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가 살아야(롬12:1-2)
목사 주태근
매력적인 외모로 허영심이 많았던 젊은 루와젤 부인은 어느 날 문부성 장관의 저택에서 예정된 화려한 무도회에 초대받고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가난했던 그녀는 무도회에 알맞은 의상과 장식품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웃의 부자 프리스티에 부인에게서 진주 목걸이를 빌려 그 파티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파티가 끝난 뒤 그녀는 빌려온 목걸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대경실색했습니다.
루와젤 부인은 목걸이 분실 사실을 비밀에 붙인 채 3만 6천 프랑을 주고 잃은 것과 똑같은 목걸이를 사다가 프리스티에 부인에게 돌려줬습니다. 물론 그 돈은 여러 사람들에게서 급히 빌린 거였습니다. 그 후 긴 세월동안 그녀는 빌린 돈을 갚아 가느라고 남편과 함께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녀의 40대 용모는 60대처럼 늙었고 손도 몹시 거칠어졌습니다. 빚을 다 갚고 난 어느 날 공원에서 우연히 프리스티에 부인을 만났습니다. ‘왜 그렇게 늙어 보이느냐’는 질문에 지난날의 고생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때 그 목걸이는 모조품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짜 목걸이를 위해 이십여 년을 허비했습니다. 갚지 않아도 될 3만 6천 프랑의 돈을 위해 그 부부의 젊음이 허송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모파상의 유명한 단편소설 ‘진주 목걸이’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중에 ‘허송세월’ 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낼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예배의 횟수가 보통이 아닙니다. 매주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한번도 빠지지 않는 다면 1년에 53번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거기에 주일오후예배와 수요기도회를 빠짐없이 드렸다면 1년 중 1백59회의 예배를 드린 것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예배를 드렸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예배에 성공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분이 우리 인생을 70 년으로 놓고 재미있는 계산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인생을 70년으로 볼 때 20년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보내고, 20년은 잠자면서 보내고, 6년은 먹고 마시면서 보내고, 7년은 쉬면서 즐기면서 보내고, 3년은 다른 사람을 기다리다가 보내고, 또 1년은 전화통 붙들고 보낸다는 것입니다. 참 그럴 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보내는 시간을 1년 반 정도로 잡았습니다. 70년 중에서 1년 반이라고 하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년 반을 채우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1년 반을 채우기 위해서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적어도 5분 이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해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적어도 5분 이상 하루를 잘 보내게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매 주일 예배와 수요 예배에 나와 적어도 3시간 정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70년 중에 1년 반이나마 예배하는 시간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과연 어떻습니까? 조금만 마음을 다른 데로 돌려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조차 못 갖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1 주일에 3 시간조차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70 평생 동안 1년 반 조차 제대로 예배드리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아니 천국에 잘 들어갈 수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웨렌 위어스비]목사님이 노년에 은퇴한 후에 쓴 책이 있습니다.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그는 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그동안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섰지, 예배하기 위해서 서지 않았다. 다시 내가 목회한다면 설교자가 되기보다 먼저 예배자가 되겠다.”
그가 또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사역, 즉 선교라든지 봉사라든지 가르치는 일이라든지 모든 사역은 예배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역일 경우에만 비로소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영적 예배와 상관없이 그런 사역을 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배에 성공해야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 평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한참 눈을 감고 회상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하던 어떤 주일이었죠. 그때 나는 졸병이었지만 아침에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린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처럼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이여야 합니다.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순간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순간입니다. 예배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최고의 행복이요, 가치요,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배의 성공자가 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혹시 오늘도 힘겹게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은 없으신지요? 아니면 습관적으로 참석한 예배는 아니신지요?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성공이 신앙생활의 성공을 가져오고 모든 삶의 성공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신앙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분은 신앙생활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실패하면 신앙생활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에 성공하는 분은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인생살이에서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인 힘과 능력으로만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통하여 힘과 능력과 권세의 원천이시며 우리에게 항상 이것을 공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예배를 통하여 이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공급받으면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지기 때문에 결국은 세상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 예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배가 살아야합니다. 예배도 죽은 예배가 있고 산예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산제사"는 구약시대에 짐승을 잡아 드린 죽은 제사와 대비 되는 말로 우리의 몸과 삶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산제사"란 죄로 죽었던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으니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가장 즐겁게 해드리는 길이 제물을 바치는 길이었습니다. 동물들의 몸을 죽여 희생제물을 드림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구약에서는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서 그 피로 제사하는 희생인데 이것은 죽은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산제사"를 드리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산제사’는 ‘산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산제물’은 우리들 자신을 말합니다. 살았다는 것은 먼저 ‘구원받아 새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죽은 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이 됨으로 우리는 ‘산몸’이 되었습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4세기 중엽인 347년에 안디옥에서 출생했고,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를 지냈고, 안디옥의 설교자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설교를 잘했고 웅변을 잘했는지 기록에 "황금의 입"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크리소스톰이 오늘 본문의 로마서 12장 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 여러분은, 눈이 나쁜 것을 보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눈은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혀로 하여금 누추한 말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악한 말을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혀가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손이 무법한 일을 못하게 하고 여러분을 향해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축복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산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의 구원의 결과’ 입니다. 이젠 이 ‘산몸’을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일이 남았습니다. ‘산제물’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받을 수 있는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일입니다.
물론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정리된 생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지적인 응답은 필수입니다. 마음으로의 감사 역시 필수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몸을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전인적인 헌신입니다.
지, 정, 의 전체를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쓰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배함으로 하나님께 열납 되는 ‘영적 예배’가 이루어집니다. 예배에 성공하는 축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 모두는 제사장입니다.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구약의 제사장의 직분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이 진리를 베드로전서 2:5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도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상이 될지니라."
종교개혁자 루터는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만인 제사장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 앉아계신 성도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려야 할 제사장들입니다.
신약시대의 제사장이 하는 일은 구약의 제사장들처럼 동물을 죽여서 피를 뿌려 제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각기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의 구체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행위입니다. 경건의 실천입니다. 삶을 통한 예배의 삶입니다.
세계 최고의 3대 성악가 하면,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래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호세 카레라스는 신앙의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1987년 7월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서 촬영하던 도중, 그는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백혈병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생각하며 히스기야 왕처럼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면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노래하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살려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치료를 받으며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백혈병에서 완전히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후 그는 백혈병 재단을 세우고 자신의 공연비의 50%를 떼어 백혈병 환자들에게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몸으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산예배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최상의 가치를 최상의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최상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생명의 삶』이라는 책에 참된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평양 어떤 공장 지하교회 성도들이 기도회를 갖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들에게는 성경이나 찬송가가 없으므로 종이쪽지에 성경구절을 적어서 돌려가며 읽고 입만 벙긋벙긋 벌리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노동당 반장이 뒤에 와서 서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소리 없는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그 반장이 다가와 "동무들, 무엇하고 있는 거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한 대담한 여공 성도가 "우리는 지금 독보회를 하고 있소. 동무도 같이 앉아서 안하시려오?"라고 말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그 반장은 한참 앉아 있다가 "동무들이나 많이 하소"라고 하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순간 이들은 그 반장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들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눈을 뜨고 기도드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생명을 걸고 드리는 성도들의 예배와 비교하여, 우리는 지금 자유롭게 모였으나 죽은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느 것을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산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산제물이 되어 산예배가 되어야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4:23-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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