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절기(고전1:4-7)
목사 주태근(대림절)
우리의 귀에 익은 3s 시대가 있었습니다. 산업화 시대의 3s는 Standard:표준화, Simple:단순화, Speed:스피드였습니다. 전두환 정권시 새로운 3s 용어가 유행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Sex:성, Screen:영화, Sports:스포츠입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3s는 Sex:성, Stock:주식, Starcraft:스타크래프트입니다. 스타크래프트란 미국의 게임 개발사 블리자드(Blizzard)에서 만들어 낸 게임인데, 우리나라의 게임산업 발전에 엄청난 자극제를 준 게임입니다.
단순히 게임산업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독특한 정보인프라, 즉 PC방 문화를 정착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학가에서 당구장을 밀어내고 당당히 그 자리를 차지한 게임 스타크래프트입니다.
청소년문화와 청년문화가 우리 시대의 흐름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사는 시대는 스피드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문화는 조급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기다림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계에서 ‘빨리빨리’ 문화의 주역은 대한민국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운 한국말이 ‘빨리빨리’였다는 이야기는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이야기입니다. 식당에 가도, 택시를 타도, 세탁소에 옷을 맡겨도, 관람을 해도 ‘빨리빨리’가 습성으로 굳어졌습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을 때도 기다림이 훈련되지 못하다 보니 엎드려 커피가 내려오는 것을 들여다보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예배 문화도 설교가 짧아야 명 설교라고 유모어가 생겼습니다. “설교를 짧게 하는 목사는 복이 있나니 다음에 또 초청을 받을 것이요.”
이 세상은 빨리 문화가 우리를 선도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교회력의 시작은 기다림의 절기부터 시작됩니다. 이 기간을 구세주 예수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는 절기 즉 대림절(待臨節)이라 칭합니다.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로 교회는 새로운 해를 시작합니다.
대강절은 '오는'과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미리 기대하며 준비하는 성탄절 전의 4주간을 말합니다. 또 다른 명칭으로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대강절, 강림절 등이 있습니다.
대강절은 '이 땅에 예수께서 오셨다'라고 하는 과거적 의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총체적 기다림의 절기를 말합니다. 인간은 기다림의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림은 믿음의 실체이고, 신앙인의 힘이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에서 아무것도 바랄 대상이나 기다릴 대상이 없다면 삶의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노예는 해방의 날을 기다리고, 환자는 건강이 회복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목마른 자는 마실 물을, 굶주린 자는 먹을 양식을 갈망합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의인은 정의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거짓된 사회에서 손해만 보는 진실한 사람은 정직이 통하는 사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서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갑자기 급성장한 교회입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였기에 빨리 성장한 만큼이나 문제도 많았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들의 문제에 대하여 직, 간접적으로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로부터 문제 해결을 위한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 대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로 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선 그들에 대하여 감사했습니다.
감사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들의 신앙의 성숙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믿음이 정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림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재림 신앙은 바른 신앙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거룩한 교제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거룩한 교제는 바로 예배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특히 예수님의 기다림에 대한 감사를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교회는 기다림의 공동체입니다. 성도는 기다리는 순례자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심이라”(7절)라고 기록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도들의 기다림은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초림을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이것은 구약 전체에 흐르는 중심 사상입니다.
아브라함 이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가 오실 것에 대한 기다림은 출애굽 시대와 왕국 시대를 거쳐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줄기차게 흐르는 사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의 희망으로 모진 세파를 이기며 살았고, 또한 승리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성도들의 마음속에 임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도“하나님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성도들의 마음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천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현재의 형편이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리고 큰 희망으로 오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마음속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성도들의 생애가 끝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맞이하게 되는 천국을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의 셋째 차원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림입니다.
성도들은 저 하늘에 이상한 구름만 떠도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가 하여 흥분하며 기다립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내가 다시 올 것이라”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부터 지금까지 주님의 재림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다림의 공동체요, 성도들은 기다림의 순례자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반드시 기도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기다림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회개하면서 기다리는 일입니다.
누구나 귀한 손님을 기다리면 집을 청소하고 곱게 단장하고 특히 손님이 머물 곳에는 도배도 다시 하고 필요한 것을 점검하듯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스스로를 깨끗이 회개하여 단장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지난 날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지은 잘못과 사람에게 잘못된 허물과 또한 자기 자신의 나쁜 버릇, 습관, 나태함, 지나친 욕심의 생활을 깊이 반성하고 이를 철저히 고백하고 고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준비하는 생활은 바른 생활로서의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이것은 정직하고 공의로우며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돕는 경건 생활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함으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고전 1:5-7)라고 말했습니다. 이같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준비하는 생활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건한 생활입니다.
성도는 마땅히 경건한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경건한 생활이란 먼저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적인 능력과 그의 통치와 섭리와 축복하심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흔히들 밖으로 나타나는 종교생활을 경건한 생활이라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나 구제나 금식 같은 것이 종교생활이기는 하나 밖으로 나타나는 현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마땅한 경건생활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 절제와 이웃에 대해 배려하는 생활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다림의 올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기다림의 믿음과 소망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며, 박해와 고난을 극복하여 믿음의 산증인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참된 기다림은 소망으로 승리합니다. 재림신앙은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화란의 신학자 하켄디(Johannes Halkendik) 교수는 독일군을 피하여 산으로 도망가다가 일행과 헤어져 외로이 어느 동굴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죽은 한 유대인 소녀의 메모를 세상에 알린 일이 있습니다. 외롭게 굶주림과 추위에서 죽은 한 소녀의 손에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 속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햇빛을 볼 수 없으나 저 밖에는 분명히 햇빛이 빛나고 있음을 믿는다. 지금 하나님은 말씀이 없으시나 분명히 하나님은 이 동굴 속에도 계심을 나는 믿는다. 지금 나는 가족들과 친구들의 소식을 모르지만 분명히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귀한 고백입니까! 나이 어린 소녀의 마음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기다림의 소망>이 있었기에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힘없고 나약한 한 소녀였지만 천군만마를 지휘하며 호령하던 장군보다도 어쩌면 더 침착하고 용감하게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인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인의 기다림은 세상 사람들의 헛된 꿈을 기다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기독교의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는 기다림의 산 소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다림은 확실하게 보장된 기다림입니다.
옛날 주나라에 강여상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뛰어난 재주와 지혜를 가졌지만 삶의 기회를 얻지 못해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위하라는 지역에서 80이 넘도록 낚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나라 문왕이 사냥을 가다가 이 위하를 지나게 됐습니다.
한 눈에 강여상이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아본 문왕이 저를 등용하게 됐고, 결국 강여상은 나라를 크게 발전시키는 공로자가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문왕의 아들 무왕 때 이 강여상의 도움으로 은나라 주왕을 타도하고 천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공이라는 작위를 하사해서 강태공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강태공이 이 위하에서 80이 넘도록 낚시를 할 때 때로는 낚시에 바늘도 달지 않고 그냥 낚시 대만 물에 담가 놓고 깊은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태공은 세월을 낚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강태공은 낚시하며 긴 세월을 기다리다가 끝내 기회를 잡았고 출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에 실패해서 인생에 실패합니다.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인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후 2천 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맞이할 준비함이 중요합니다. 준비하는 삶은 회개하는 삶입니다.
준비하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실실하심에 기초한 믿음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같이 오늘 우리의 세대에는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우리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 외부의 사회적 여러 가지 문제보다 교회 내부의 문제가 더욱 심각합니다.
교인이 우리들이 먼저 바로 서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철저한 회개운동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축복하시며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해 내실 것입니다. 기다림 이것은 축복이요 미래의 성취입니다.
미국의 국무장관을 지내신 어떤 분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집례 목사님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내용의 본문을 읽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이다”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목사님은 세례 받는 학생들에게“이 시간 여러분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다”라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박힌 못과 같이 가슴에 깊이 새기고 살아간 학생이 나중에 성장하여 후에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었습니다. 그 장관이 바로 콜린 파월 장관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기다림이며 기다림은 축복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디도2:11-13) 아멘.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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