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설교원고

개혁과 믿음(갈1:6-10)

주 바나바 2019. 9. 30. 21:12

개혁과 믿음(1:6-10)


'교회 밖에서 만나는, 재미있는 교회이야기'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마틴 루터의 스캔들이라고 하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500년 전 마틴 루터의 스캔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번쯤 재미있게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1525613일 수녀, 가톨릭 수녀 출신의 카타리나 본보라와 화촉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결혼입니다마는 500년 전 당시로 돌아가 볼 때에는 교회에서는 이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가톨릭 수녀와 가톨릭 수도사가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 있던 사람이 뛰쳐나왔고 수녀원에서 한평생을 살다 죽어갈 사람이 거기서 탈출해 나와서 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것은 세계적인 스캔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톨릭 개념으로 볼 때에는 수도사와 수녀, 그것은 분명히 간음행위입니다.

 

이 결혼은 간음이요, 마틴 루터는 타락한 성직자라고 하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혼은 종교를 개혁하기 위한 강한 신앙적 자세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부인 카타리나도 이 개혁에 동참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아주 지성의 사람이요, 화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하게 루터를 내조해서 종교개혁을 성공하게 만듭니다.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남편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에 사방에서 루터를 죽이려고 계획했습니다.

 

이 죽음의 공포 속에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가운데서 살아갔기 때문에 그는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큰 소리로 이렇게 소리를 지르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귀야! 나 좀 잠 좀 자게 내버려둬라. 내가 내 죄를 많이 지은 죄인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이제 그만 좀 해라" 무슨 말이겠습니까? 종교개혁을 하는 이 엄청난 사건을 놓고 밀고 나갈 때에 자기의 죄가 자꾸 생각이 납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잘못한 것. 마귀가 계속 공격을 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루터가 중얼거리기를 '마귀야! 나 잠 좀 자자. 이제 그만 해 둬라. 내가 죄인이거나 잘 알고 있는데 그만 좀 해라.' 그러더라는 겁니다. 이렇게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에, 어느 날 밖에서 돌아오니까 마틴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가 상복을 입고 울고 있더랍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누가 죽었느냐, 왜 울고 있느냐 했더니 그 부인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돌아가셔서 상복을 입었습니다." 루터가 펄쩍 뛰면서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무슨 불경한 말이냐!"고 벌컥 화를 내니까 그 부인이 조용히 하는 말이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째서 당신이 낙심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면서 왜 피곤해 하는 겁니까?" 이러한 부인의 말에 의해 용기백배로 루터는 종교개혁을 이루어 갈 수 있었습니다. 부인 카타리나의 공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갈라디아서 속에 있는 복음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러한 엄청난 진리를 깨달으면서 그 진리가 루터를 사로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이 폭발할 때 그가 수도원을 뛰쳐나올 수가 있었고 그 인격이 변화될 때 그 감화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원하고 협력하고 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483년전 즉 15171031일 독일의 수도사 였던 마틴 루터가 비덴베르그 성당 대문에 카톨릭의 부패에 관해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부착한 것을 기화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중에도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면죄부 판매 때문입니다. 당시 도미니크 종단의 사제 테첼이 간교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선동하여 이 면죄부를 돈으로 사면 연옥의 고통에서 면제된다고 유혹했습니다. 면죄부를 판돈은 교황 레오 10가 성 베드로 성당 증축에 사용된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 수익의 절반은 호헨쫄레른 가문의 브란텐 부르그의 알베르트모인츠의 대주교직을 사는데 소용된 빚을 갚는데 쓰여 졌습니다. 여기에 분노한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고 (Sola Fide) 외치면서 95개조항의 항의문을 내걸었습니다. 15171031일 정오 루터는 성 교회 정문 앞에 나갔습니다. 라틴어로 쓰여 진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나무로 만든 교회 문 앞에 못질하여 붙였습니다. 드디어 2주 만에 전 독일을 불 질렀고 4주 만에 전 구라파를 불 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루터 종교개혁의 봉화였습니다.

 

루터의 항의문 중심내용이 무엇입니까? 면죄부가 어찌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있느냐? 면죄부가 어떻게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할 수가 있느냐는 내용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회개한 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을 받았다는 중요한 교리를 발표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한 길 뿐입니다. 면죄부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습니다. 그 여파가 즈윙글리칼빈의 믿음과 지력과 함께 유럽을 휩쓸었고 존 녹스로 하여금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하게 했고 요한웨슬리로 하여금 영국 감리교회를 창시하게 했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원동력은 로마서 1:17의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이 성경구절을 로마 여행 중에 깨달았습니다. 151011월부터 15114월까지 수도사들이 순례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 코스 중에 하나가 성 계단 성당(Scala Santa) 내부에 "빌라도의 계단", 또는 "거룩한 계단"이라는 이름의 28계단이 있습니다. 이 돌계단은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러 밟고 올라가신 계단! 죄악 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수치와 모욕과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 그 계단을 로마로 옮겨와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예배당을 지어 보존해 오고 있습니다. 중세의 신자들은 이 계단을 무릎으로 한 계단씩 올라가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기하면서 기도하며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그 계단에는 유리 조각을 깔아 놓고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 무릎으로 기어 내려와야 하는 계단! 그렇게 함으로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구원받고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순례 객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지한 행동일 뿐입니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루터가 성 로마 순례 중 이곳에 이르러 층계를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다가 그 마음에 봉독한 롬1:17말씀이 번개처럼 떠올랐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는 가슴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기어올랐던 그 계단을 걸어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그 때까지도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을 통해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51511빗덴베르그 대학에서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던 중, 이 구절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기록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만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는 그런 의미인 줄로 생각했다. 나는 주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의(예수=복음)를 의미하는 것이요, 또 우리가 그 의(복음)를 믿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음! 곧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의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한다. 내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으며 천국 문이 내 앞에 활짝 열려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것을 비텐베르그의 어거스틴 수도원 탑 안에서 발견하였고,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탑의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복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복음이라는 말을 이해해야 됩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복음을 이해해야 됩니다. 믿음은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고, 복음은 내가 믿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습니까? 바로 복음을 믿습니다. 영어로는 복음을 'Good News'라고 합니다.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또 복음을 헬라어로 '유앙겔리온' 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에 전쟁을 하면 멀리 나아가서 전쟁을 합니다. 그 전쟁에 이기면 그 소식을 빨리 소식을 전하는 보발 군이 있습니다. 몇일을 말을 타기도 하고 뛰어 오기도 해서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 소식을 고향이나 수도에 전하게 되면 온 나라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이 소식이 온 성에 퍼지면서 야단이 납니다. 꽹과리 치고, 북 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 소리 지르고 이 세상에 이 보다 더 놀랍고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과 저주와 멸망과 죽음과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다 라는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기독교는 소식의 종교입니다. 이 소식을 전합니다. 열두 제자와 바울은 이 소식을 전 세계에 전하였는데 이 소식을 받아들이면 그 나라가 살아납니다. 우리나라도 이 소식이 120년 전 선교사들이 전해준 이 소식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완전 타락한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죄의 종이 되어 죄의 길로 빠집니다. 사람의 본성은 겉으로는 다 안 그런 것 같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좋은 것, 거룩한 것보다는 죄를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에 빠진 우리 인간이 죄의 맛을 들여 죄를 좋아하는 합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을 죄에서 건져내는 길은 복된 소식을 들어야 됩니다.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됩니다. 받아들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복음의 절대적 성격을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 절대화, 진리의 절대화, 복음의 절대화, 이것이 중요합니다. 요사이 많은 사람들은 현대의 큰 병인 상대주의에 빠져 가지고 말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이래 생각하고는 그런데 요것이 조금 더 좋은 거 같기도 하고, 이러면서 허우적거리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강한 신앙적 용기를 보시기바랍니다. 내가 전한 복음, 너희가 받은 복음, 이 복음 진리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 누구라도,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이 절대적 신앙, 이 절대적 확신, 이것이 그 마음속에 솟아오를 때 개혁의 용기로 나타나게 됩니다. 특별히 이 거룩한 진리가 나를 고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진리에 사로잡혔습니다. 내게는 선택이 없습니다. 그를 위해서 내가 있습니다. 내가 깨달은 진리, 내 학설,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의 진리가 나를 붙들어서 나로 하여금 오늘이 있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1장에 보면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도대체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 그 자체가 이것 때문에 태어났고, 하나님이 이것 때문에 나를 이 세상에 이 시점에 보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보셨습니까?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에 나를 이 때문에 보냈다, 확신하십니까? 이 순간을 위하여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온 정력을 쏟아냅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이것이 개혁적 용기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 내 삶의 목적이 어디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나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할 때 비겁한 사람이 됩니다.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확신이 가면 엄청난 용기가 폭발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고, 그가 주시는 은총을 힘입을 때만이 우리가 깨끗하고 정결한 자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아들의 피를 보고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지 아니하고, 진노를 넘어가십니다. 너에게 아들이 있는가? 아들의 피가 있는가? 네가 아들을 믿는가? 그렇습니다. 우리 할 일은 오직 믿는 일입니다. 이 크고 놀라운 사실을 내가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자유케 하고, 능력 있게 하면서 이 세상 어디에서도 이 놀라운 믿음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승리하게 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을 할례로 사인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몸의 할례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백성의 죄를 사한 다음에는 몸에다 사인하지 않고, 마음에다 사인하겠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그전에는 몸에 사인 즉 할례를 해서 의인이 되었지만 이제는 몸에다 하지 않고 마음에다 한다." 가장 큰 힘과 가장 큰 능력은 마음에 있습니다. 행복은 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습니다.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제 아무리 천국같이 꾸며 놓아도 마음이 어두우면 지옥입니다. 아무리 햇빛이 비추어도 주의 보혈로 씻음 받지 않은 사람은 캄캄하기 그지없고, 아무리 여러분을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도 주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다른 것 다 보시지 않습니다. 네 마음에 나를 믿는 것이 있느냐? 네 마음에 나를 사랑하느냐? 너 어렵고 괴롭고 속상할 때 "주여, 믿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러면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너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요 힘 있는 자다 라고 말하십니다. 그 사람을 아무도 이길 수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옵니다. 우리는 보화를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는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물질에서 찾으면서 이 사회가 걷잡을 수 없는 타락과 음란과 파멸로 가고 있습니다. 인간을 인간 되게 하고, 가치 있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능력 있게 하는 힘이 어디 있습니까? 믿는데 있는 겁니다. 내가 믿으면 능력은 복음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내 안에 들어올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서 내 안에 있는 죄를 이기고, 마귀를 쫓아내고, 자유함을 주며, 평안을 주며, 힘을 줍니다.

 

운동선수에게 제일 힘든 것은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안정만 찾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안정은 믿는 것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기술을 믿든지 무엇이라도 믿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우리 주님을 내 안에 모실 때, 또 승리자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마음의 평안도, 안정도, 승리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이란 믿음이 세속화 된 것을 다시 재정비하는 일입니다. 신앙의 리모델링입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복음진리 그 진수가 무엇이냐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요. 복음에 대한 재해석이요. 그리고 종교개혁이란 믿음을 구체화하는 일입니다. 머리 속에 있던 신앙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실제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이요, 순교자의 마음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개혁을 외치는데 개혁되는 것이 없습니다. ? 자기 개혁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자기 개혁이 없느냐.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이기에 최종승리가 내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이 종교개혁자의 용기, 이 믿음을 가지고 자기 개혁을 이룰 때에 가정도 사회도 세상도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개혁자의 위대한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