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날개를 가진 교회(행 2:42-47)
목사 : 주태근
‘두 날개교회의 비유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래전 두 날개를 가진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한 날개는 대그룹의 예배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한 날개는 소그룹 공동체를 위한 날개입니다. 두 날개를 사용해서 교회는 하늘 높이 날아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이르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성취합니다. 그러나 몇 백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두 날개를 가진 교회는 소그룹 날개가 필요한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질투심이 많고 사악한 날개 없는 뱀이 큰 소리로 이 사상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교회에는 그때부터 소그룹 날개가 사용되지 않았고, 점점 약해져서 급기야는 전혀 힘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매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주께서 두 날개를 교회에 주신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존전에까지 비상해서 그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날개만 사용하는 교회는 날려하여도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 머물거나 방향감각을 상실하거나, 난다 해도 이륙지점으로부터 멀리는 날아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측은히 여기신 창조주는 다시 그의 손을 뻗어 교회를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두 날개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창공으로 비상해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오며 지상을 두루 다니며 창조주의 목적과 계획을 충족시키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1984년 ‘로스 엔젤리스’ 여름 올림픽 개최가 결정되었을 때 올림픽준비위원회는 개막식행사를 위한 한 멋진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미국 국가가 연주될 때 올림픽 주경기장 서쪽으로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새인 ‘흰머리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 오른 후 경기장 잔디 아래로 낙하하여 올림픽 오류기가 있는 횃대 위에 사뿐히 내려앉게 하자는 그런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조류학자들과 조련사들이 동원되어 ‘밤비’라는 이름의 독수리를 선정하여 특별히 고안된 훈련을 그동안 시켜 왔습니다.
드디어 연습 비행을 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시도를 하자마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또 한 번 시도합니다. 경기장 서쪽에서부터 ‘밤비’를 놓아주자 잠시 동안은 멋진 곡선을 그리는 가 했더니 이어 새는 중심을 잃고 운동장 한복판으로 급강하하여 땅을 찍고 그만 즉사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나중에 실패원인분석이 있었는데 첫째 이유는, ‘밤비’가 비만했기 때문이었고, 둘째 이유는 날개의 균형이 없었다는 사실의 발견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셀교회를 연구하는 전문가들도 현대교회나 교인들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비상하지 못하는 이유를 같은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첫째, 오늘의 교회가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려는 나머지 그만 비만해 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므로 두 날개의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날개를 잃어버린 현대교회모습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저는 우리교회와 교우들의 건강한 신앙의 미래를 위하여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교회와 여러분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실히 믿습니다.
먼저, 교회에 달린 두 날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셀교회 전문가들은 이 두 날개중 하나는 대그룹 즉 축제로서의 “주일예배모임”을 의미하고, 또 하나의 날개는 “소그룹, 즉 셀모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사상 가장 생동하는 교회였다고 믿어지는 초대교회 즉 사도행전의 교회는 이 두 날개를 사용했던 건강한교회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46절에 보면 초대교인들은 모이는 교회의 열정을 소개합니다. 성전에서 그리고 가정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성전모임과 가정모임 즉 대그룹모임과 소그룹모임”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두 날개입니다.
셀 연구가인 빌 벡햄 박사는 그의 저서인 '제2의 종교개혁'에서 대그룹모임의 유익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소그룹모임의 유익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예배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은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인 반면, 소그룹 모임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은 낮아지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곧 친구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교회에 소그룹날개는 왜 필요합니까?
어떤 분들은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구역예배를 통해 소그룹의 기능을 강조해 오지 않았는가를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어느 정도 구역활동이 그 기능을 감당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구역예배의 기능이 소그룹날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는, 소그룹모임은 대그룹모임과 성격이 다를 때에만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경우 구역예배는 주일 대예배의 축소판이어서 대예배의 보완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소그룹모임이 한 번 더 모이는 모임으로만 존재할 뿐 교회화 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셀교회의 회복이 요청되게 됩니다. 작은 ‘개척교회’도 교회인 것처럼 작은 ‘셀교회’도 역시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셀교회’에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이기에 정식 교회라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 대답의 해답은 이렇습니다. 리더가 곧 ‘목회자’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작은 평신도 목회자’입니다. 오늘날의 셀교회 전문가들과 신학자들은 평신도가 ‘작은 목회자’로 불리 우지 못할 어떤 신학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이 바로 만인 제사장직의 본질입니다. 초대 교회의 저력은 모든 평신도가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성전에서 뿐 아니라, 집에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와 빌립집사가 그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교회는 한 날개를 잃어 버렸습니까? 역사적으로 콘스탄틴 대제가 서기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부터의 일입니다.
교회는 집에서 모이는 모임대신 성전에서 모였고, 평신도 목자의 역할대신 안수 받은 성직자의 역할이 강조되었습니다. 주중모임대신 주일모임만으로 대체되었고, 교제의 모임은 상실된 채 예배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교회구조는 이제 ‘가라’의 구조가 아닌, ‘오라’의 구조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탄과 더불어 싸우는 교회가 아닌 방어적 교회로 만족한 것입니다. 그 결과 무력한 구경꾼 평신도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들은 모든 거룩한 일은 목사에게 위임하고, 평신도들은 이름만 가진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만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퇴보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42절,46절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집에서 성찬이 이루어지고, 찬양과 말씀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47절에 보면 구원의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전체가 모이는 주일교회의 날개와 흩어져서 모이는 셀교회 날개가 균형을 이룹니다.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입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두 날개는 우리에게 어떤 비상을 약속합니까?
만일 우리 모두가 두 날개 교회의 지체가 되어 하늘을 나르기 시작한다면 세 가지의 중대한 변화가 반드시 삶의 자리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첫째, 모든 곳이 사역의 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의 장이 교회당 안에서 뿐 아닌 우리가 있는 모든 곳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둘째, 모든 날이 사역의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일만이 아닌 모든 날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것입니다. 셋째, 모든 신자가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소위 신학교 나온 목회자만이 아닌 모든 평신도들이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제2의 종교개혁입니다.
소그룹 즉 셀교회운동은 단순히 ‘셀모임’을 강조한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의 사역에 대한 기존 생각의 틀을 바꿀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사제의 손에만 있던 성경을 평신도의 손에 돌려준 사건이었다면, 제2의 종교개혁은 목회자의 손에만 있던 사역을 평신도의 손에 되돌려 주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지도자 무용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바로 모든 신자들이 이런 사역을 감당하도록 가르치고 훈련하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야말로 교회는 두 날개를 펼쳐야 합니다.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 이것이 우리교회의 비전입니다.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 친구들이 선물을 줄 때 리스트에 들어 간 유명한 책입니다. 책의 줄거리가 이렇습니다. 주인공 조나단은 남다른 꿈을 꾸는 갈매기입니다. 먹고 살기에 바쁘고 배만 부르면 만족하는 여느 갈매기와는 달리 좀 더 높이 멀리 날고자하는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애를 씁니다.
조나단의 그러한 모습은 동료는 물론 가족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나단은 조롱거리가 되고 마침내는 그들의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비난이나 왕따도 조나단의 꿈을 꺾을 수 없었었습니다. 모든 역경을 딛고 조나단은 마침내 눈부신 비행에 성공하여 여느 갈매기도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게 됩니다. “가장 멀리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꿈이 있는 교회가 꿈대로 되는 축복을 맞이합니다. 한국 교회가 특별히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 부분입니다. 사역자를 세우는 리더십은 제자를 세우는 비전입니다. 평신도를 양육하고 훈련하여 사역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즉 소그룹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이 필요하며,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소그룹 즉 셀’이 그 힘과 지도력이 나타나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중국 대나무 이야기에서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대나무는 종자를 심고 몇 년이 지나도 순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1년 또 1년, 그렇게 해서 몇 년 세월을 공들여도 좀처럼 움이 트지 않습니다. 씨를 심어 놓은 사람을 애타게 만듭니다. 그러다가 심은 지 5년째가 되는 해에 비로소 순이 돋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순이 나온 날로부터 한 달 반이란 짧은 시간에 대나무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경이적인 성장입니다.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정말 힘차게 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대나무를 키우는 데는 과연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했을까? 순이 돋고 나서부터 크기 시작했으니까 한 달 반 만에 이만큼 성장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5, 6년 전에 심고 기다린 결과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나무가 성장하는 이치나 교회가 성장하는 이치가 이와 같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오늘을 열심히 투자하면, 그러면서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파면서 내실을 키운다면 지나간 해의 실패나 고통은 결코 짐이 될 수 없습니다. 일단 꽃을 피우면 대단히 큰 봉우리를 터트리게 됩니다. 우리교회의 비전성취는 당장의 열매보다는 건강하게 성장케 하는 뿌리에 관심을 둡니다. 그 뿌리는 교회의 두 날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셀그룹은 교회가 회복해야 할 소그룹 날개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대그룹 교회와 동등한 한쪽 날개인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날마다 소그룹으로 모여 교제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었으며, 소그룹을 통해 3000명, 5000명, 수만 명이 회심해 돌아오는 놀라운 열매를 얻었습니다. 두 날개의 축복입니다.
마약, 부패, 살인, 게릴라 전투로 알려진 나라인 남미 콜롬비아 보고타에있는 ICM선교교회(International Charismatic Mission Church)가 있습니다. 이 교회의 지도자는 쎄자르 카스텔라노스 목사인데 이 교회의 이야기가 "G12 이야기"로 번역 되었습니다. 1990년에 시작하던 셀그룹이 70개였는데 8년 만에 24,000개로 늘어났습니다. 하나의 셀이 10명으로 추산하면 24만 명 이상이나 됩니다. 토요일 청년예배에만 18,000명 이상이 모입니다. 경이적인 숫자입니다. 그러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교회를 통해 이 나라가 변화의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교인들은 적극적으로 나라의 치유와 변화를 위해 정계로 진출을 시작하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중국 기독교와 삼자운동"이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1966년 문화혁명이후 1979년까지: 이 시기의 문화운동은 모택동과 유소기의 노선대립에서 시작되었는데 이시기가 교회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를 언젠가는 치러야할 불의 단련이라 생각했고, 이후 기독교인들은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 시기에 교회는 교파주의의 극복, 평신도 지도력강화, 신학교육개혁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날 중국에는 공산주의의 등장 이후 기독교운동은 계속 위축되어 갔지만 모택동이 소위 문화혁명을 시작하면서 모든 교회는 폐쇄되었고, 모든 선교사는 중국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중국 기독교의 종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모택동 실각 이후, 다시 중국이 개방되었을 때, 중국에는 문화혁명이전보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 약5천만 이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교회는 더 순수한 모습으로 개혁되어, 교파주의를 극복하고, 평신도의 지도력을 강화 시킨 모습을 보고 세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교전문가들은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문화혁명 이전부터 중국 교회 내에 존재했던 '작은 무리 운동'이었다는 평가입니다. 소그룹이 그 생명력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작은 무리 운동’은 '코이노니아' 교회입니다. 코이노니아란 일반적으로 ‘교제, 친교’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교제 이상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삶의 나눔, 삶의 참여’를 뜻합니다. 모임의 가장 중요한 시간은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 자기의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눔의 교제가 우리에게 치유와 위로, 격려 더 나아가 변화를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교회도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비전을 가집니다. 잠에서 깨어납시다. 두 날개 즉 성령이 ‘충만한 주일예배와 주간에 모이는 셀모임’에 동참합시다. 우리교회는 소그룹으로 움직입니다. 한 분도 열외가 없이 모두 함께합니다. 두 날개를 회복하여 정상적으로 비행하는 교회가 되는 기회입니다. 성장이 있고 부흥이 있으며 삶의 기적이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성경을 통하여 우리교회 성도님들께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아멘.
두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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