하였고, 그래서 로마로 가게 했으며, 거기서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피를 뿌리게 했고, 그리하여 온 세계로 복음의 씨앗들이 퍼져나가 놀라운 결실을 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 귀한 것은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의 생명조차도 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심정을 표현한 말이 24절에서 한 말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다메석 길가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비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비전실현을 위해 비전을 확신하면서 도전합니다. 그리고 비전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각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비전의 목표를 달성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비전공학 즉 비저니어링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날 인천 재물포항에 일본 미시시피사의 기선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항구 가까이에 오자 배에 탄 두 미국 젊은이는 갑판에서 한국 땅을 밟기에 가슴 벅차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갑판에서 기도합니다.
"사망의 줄을 끊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죄와 어두움으로 얽혀있는 이 나라 백성들을 의와 빛 가운데로 인도하소서! 이들을 묶고 있는 어두움의 권세를 끊으시고 광명의 나라가되게 하소서!"
이들 중 한 청년은 아펜젤러이고, 또 한 청년은 언더우드입니다. 이들을 한국 땅에 복음을 들고 이 땅을 밟은 개신교 첫 선교사들입니다. 이들이 들어 온지 120년 한국에는 1천만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생겼고, 전국에 2만 5천 교회가 세워졌으며, 전 세계적으로 미국, 영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기적은 120년 전 두 청년의 가슴 속에 있었던 비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두 청년을 통해서 한국 땅에 복음을 심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두 청년의 비전은 한국 땅에 복음을 들고 서는 것이 비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전이 성취되었고, 비전으로 한 나라를 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에 가서 한 평생을 고생하고 있는 저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에게 이렇게 질문을 한 바가 있습니다. "당신은 철학, 신학, 의학, 음악의 4개의 박사 학위를 가진 유명한 학자이기도 한데, 왜 하필이면 아프리카에 가서 그 고생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 참 이상합니다. 사람이 꼭 그렇듯 고생스럽게 살아야만 되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슈바이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를 동정의 눈으로 보지 마시오.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아십니까?" 슈바이처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했습니다.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도전합니다. 그리고 비전의 장소로 나아갑니다. 놀라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계획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비전을 밝히 보여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나를 통해서 일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확신하시고 그 뜻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하신 "라인하르트 본케"목사님은 아프리카 선교사이십니다. 이분은 과거에 고전적인 방식으로 선교하시던 분이였습니다. 각 마을마다 직접 찾아다니시며 "DOOR TO DOOR(문에서 문으로)"를 하면서 전도하여 몇 십 여명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아공 흑인 자치국 레소토에서 기도하실 때 성령께서 환상 중에 아프리카 전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덮이는 것을 보았고 계속 기도할 때마다 그는 더욱더 선명하게 확실하게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때 이 자신의 비전이 대중 집회를 통해서 역사하실 성령님을 느꼈기 때문에 선교국을 통해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반대 했습니다.
200여년전 해오던 방식대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본케 목사님은 그때 "내 주변에는 능력 있는 사람은 많지만 비전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시면서 단독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나이지리아에서 사역할 때 100만 명을 모아 전도집회를 하고, 레스토 공원에서는 50만 명에게 복음을 증거 하여 검은대륙 전도의 페러다임을 깨뜨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비저니어링이란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만 앞세우고 고상한척 하는 어느 부인이 하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시가 빈민화 되어가는 게 정말 문제입니다. 나에게 백만 달러만 있으면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하나 세워주고 싶습니다."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부인의 말에 헨리 스텐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모님보다 훨씬 덜 가지고도 도심의 불쌍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시작한 사람을 저는 여럿 보았습니다. 학교를 시작하는데 백만 달러나 필요한 건 아닐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백만 달러가 아니라, 그 일에 뛰어들 용기였던 것입니다.
인생에게 용기가 없으면, 간절한 소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비전에 모험을 해야 합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에게 모험이란 언제나 필수입니다. 비전을 성취하는 구체적인 일에 도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전하는 자는 분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에게 대가 지불은 언제나 현실에 대한 투자입니다. 성경은 비전에 대한 많은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비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꿈을 꾸었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많은 대가를 지불하였고, 비전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는 꿈을 꿀뿐만 아니라 그 꿈을 구체적으로 이루어 나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고통이었지만 그에게는 기쁨이었고 성경은 이것을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의 고통은 형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비저니어링의 승리입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삼중고에 살던 헬렌 켈러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 앞이 보이지 않는 생활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 때는 그녀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전 없이 생활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비전을 가진 것은 세상에서 이미 얻은 재물이나 명예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것입니다. 비전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특권입니다. 비전을 가지되 비전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비전에 대해 모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전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통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가지고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비전의 영성입니다. 현대심리학에 피그말리언 효과(Pymalion effect)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다룰 때 그 사람의 정도나 수준만큼 다루면 그 정도 이상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아들딸이나 학생을 다룰 경우, 그의 장래성, 잠재력 등을 감안하여 현재의 수준 이상으로 대할 때 그는 자기가 대우받고 기대되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속 큰 비전과 큰 믿음을 가질수록 우리의 수준은 높아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될 것이며, 작은 믿음에서 큰 믿음으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비전은 과거를 회상하여 얻은 지혜(Hindsight)와 현재를 바르게 보고 인식하는 통찰력(Insight), 그리고 미래에 대한 선견지명(Foresight)이 종합된 혜안인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일본 기독교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가가와 도요히꼬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이 군정관으로서 일본에 상륙하기 전에 그를 미주리 전함으로 초청하여 자문을 받을 만큼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저술가요 박애주의자와 사회운동가로 활약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보면 무척 단조롭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믿게 된 기독교의 박애 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뿐입니다. 그는 21세 때 폐결핵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색과 고민에 잠겼는데, 갑자기 그의 머리 속에 들어오는 빛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종말의 상징이 아니라, 새 출발의 표라는 진리였습니다. 이튿날 새벽, 청년 가가와는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빈민굴로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21살의 청년이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중에 그가 깨달은 진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의미 있게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1살의 폐병 환자가 빈민굴에 들어가 피를 토하며 헌신했는데 놀랍게도 72세까지 살면서 많은 저술과 사랑의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사선에서 새 출발하여 새로운 비전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쓴 책이 곧 「사선(死線)을 넘어서」입니다.
청년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비전을 품으시고 비전을 이루어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비저니어링은 남이 만들어 주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나 자신이 결정하며 추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나의 힘으로 어려울 때 우리는 도움 자가 계십니다.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비전을 이루는 추진력을 공급하십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합니다. 낙심한 자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십니다. 비겁한 자에게 담대한 용기를 주십니다. 비저니어링이 되도록 이끄시는 원동력입니다.
주님은 우리들 모두에게 말씀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1:8, 2:17)아멘.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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