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같은 조력자(출7:1-7)
목사 주태근(남선교회헌신)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발 8,848 미터나 된다니 얼마나 높은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산악인들이 이 산을 정복하려고 시도했지만 숱하게 실패했습니다.
고산소증에다가 살과 뼈를 에이게 하는 악천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지금까지 약 120여 산악인들의 시신이 에베레스트 산 어딘가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베레스트 산을 세계 최초로 등정한 사람은 뉴질랜드인 에드문드 힐레리(Edmund Hillary, 1919-)였습니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인 에베레스트가 인간에 의하여 정복된 것입니다.
그 때까지 수십 년 간에 걸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산악인들이 모두 일곱 차례나 실패한 뒤에 이룬 쾌거였기 때문에 온 세상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 날 에베레스트 정상에 첫발을 내딛은 사람은 힐레리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힐레리만 기억할 뿐 이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합니다.
셰르파(Sherpa), 즉 전문 산악인의 여러 물건들을 운반하는 짐꾼(porter)으로서 네팔 원주민이었던 텐징 노르게이(Tenzing Norgay, 1914-1986)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산을 아는 사람들은 노르게이가 없었더라면 힐레리가 도저히 에베레스트 산을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노르게이는 무엇보다도 네팔 현지인으로서 에베레스트 산의 지리나 기후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노르게이의 도움으로 힐레리 경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람으로서 텐징 노르게이가 훨씬 더 주목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에드문드 힐레리라는 이름에는 익숙하지만 텐징 노르게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합니다.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이와 같이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서도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마치 TV 드라마나 영화에 있어서 주인공보다 조연이나 이름 없는 엑스트라들이 더 큰 역할을 하듯이 꼭 1인자만이 아니라 2인자나 3인자가 사실은 더 큰 공헌을 한 예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모세의 형인 아론을 조명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아론은 언제나 모세의 형이자 대변인으로서 기억이 됩니다. 사실 아론은 대제사장의 원조로서 굉장히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모든 제사장들은 반드시 아론의 후손들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론은 동생인 모세와 떼어놓고서는 생각될 수 없습니다. 마치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로서 기억이 되고, 찰스 웨슬리(1707-1788)가 요한 웨슬리(1703-1791)의 동생으로서 기억이 되듯이 아론은 언제나 모세의 형으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안드레나 찰스 웨슬리의 경우 모두 동생들이니 괜찮다고 하겠지만 아론은 모세의 형입니다. 형이 동생보다 못하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아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동생인 모세의 후광에 가려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론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정신은 무엇일까? 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먼저, 동생 모세를 더 높이는 2등 정신, 즉 겸손함입니다.
사람들은 단체로 찍은 사진을 볼 때 제일 먼저 자기 얼굴부터 찾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얼굴이 잘 나왔으면 그 단체 사진은 잘된 것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얼굴이 조금 찡그려진 상태에서 사진이 찍혔다든지 해서 자기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 사진은 잘못된 것이라고 푸념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모든 인간 속에 나르시시즘, 즉 자기 중심적인 속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사회가 왜 시끄럽습니까? 다 높아지고 다 1등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 주인공만 되려고 하지 조연이나 엑스트라로서 만족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입니다. 본문 7절 말씀에 보면 출애굽이 일어날 때 모세가 80세요 아론은 83세였습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3살이나 많은 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언제나 모세의 이름이 아론보다 앞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아론과 모세'라고 되어 있지 않고, '모세와 아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아론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1절의 말씀 그대로 아론은 모세의 대언자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말주변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왕 앞에서 10가지 기적을 보일 때에도 아론은 모세의 의중을 대신 전달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실질적인 주역은 언제나 모세였습니다. 아론은 들러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론은 여기에 대해서 한 번도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습니다. 비록 자기가 형이었지만 형이 동생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론은 2등 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주연보다 조연으로 만족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2등 정신이 가장 아름답게 나타난 사건은 출 17: 8-1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르비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 군대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산 밑에서 전쟁을 하고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높이 들면 이스라엘이 이겼고 힘이 빠져서 손이 내려오면 전쟁에 졌습니다.
이 광경을 쳐다본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와 모세를 앉게 하고서는 양쪽에 서서 모세의 팔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그 결과 모세의 팔은 해가 질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고 결국 이스라엘이 기적적인 승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론이 동생인 모세의 한쪽 팔을 붙들어 주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아론의 2등 정신, 조연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바울 선생은 빌 2: 5-8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외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가져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도 낮아져야 할 것입니다.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모두다 1등이 되려고 하기보다 2등이 되고, 다 주연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조연이 되려는 아름다운 양보 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론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론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기에 약점이 있었습니다. 실수를 할 줄 알았습니다. 출 32장 말씀을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는 동안 아론은 산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리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모세가 산에서 좀체 내려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내려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내려오지 않게 되자 군중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세는 물론이고 하나님마저도 포기하고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위기 한가운데에서 아론은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설득해서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도록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인내심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론은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에 그의 믿음마저도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에게 금고리들을 자기 앞에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금붙이들을 다 녹여서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금송아지 앞에다 제단을 쌓고 흥청거리며 뛰어 놀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우상숭배 놀음을 했던 것입니다. 아론은 위기관리를 잘하지 못한 무능한 지도자였습니다.
백성들의 동요를 막는다고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가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우리 속담 그대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될 정도로 상황을 악화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즉각 아시고 모세를 산 아래로 내려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어처구니없는 축제를 벌이고 있는 현장을 목도했을 때 모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글자를 새겨주신 십계명 돌판 두 개를 산 아래로 던져 깨버렸습니다.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금 수송아지를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되게 하고 그것을 물에 타서 마시게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출 32: 21-25에서 모세가 아론을 다그치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아론이 도대체 백성들에게 어떻게 했기에 이 백성들이 이렇게 큰 죄를 저지르게 되었느냐고 따집니다. 모세는 이 엄청난 죄악이 아론 때문에 일어났다고 매섭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 때 아론은 모세를 "내 주여"라고 부릅니다. 비록 혈육으로는 형제간이었지만 자신이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절감하고서는 이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자기는 동생인 모세의 종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아론은 모세에게 세 가지 변명을 합니다. 첫째로, 이 백성들이 얼마나 악한지 잘 알지 않으십니까? 둘째로, 백성들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모세는 산에 올라가 감감 무소식이니 이제 자기들을 인도해 줄 신을 만들어 내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셋째로, 결국 이들의 요구를 묵살할 수 없어서 금붙이를 다 자기 앞으로 가지고 오라고 해서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수송아지 형상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아론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 잘못을 궁색하게 변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명들은 모세가 없는 현장에서 아론이 지도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이 정도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겨우 이 정도 밖에 되지 못한다는 한계와 무능함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지도자이지만 자기 동생이기도 한 모세에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론의 변명이 끝난 바로 그 다음에 출 32: 25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모세는 아론의 말을 듣고서는 결국 아론의 지도력 부재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론은 자신이 유능하고 분별력 있는 지도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에게 사실 그대로를 고백하고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솔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다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론은 자기 자신은 도저히 모세와 같이 출중한 지도자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인정했던 사람입니다.
아론은 약점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같은 레위 지파라고 할지라도 오직 아론의 직계 후손들만이 제사장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아론은 연약한 사람이며 실수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아론을 버리지 않으시고 아론 자신뿐만 아니라 아론의 모든 후손들이 대를 이어서 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이와 같은 영광과 축복을 대대손손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동생인 모세를 이스라엘의 참 지도자로서 귀히 여기며 1등이 아닌 2등,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1등과 주연은 오직 한 사람, 모세가 되게 했고, 자신은 2등이나 조연으로 족하다고 생각했고 행동했기 때문에 이런 축복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나 교회 안에도 아론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지도자의 그늘 뒤에 숨어서 지도자를 돕는 조력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헤아려서 겸손하게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서로 돕고 협력하며 살아갑니다. 돈과 건강 그리고 명예와 권력 이 모든 것이 넉넉하게 있다고 해서 혼자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도 부부가 동역이 잘 이루어져야 행복합니다. 부모와 자녀들과도 동역이 잘 이루어져야 가족이 행복합니다.
가정뿐만 아니라 직장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사와 직원과의 관계도 서로 동역을 잘 이룰 때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않고 분열을 하게 되면 서로 망하고 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와 성도간의 동역이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부흥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선교회의 역할은 조력자의 역할입니다. 목회자를 돕는 일입니다. 목회자의 협력자입니다. 목회가 잘 되도록 동역하는 사람들입니다.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함께 일하는 사역자들입니다. 2인자 이지만 숨겨진 1인자들입니다. 오늘 헌신하는 남선교회 회원들과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빌2: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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