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셀교회인가?(마9:17)
목사-주태근
"시스터엑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 내용 가운데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연하게 살인현장을 목격한 3류 여가수가 살인범들의 추격을 피해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어 가짜 수녀가 됩니다. 여가수가 수녀원에 있다 보니 성당의 미사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어찌하다 찬양대의 지휘까지 맡게 됩니다.
그녀는 그 동안 성당에서 해왔던 고전적인 방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찬양대를 현대적인 재즈 풍으로 바꾸고 발랄한 율동까지 섞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 동안, 성당은 몇 명의 노인들만 남아서 자리를 채우는 경로당과 같았고 이들마저도 미사시간 내내 졸기만 했었는데 노래가 바뀌자 잠에서 깨어나고 성당밖에 있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리듬의 음악이 들려오자 성당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몇 명의 노인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던 넓은 성당은 금세 젊은이들로 가득차면서 놀라운 감동이 전개됩니다. 변혁과 개혁을 수용할 수 없는 성당의 변모를 느끼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신나게 만듭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반응은 단순히 영화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전통과 형식을 고집함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변해서는 안 되지만 시대와 환경 문화에 따라 형식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고 또한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느 재벌회사에서는 회장이 사원들에게 지시하기를 "아내와 자식만 빼놓고는 무엇이든지 바꿀 수 있다는 마음 자세를 가지라"고 훈시를 했다고 합니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이야기일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변화에 가장 둔감하고 느린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오랜 시간동안 한국교회가 침체에 빠져있고 침체의 터널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전달하는 그릇과 형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사람들에게 ‘패러다임(Paradigm)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이나 틀이 있기 마련인데 이것을 ‘패러다임’이라고 말합니다.
고착된 패러다임을 가지고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오늘의 시대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1800년대 초에 뉴욕 주지사였던 마틴 반뷰렌은 운하를 통해 대부분의 짐을 실어 나르던 운송사업 체계가 새롭게 나타난 철도산업에 위협을 당하자 당시의 잭슨 대통령에게 이러한 탄원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선박이 철도로 대체되면 심각한 실업사태가 발생될 것이고 선박 제조업자들과 거기에 관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운하를 운행하는 선박들은 미합중국 방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 이유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자들을 수송할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기차가 시속15마일이라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게 되면 승객들의 목숨과 신체를 위협할 뿐 아니라, 시골길을 굉음을 내고 증기를 내뿜으며 달릴 때에 곡식에 불을 지르고 가축들을 놀라게 하며 부녀자와 아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당시에 이 철도문제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만일 미국이 그 당시에 반대에 부딪쳐 철도와 기차를 도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고집에 집착하여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퇴보와 몰락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는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자연세계의 이치입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과 리더들이 어떠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교회의 미래는 새로운 부흥과 몰락 중 그 하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본문의 주님의 말씀은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한 번쯤 들어본 유명한 말씀입니다. 더욱이 문명의 전환기, 가치관의 전환기, 공동체 조직구조의 변혁기에서, 새 종교, 새 정치, 새 혁신을 도모하려는 이 시기에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격려의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가? 그 진의에 대하여 바르게 그 깊은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포도주 술맛이 변하지 않게 하려고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새 출발하는 기분으로, 새 기분 새 각오로 일 잘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판단하기를 낡은 가죽부대는 너무 오래 써서 오래된 옷감처럼 낡아져서 찢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해석이 가장 근사하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새로 담은 새 포도주의 발효능력의 팽창력에 담겨 있습니다.
새로 만든 포도주에서는 가스가 부글부글 끌어 오르기 때문에, ‘새부대', 즉 탄력성과 신축성이 뛰어난 새로 만든 가죽부대에 부어 넣어야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죽부대는 염소나 송아지의 가죽을 통째로 벗겨서 만든 것으로 술이나 가축의 젖이나 물을 담는데 이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대는 오래되고 낡으면 딱딱해지고 탄력성과 신축성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면 가스가 팽창할 때 부대도 찢어지고 포도주도 역시 쏟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낡은 가죽 부대도 못쓰게 되고 새 포도주도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발효성이 강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신축성이 있는 ‘새 부대’에 넣어야 오래 보존하게 되고 필요시 마실 수 있는 효과를 얻게 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날의 전통적인 방법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감당한다는 것은 ‘시간의 소모’일 뿐입니다.
새 시대의 새 포도주는 새로운 부대를 요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유기적 생명체입니다. 우리가 ‘셀교회’라고 말하는 셀(cell)은 유기체를 이루는 기본 단위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면 ‘셀그룹’은 몸의 각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없는 세포가 건강한 몸을 이룰 수 없듯이 생명력 없는 ‘셀그룹’으로 구성된 교회는 살아서 움직이거나 역동적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셀그룹’ 활용과 역동적인 교회성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교회에서 ‘셀그룹’이 활성화 되면 역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자연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미국과 멕시코를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들과 아시아의 태국, 싱가포르, 한국 등에서 셀 그룹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교회들은 역동적인 교회성장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21세기 새로운 교회 모델의 대안으로서 ‘셀 교회’(cell church)가 부상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셀 교회는 기존 교회를 향해 '패러다임의 변화'(The shift of paradigm)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성령의 새로운 사역이고 ‘새 부대’는 교회의 새로운 구조를 말합니다. 성령의 ‘새 포도주’는 지금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전의 말씀과 기도의 기름부음에 더하여 찬양과 경배, 내적치유, 중보기도, 하나님의 임재 및 하나님의 음성 듣기와 같은 새 포도주를 교회에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라고 무조건 성령의 포도주를 공급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새 포도주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제대로 담기 위해서는 교회로서의 ‘새 부대’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전통적인 교회는 프로그램과 직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낡은 부대’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습니다.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전 신자가 사역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로 섬기는 ‘셀그룹’ 교회 (Cell Group Church)가 바로 ‘새부대’입니다 . 대부분의 전통적인 교회에도 구역모임과 같은 ‘셀그룹’이 있습니다. 그러나 ‘셀그룹이 있는 교회’(Church with Cell Groups)와 ‘셀그룹 교회’(Cell Group Church)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셀그룹이 있는 교회’에서 셀은 여러 다른 프로그램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셀교회의 셀’은 그 자체가 교회입니다.
셀 교회는 영적으로 훈련된 ‘평신도 사역자’ (Lay Minister)가 영적리더가 되어 ‘셀그룹’을 통해 불신자를 전도하고 초신자를 양육하고 차기 지도자를 훈련하는 교회입니다. 대부분의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신자의 20%정도가 사역에 임하지만 셀 교회에서는 신자의 대부분이 사역자가 되어 사역합니다. 지금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교회는 성령의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 즉 ‘셀교회’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게 고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대중 속의 고독” 이라는 말을 한번쯤은 사용해 봤을 것이다. 이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외로움에 대한 솔직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는 점점 더 분화되고 다원화되어 가면서 사람들이 서로 만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친밀한 접촉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급속도로 줄어드는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모였다가 금방 흩어져 버리는 의미 없는 프로그램들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슴 깊은 곳에 맺혀있는 응어리를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마음의 대화가 목마르고, 삶의 현장에서 진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고품위의 관계를 갈망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이 찾아 헤매는 이러한 욕구의 응답이 바로 ‘셀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어떤 분들은 ‘셀교회’를 교회 부흥을 위한 또 하나의 방법론적 프로그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셀교회’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시작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 될 것입니다.
‘셀교회란 무엇인가?’ ‘셀교회’는 한마디로 세상 속에 “흩어진 작은 교회”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아가페입니다)과 섬김(디아코니아입니다)’을 가장 실제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삶의 현장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교회라고 하면 십자가 달린 높은 건물의 이미지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원래 성경적인 신약교회(초대교회)는 오늘의 교회 모습과는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주로 가정에서 모였는데 그것도 주일만이 아니라 날마다 모였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떡과 포도주를 서로 나누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과 목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마음의 마스크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간에 기쁨도 나누었지만 형제의 슬픔과 고통도 함께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감히 나눌 수 없는 자신의 모든 문제들을 솔직 담백하게 주님 앞에 내려놓았고, 서로가 함께 그러한 문제를 내 문제처럼 안고 기도하면서 서로를 세워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실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통해 생명력 있는 복음이 온 땅으로 퍼져나가도록 역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는 초대교회의 모습처럼 믿는 자들만 보호되는 요새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구원하는 전진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싱가포르의 페이스 커뮤니티 침례교회(Faith Community Baptist Church)를 담임하는 로렌스 콩(Lawrence Khong) 목사는 셀 그룹을 통해 10여년 만에 교인 수가 만 명으로 성장했는데, ‘셀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회가 해야 할 모든 일, 즉 교육, 제자훈련, 성경공부, 전도, 기도, 예배 등이 셀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주일 예배도 모든 셀 그룹이 한데 모여 드리는 공동의 축제예배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21세기에 우리를 위해 뭔가 특별한 것을 준비시키시고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가 그 일에 지금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일에 참여하는 것은 굉장히 큰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현대교회들에게 먼저 특별한 비전과 열정을 주십니다. 그 비전이란 성경적인 교회상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성경에서 주님이 디자인하신 ‘셀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주님이 디자인하신 새로운 가죽 부대로 교회를 전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셀교회’를 통해서 한 민족을 구원하고 세계 인류의 마지막 추수에 박차를 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 놀라운 일을 일으키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나는 확신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영광의 물결이 예루살렘과 열방에 영향을 준 것처럼 진정한 영적부흥은 도시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교회에서, 우리성도들이 심령과 삶에서 먼저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도시에서 부흥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기도하던 성도들에게 임하시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부흥시키신 것처럼, 오늘의 우리에게도 임재 하시어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를 갈망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역사가 우리 교회와 이 도시에서 다시금 일어날 수만 있기를, 그래서 사도행전 29장을 계속해서 기록해 갈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성경은 약속합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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