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설교원고

교회의 기둥(갈 2:8-9)

주 바나바 2019. 9. 29. 21:58

교회의 기둥(2:8-9)

 

연희중앙교회(2006/1/8)

세상의 모든 기관들은 다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 그 안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소수의 몇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국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몇 사람의 똑똑한 사람이 국가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몇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집단이 때로는 더 강력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국가나 회사에서는 엘리트들을 키우려고 하고 그들을 우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국가나 회사처럼 몇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함께 이루어 나아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는 주님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성도님들 모두가 하나같이 소중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 우리교회가 구성되고 또 우리 교회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기에 더욱 여러분이 소중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다수가 참여하여 움직이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다 기둥 같은 일군들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기둥 같은 일군들의 헌신과 모범으로 인하여 이루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기둥 같은 인물들이 있을 때에 우리 교회는 알차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기둥 같은 지도자들에 의해서 지탱되었고, 그들에 의해서 부흥되었으며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그 무서운 박해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둥 세 사람을 통하여 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합니다.

 

먼저 기도의 기둥인 야고보 입니다.

 

성경에 야고보는 여러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요한의 동생 야고보와 예수님의 제자 중 또 한 사람인 야고보와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동생 야고보는 행12:1-2에서 "헤롯 왕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 야고보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한 것을 끝으로 성경에 더 이상 기록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기록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보는 것이 아마도 가장 무난할 것입니다. 주님의 친형제 야고보는 이미 단순하게 예수를 믿는 한 사람이 아니라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그 증거는 15에서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열릴 때에 야고보는 당당하게 의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야고보는 오랫동안 예루살렘교회의 실제적인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이 야고보의 이름을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보다 앞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해서 야고보를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교회는 처음부터 세습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순수성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자격에는 야고보의 기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낙타 무릎을 가진 사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고 전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야고보는 성의 높은 곳으로 끌려가서 성 밑으로 내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성 밑으로 내 버려진 야고보는 성 절벽 저 밑에서 엎드러져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장사를 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찾아가서 보니까 야고보는 거기에서도 무릎을 꿇고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여전히 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를 많이 함으로 그가 성에서 떨어져서도 "낙타 무릎을 가진 사나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단단하게 연단된 무릎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야고보는 5에서 기도의 위력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5:13-14에서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당하거나 병중에 있을 때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위경에서 건져주시며 그 어떠한 병에서도 고쳐주심을 분명히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이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동생이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한 것 역시 아닙니다. 그의 이 말씀 속에는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산 증인이었고, 체험자였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기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기둥이 없는 교회는 힘도 없고 쓰러지는 교회일 뿐입니다. 일하는 사람 보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야 교회는 부흥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시간이 나기만 하면 언제나 기도하시고, 또 아무리 바쁘고 분주해도 일부러 시간을 할애해서라도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기도 외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기도하는 교회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여지없이 사그라졌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살이에서 생활로 어렵다고 기도하기를 포기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포기하실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정말 복된 교회가 되려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기도하는 기둥이 되어 날마다 뜨거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믿음의 기둥 베드로 입니다.

본문에서 두 번째의 기둥은 게바라는 분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은 모두 아홉 번에 걸쳐서 베드로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번을 "게바"라고 부릅니다(14; 1:18; 고전 1:12; 3:22; 9:5; 15:5). 베드로는 믿음의 기둥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로서 밤이 맟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낙심하여 그물을 챙기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5:4에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이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목수일이라면 몰라도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완전히 도사인 베드로가 예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완전히 굴복하고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와 같이 주님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실 때에 자신도 주님을 의지하면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물위를 걸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모두가 각자가 들은 이야기를 한마디씩 합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담대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믿음에 출중한 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기둥으로서 오순절 이후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기독교는 이단으로 몰려서 유대교인들에게 당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초대교회를 훌륭하게 이끌어 갔습니다.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을 보임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정말 초대교회의 믿음의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믿음의 기둥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믿음이 식어지리라"라고 교훈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믿음과 신념은 다릅니다. 믿음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지만 신념은 자기 확신에 근거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라야 힘이 있습니다. 자기 확신은 흔들릴 때에 그 기준이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견고해 질 수 없습니다. 믿음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다른 그 어떠한 것도 믿음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믿음의 기둥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기둥 요한입니다.

교회의 세 번째 기둥은 사랑의 기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은 사랑의 기둥입니다. 요한이 쓴 5권의 성경은 그 주제의 핵심 언어가 바로 사랑임을 우리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과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실제로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로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기심도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어머니께 부탁하여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에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나란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되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려고 한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면서 "네 어머니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즉각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가는 곳마다 사랑을 외치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할 정도로 사랑을 대단히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기둥도 있어야 하고, 믿음의 기둥도 있어야 하지만 사랑의 기둥이 많아야 합니다. 꼬치꼬치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일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입니다.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 가식이요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요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노랫말마다 다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그토록 갈망하면서 노래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결핍으로 상처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설혹 사랑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랑도 모두가 조건이 없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조건이 다 붙어 있는 사랑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남녀 간에 결혼을 함에 있어서도 조건을 따지면서 거래를 하는 것이 오늘날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가정에서도 사랑이 결핍되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가정에서 이렇게 되기 시작하니까 사회전체가 불신에 쌓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진정한 사랑이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성도의 교제가 거룩한 사랑의 교제가 아니라 거래와 같은 교제가 너무나도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으로 형제와 자매와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여러 가지 범죄나 질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교회가 병드는 원인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요한이 외친대로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는 거룩한 성도의 교제 속에서 사랑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사랑하자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기둥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교회는 이제 보다 더 성숙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성숙해지려면 제직들이 하나같이 교회의 기둥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기둥 같은 일군들을 찾으십니다. 그 기둥은 바로 야고보와 같은 기도의 기둥, 베드로와 같은 믿음의 기둥, 요한과 같은 사랑의 기둥이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각자의 성격과 각자에게 주어진 위치에 알맞게 교회의 한 기둥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합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선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3: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