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설교

부흥의 전주곡(행2:37-42)

주 바나바 2023. 8. 11. 10:23

부흥의 전주곡(행2:37-42)

 

 

목사 주태근

 

막벨라굴(무슬림 구역) : 이스라엘

오스트리아에 ‘임페리얼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소장되어 있는데 아주 특별한 그림입니다. 로마 황제가 성당에 들어가려 하는데 주교가 문을 가로 막고는 “못 들어갑니다.”하고 저지하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A.D. 390년에 데살로니가에서 로마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납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데살로니가 시민을 1,500명이나 학살시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교회는 로마 황제를 정죄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밀라노의 주교는 성 암브로시우스로 아주 유명한 분이십니다. 이 분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분입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에 갔다가 성당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성당 정문 앞에 버티고 서서 황제를 가로막으면서 단호히 말합니다. “못 들어갑니다!” 아니 황제가 성당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막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누가 겁도 없이 황제를 가로 막겠습니까? 그런데 이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목숨을 건 행동입니다. 못 들어간다고 막고 서 있는 주교에게 황제가 어떨 결에 대답합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 왕도 죄인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다윗이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황제에게 이렇게까지 냉혹하게 대할 것은 없지 않느냐는 뜻의 변명이었습니다. 그 때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대답합니다.

 

“황제께서 다윗의 죄를 모방하시렵니까?” “그렇다면 다윗의 참회도 모방 하셔야지요. 다윗처럼 회개하십시오!” 대단한 분입니다. 그런데 황제는 더 대단합니다. 그러한 주교의 말을 듣고 그냥 땅바닥에 엎드리고 맙니다. 황제가 무릎을 꿇고 회개합니다. 죄는 죄일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내용이 담겨진 유명한 그림입니다. 회개는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이요 어려우나 회개를 할 줄 알면 뭇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바로 이것입니다.

 

한자로 개 견(犬)자를 큰 대(大)자라고 우기는 친구와 큰 대(大)자를 큰 대(大)자라로 바로 읽고 아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기가 맞는다고 논쟁이 붙었습니다. 큰 대(大)자와 개 견(犬)자의 차이는 점 하나의 차이입니다. 계속 논쟁을 하다 그들은 스승에게 가서 진위를 가리기로 했습니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한테 점심을 사는 조건이었습니다. 스승은 두 사람 주장을 다 듣고 난 후, 놀랍게도 큰 '대(大)'자를 개'견(犬)'이라고 틀리게 알고 있는 친구의 편에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바르게 알고 있던 친구는 스승의 판단에 의해 억울하게 점심을 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스승에게 찾아 와서 “왜 틀린 글자를 맞는다고 판결했습니까?”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때 스승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를 위해 점심 한 끼 사는 것은 벌이 아니라 상이라네. 그러나 개 견(犬)자를 큰 대(大)자로 알고 우기고, 그렇게 평생 사는 것은 형벌중의 형벌이라네... 틀린 것을 맞다! 고 우기는 그 친구한테 벌을 준 것이라네"

 

우리가 맞는다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일들이 오히려 틀린 일이 많습니다. 잘못알고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이 옳고 내 생각대로 해야만 한다는 것 자체는 이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벌을 받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0년 사순절 절기 첫 날 3월 1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가톨릭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의미 깊은 미사가 진행됐습니다. 이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 가톨릭은 기독교들 사이의 분파와,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폭력, 그리고 다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준 적대적인 의식 등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이날 교황은 지난 2000년간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잘못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회개를 한 것입니다.

 

교황이 회개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은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군 원정’입니다. 중세시대 때 교회는 '성지회복'이라는 종교적 명분으로 7만 여명의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이 십자군 전쟁의 이면에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돈벌이, 교황의 영향력 확대, 변사들의 일확천금에 대한 야망 등 불순한 동기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교황은 이러한 십자군 전쟁의 과오를 인정하고 그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두 번째의 잘못은 ‘유대인 박해’입니다. 교회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는 이유로 이들을 탄압하여왔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는 십자군 전쟁 때 본격화되었으며, 이것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 군인들이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잘못은 '마녀사냥'입니다. 1252년 교황 인노 센트 4세에 의해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마녀사냥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마녀라는 이름으로 화형에 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래로 ‘신대륙 정복’을 옹호한 점에 대하여 용서를 구했습니다. 유럽의 정복자들은 선교 등의 명분을 걸고 원주민 학살극을 벌였으며, 교회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았던 것입니다.

 

이 정복자들의 학살극으로 멕시코 원주민을 1200만 명이나 기독교로 개종시킨다는 명목으로 학살되었던 것입니다. 교황은 이와 같이 지난 2000년간의 가톨릭교회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가톨릭이 지난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그 행위들이 악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고백함으로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는 언젠가는 용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한국교회의 '위기설'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교회의 위기는 교회성장 둔화나 마이너스 성장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위기는 교회성장 둔화나 마이너스 성장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보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초대교회처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그 같은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사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추한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영광을 가리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위기라 할 것입니다.

 

'위기'란, 영어로 crisis(크라이시스)라고 말합니다. 이 ‘크라이시스’란 말은 헬라어 ‘크리시스’(krisis)에서 온 말입니다. ‘크리시스’란 '심판'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위기'란 말은 '심판'과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가 '위기'에 직면했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교회가 지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앞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가 됩니다. 이러한 위기를 하나님의 경고로 보고 기회로 바꾸는 일입니다. 본문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가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광장입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끝났습니다. 죄를 자각시키는 설교였고, 양심적으로 죄를 깨닫도록 인도하는 설교였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야 말로 너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최후의 메시아였다. 너희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메시아를 너희들이 거부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 설교를 들은 무리들의 반응이 바로 오늘 본문 37절 말씀입니다. 청중들의 반응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청중들의 마음을 찔렸습니다. 마치, 히브리서 기자가 경험했듯이, 베드로의 설교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살아 있는 설교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첫 설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의 설교는, 마음으로 느끼게 하고, 영혼을 파헤치고, 양심을 찌르는 설교였습니다.

 

단순한 일상적 사건에 감미로운 진정제를 가져다주는 진통제적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도 하는 설교였습니다. 어쩌면, 이 설교를 듣고 두 번 다시 기독교를 찾지 않을지도 모를 정도로 마음을 아프게 하는 설교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설교에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마음에 찔림을 받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불과 몇 주 전만해도 예수를 경멸하고 조롱했던 자들입니다.

 

예수를 배반하여 고소하며 예수를 죽인 자들입니다. ‘이 사람을 없이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라고 부르짖던 자들입니다. 참된 메시아 예수보다, 악한 강도를 원했던 그들입니다. 자기들을 구원하실 유일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그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린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린’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변화를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마음과 영혼에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하기를 ‘마음에 찔려 …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호소합니다.

 

이러한 청중들의 호소에 베드로가 답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그렇습니다. 회개가 바로 성령님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회개가 바로 부흥의 전주곡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회개해야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 앞에 돌아오면 사람이 변합니다. 위기가 기회가 됩니다.

 

회개의 기회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면 성령님이 임하고 부흥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부흥의 전주곡은 회개입니다. 회개할 때 부흥이 임하고 회개할 때 성령의 불이 임합니다. 통회하는 심령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입합니다. 성령님은 차별 없이 역사하십니다.

 

누구든지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함으로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는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죄인 된 자기 모습을 발견시키고, 나아가 죄인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드러내 주십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절규하게 됩니다.

 

이사야6장5절에 선지자 이사야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고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깨닫는 순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는 비록 세상으로부터는 좌절을 경험케 하시지만 대신 참다운 소망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새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50여 년 전 아프리카 콩고의 웸바라는 마을에 주목할 만한 부흥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한 마을 전체가 다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집단적인 회심의 사건이 선교사들의 눈물겨운 사역의 결과가 아니고 힘들여 가르친 성경공부 때문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부흥은 두 여인과 한 남자 성도의 진실한 회개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저들이 모여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모두가 뜨겁게 기도하는 가운데 두 여인의 마음에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의 빛이 자기들의 삶에 강하게 비쳐짐을 인하여 성령의 빛을 받은 사람들이 회심을 했는데, 그 가운데 한 여인은 교회에서 제일 많이 봉사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교회의 성미 한 자루를 남 몰래 갖다 쓴 것이 마음에 걸려서, 쌀 한 자루를 교회에 가지고 와서 회중들 앞에서 회개하기를, "사실 이 쌀은 교회에서 쓰여 져야 할 것인데 제가 갖다 썼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한 여인이 성도들 앞에 나서며 회개하기를, "저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 집 계란 한 줄을 주인에게 말하지 않고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회개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한 남자 교인이 회개하기를 “나는 오래 전에 어떤 선교사의 집에 갔습니다. 돌아오면서 그 선교사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성경 한 권을 그냥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을 다시 돌려드립니다.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했습니다.

 

이렇게 진실한 자신의 허물에 대한 회개로 말미암아 웸바 마을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허물에 대한 겸손하고 진실한 회개는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가능하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창조적인 역사를 감당하게 합니다.

 

옛날 중세 때에는 죄수들은 가두어둘 때가 없어서 배에 실어서 지중해 한복판에 가서 그곳에 세워두면 그곳이 감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태리 총독 한분이 바르셀로나 죄수선을 순시하는데 모든 죄수가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했는데 한사람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죄수가 있는데 너는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말합니다.

 

“예, 저는 죄인입니다. 가족이 굶어 죽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도적질을 했습니다. 이런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말을 듣던 그 총독이 소리를 지르며 “이 괘씸한 놈.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이 배에는 죄인이 아무도 없는데 너 같은 죄인이 여기 있다니 이놈을 당장 배에 실어서 이곳에서 내보내라!”라고 명령했습니다. 무슨 말 입니까?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회개가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 받는 길이요 회복의 길이요 부흥의 길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부흥의 전주곡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첫 번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시인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회개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도 회개요, 내 인격을 높이 세울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회개에 있습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도 회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니라.”(행3:19)

 

 

 

 

 

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