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및 기념 예배 설교

교회에서의 여성사역(눅8:1-3)

주 바나바 2023. 7. 20. 10:06

교회에서의 여성사역(8:1-3)

 

베들레헴 예수 탄생 기념교회

목사 : 주태근(총회여전도회주일)

 

어느 신혼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신랑이 찐 감자를 소금에 찍어서 먹었습니다. 신부가 그런 모습을 보고 눈을 찡그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이 무식해." "무식하기는?" "무슨 감자를 그렇게 무식하게 먹어요? 소금에다 감자를 푹 찍다니" 신랑이 말합니다. "그것이 뭐가 잘못이야? 뭐가 무식한 일이냐고? 난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먹어 왔는데"

 

"그러니까 당신 집은 무식한 거예요. 보세요! 시어머니 하시는 일들이 다 그렇고 시누이들 하는 일들 보면 하나같이 무식하잖아요?" "보자보자 하니까? 별 말을 다하네. 감자 먹으면서 시어머니, 시누이 얘기는 왜 나오는 거야? 그래 그렇다면 당신 집에서는 감자를 어떻게 먹는데?"

 

"우리 집에서는 설탕에 찍어 먹죠. 사람이 좀 고급스러워 보라고요." "뭐야? 소금에 찍어 먹으면 무식하고 설탕에 찍어 먹으면 유식하다는 거야? 나 참 별 소릴 다 듣겠네. 그렇게 설익은 집안이니까 문제가 많지?" "우리 집이 설익었다고요? 그 말 사실이에요?"

 

"장인 영감님을 보라고.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사시니까 명예퇴직이나 당하시구!" "정말 당신 말 다했어? 뭐라고?" 찐 감자 먹다가 별것도 아닌 일로 부부간에 대판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부부가 목사님에게 갔습니다. 목사님은 아무 충고도 못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 역시 찐 감자를 먹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찐 감자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화성에서 온 분이 여자라면, 금성에서 온 분은 남성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입니다. 남녀의 차이와 서로의 생각과 이해의 차이는 관계를 어렵게 만듭니다.

 

얼마 전 우리사회에왕의 남자라는 제목의 영화가 인기였습니다. 여러 가지 인기몰이의 요인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현대인에게 관심이 많은 크로스 섹슈얼’(Cross-sexual)을 정밀하게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크로스 섹슈얼이란 외모를 여성처럼 꾸미는 남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배우 이준기가 요즈음 인기가 많다는 것입니다. ‘위버 섹슈얼’(Uber sexual)도 흥미를 가집니다. 자신감과 지도력과 정렬과 너그러움이란 남성상을 갖추고, 여성경멸과 문화적 소양 결핍 등 보통 남자의 약점을 극복한 남자를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배우 다니엘 헤니입니다.

 

메트로 섹슈얼’(metro sexual)이란 말도 있습니다. 외모 꾸미기와 여가 생활에 많은 돈을 쓰는 도시 남자를 말하는데 배우 권상우와 같은 인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점점 남성은 여성화되고, 여성은 남성화되는 시대적 추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루밍 샵’(Grooming Shop)이 많아진다고 말합니다. ‘그루밍이란 마부가 말을 관리한다는 말인데 자기 관리가 극대화되고 따라서 '남성전용미용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 정리하는 데는 10, 밥 먹는 데는 10, 세수하고 화장하는 데 2시간 걸리는 남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성은 점점 남성화 되어 갑니다. 현대남성은 여성이지만 개성이 뚜렷한 여성을 좋아합니다. 확실한 직업을 가진 여성을 선호합니다. 나아가서 근육질의 여성을 흠모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남자강한 여자가 인정받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어느 기획사에서 우리 시대 남녀의 조용한 혁명이란 보고서를 냈습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젊은 남녀 절반 이상이 양성성(兩性性)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남녀의 벽이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남성의 66.7%, 여성의 57.3%양성형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남자가 여자처럼, 여자가 남자처럼 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요즘 젊은 남성들은 여성적 외모를 적극적으로 가꾸는 데 관심을 가집니다. 여성들은 자의식과 리더십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성이 지닌 강점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이 경제적 능력이 있으면 남성이 가정에서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시사 문제를 많이 아는 여성이 매력이 있다고 봅니다. 여성 대통령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가냘픈 몸매보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를 선호합니다. 여자도 가급적 힘이 센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여성이 큰 차를 운전하는 것이 멋있다고 표현합니다. 남녀 구분 없이 돈 있는 사람이 데이트 비용을 냅니다. 과거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포스트 모던 시대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말합니다.

 

윌리엄 보더스의 “Handyman of the Lord”(주님의 사환)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흑인 남자가 미국 남부의 어느 한 저택의 벨을 눌렀습니다. 배가 고파 밥을 좀 얻어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집에서 나온 주인은 뒷문으로 와보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흑인은 이 말을 들었고 뒷문으로 가서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저택의 주인 남자가 뒷문에 나타나서 우선 식사 기도부터 하시오. , 따라해 보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굶주린 그가 따라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틀렸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나 흑인 남자는 완강히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라고 따라 하였습니다. 집주인은 흑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어째서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라고 하는가?” 흑인 남자는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우리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당신과 나는 형제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빵 한 조각을 주겠다고 형제를 뒷문으로 오라고 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동일한 분일 리가 없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이런 불평등의 사고는 기독교인에게도 피치 못하는 부분입니다.

 

인종에 대한, 여성에 대한, 물질에 대한 불평등은 인간 사회에 팽배한 인간의 장벽입니다. 기독교는 평등의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에는 평등사상이 있습니다. 어느 사회에나 기독교가 들어가면 개화되고, 개혁되고, 민주화되고, 사회가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까지도 기독교계에서 여성을 폄하하여 교단적, 교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정서적 편견을 마치 성경적인양 해석하여 또 다른 비신앙을 자아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여러분은 몬테소리학원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1907년에 노동자 자녀를 위한 유치원과 어린이 집을 개원하여 몬테소리 방식의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몬테소리는 나는 여자 의사가 아니다. 나는 단지 의사이고 공교롭게도 여자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유독 여자만 자를 붙입니다. ‘여의사’, ‘여군’, 심지어 교회에서도 여목사’, ‘여장로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용어나 생각이 평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가정에서부터 남편과 아내가 평등을 실천해야 합니다.

 

미래사회는 남녀의 차별이 극소화 될 것입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 될 것입니다. 전업주부가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직업여성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여성의 커리어가 중요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온 여성이 알아야 할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습니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시집을 가면 지아비에게 순종을 하며, 지아비가 죽으면 자식의 뜻을 좇아야 한다입니다. 그러나 새시대에 신 삼종지도생겼습니다. “어려선 아비와 어미의 뜻을 함께 따르고, 시집가면 지아비를 가르쳐서 평등한 가정을 만들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에 연연하지 말며 나의 길을 간다.”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남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성들의 편견이 이것을 잘못 이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당시와 같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을 세운다는 것은 효율적이 못됩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이 전해도 듣지 않고, 남자가 가도 받아주지 않을 때입니다. 이런 때에 왜 여자를 세우고 효과 없는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에는 요안나란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에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이 왕실의 고위관리인 헤롯의 청지기 구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 마지막 부분에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준 예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 이 왕의 신하가 구사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그의 아내가 너무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서 왕궁에서 실직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구사가 일찍 세상을 떠나 요안나가 예수님의 여 제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선교사역에 필요한 돈궤에 재정을 채우는 일을 요안나와 여인들이 하였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지에 먼저 가서 준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여인들은 드러나지 않고 숨어서 물질로 봉사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이 여인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서부터 십자가까지 따른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숨은 제자라고 하는 니고데모는 밤에 찾아왔지만 요안나는 낮에 찾아와서 따른 떳떳한 제자였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에게서 도망갔지만 이 여인은 십자가와 부활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보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도 신분이 높은 쪽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실제로 따지고 보면 여성들은 음지에 살았지만, 여제자들은 오히려 양지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여제자들은 참 강했습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복제 동물들은 모두 암컷입니다. 체세포에 전기자극을 하면 혹독한 시련을 당합니다. 여기에서 생존력이 강한 여세포만 착상이 됩니다. 남자가 강한 것 같지만 사실은 여성이 훨씬 강합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강합니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도 남자는 72.9세를 살지만 여자는 80세를 삽니다. 교회에서의 여성은 강합니다. 여성들이 없는 교회의 일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16장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26명에게 문안을 보냅니다. 그 가운데 여성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율리아, 올름바가 다 여성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동역자라고 말하고, 수고 많이 한 자라고 칭찬합니다. 바울의 사역에 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여성들입니다.

 

구약성경 첫 번 책인 창세기에 여성을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남녀 모두 연합하여 함 몸이 되는 섭리가 인간창조의 결과입니다. 남녀가 서로를 동역자로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남성 여성 차별 없이 우리는 다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성들의 교회에서의 사역과 역할 대단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안이숙 여사가 부군 김동명 목사와 목회를 하는 중에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도 작고 다들 가난해서 최선을 다하여 건축헌금을 작정하였지만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그러자 여선교회에서 김치를 만들어 팔아서 5만 불을 헌금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김치를 만들어 팔아서 헌금을 모으는 중에 여선교회 회장이 위암으로 얼마 못 살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여선교회 회장은 사형선고를 받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가 자기와 가족만을 위하여 살았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은 삶을 교회와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로 결심을 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열심히 김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회원들도 열심을 내어 휴가를 얻어 그 일을 돕게 되고 온 선교회원이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여선 교회가 약속한 5만 불이 달성되어 하나님께 봉헌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선교회원들과 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자축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여선교회 회장이 위암으로 그 동안 제대로 음식을 못 먹고 조금만 먹어도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회장이 그 날 차려진 음식을 너무도 맛있게 많이 먹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던 안이숙 여사가 회장님! 그렇게 잡수셔도 괜찮아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다 놀라서 여선교회 회장을 쳐다보았고 음식을 집어먹던 여선교회 회장 자신도 너무도 놀랐습니다. 조금만 먹어도 고통스럽던 속이 아무리 먹어도 괜찮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치료의 역사를 이루어 위장이 전처럼 회복되는 기적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선한 결단을 하고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 건축을 위하여 생명 걸고 헌신하다보니 하나님이 치료해주시고 교회에 은혜가 넘치는 사건이 되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유명할 설교가 스펄젼 목사는 경건한 여성은 남편에게 사라가 되고, 동료들에게 마르다가 되며, 주의 말씀에는 마리아가 되는 여성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남편을 위하여 위로하고 헌신하는데 앞장섰습니다. 마르다는 손이 부지런하여 대접하기를 기뻐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열정적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여성들의 사역이 중요합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주님 안에서 동등한 하나님 나라의 역군들입니다. 성경은 현대 여성들에 말씀합니다.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14: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