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고후12:6-10)
설교: 목사 주태근
오래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사람을 채용할 때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빨리 출세한 사람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채용을 꺼려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쉽게 출세한 사람은 독선적이기 쉬우며,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남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달리는 말은 맨몸으로 달릴 때보다 등에 적당한 짐을 실을 때 더욱 빨리 달린다고 합니다. 사람도 적당한 시련을 만날 때 도전함으로 인생의 가속이 붙게 됩니다. 누에나방은 고치를 뚫고 나오는 엄청난 시련을 통하여 비로소 하늘을 날고 알을 낳게 됩니다.
인생의 시련은 바람과 같습니다. 바람은 배를 전복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배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실패도 소중한 자산입니다.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감사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인생의 날카로운 고난의 가시로 아파하지만 그 가시로 인해 잠든 영혼이 눈을 뜨게 됩니다.
사람마다 감추고 싶은 약점이 있습니다. 약점은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점은 숨기는 것이 통례입니다. 바울에게도 숨기고 싶은 약점이 있었습니다. 벗어나고 싶은 컴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한 가지 지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내 몸의 가시'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는 ‘말뚝’이라는 의미와 더욱 가깝습니다. 아주 뾰족한 말뚝이 사람을 찌를 때 그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 가시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장로교 창시자 요한 깔벵은 이 가시란 바울에게 있어서 영적인 유혹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너무 어려움이 많고 반대가 있으니까 복음 전파하는 의무를 피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런 유혹에 빠졌을 때 그의 양심은 참으로 괴로웠을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는 바울이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반대와 박해를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반대하여 그의 일을 파괴하려는 자와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고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가시란 정욕의 유혹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수도승들이 수도원에 묻혀 있을 때 그들의 성 본능을 마지막까지 억제하기 어려운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그와 같았다는 이해입니다.
고대시대의 신학자 터툴리안이나 제롬 같은 분들은 바울이 매우 지독한 두통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바울이 간질병 때문에 또는 안질 때문에 고통을 당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영광을 본 후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아나니아라는 분에 의하여 그의 눈이 보이게 되었지만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많은 고생을 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마지막 부분에 가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은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사람이 쓰는 커다란 글씨를 두고 한 말이라고 이해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바울이 동부 지중해안 지대를 휩쓸고 있던 말라리아 열병에 만성적으로 걸려서, 그것이 무서운 증상으로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이렇게 저렇게 추측하여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바울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주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식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와 비슷한 기도입니다.
십자가에 죽기전 예수님께서는 할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역시 사도 바울도 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 주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 대한 응답 역시 주님이 받은 응답과 일치합니다.
기도를 드렸다고 해서 예수님께 고난의 잔이 없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응답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그때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니라”
세상적인 가치로 보면 바울의 고백은 참으로 억지입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강한 것을 자랑하지만, 그 강한 것이 오히려 약함이 될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너무 강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거부하고 공격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기독교인들을 극렬하게 증오했습니다.
자기의 적이 되는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다음에 그 옆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남과 동시에 나무토막 부러지듯 꺾여졌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면 하나님도 그렇게까지 무자비하게 부러뜨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노자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 보다 낫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것이 얌체같이 똑똑한 것보다 낫다" 그러자 한 제자가 "사람은 모두 강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때 노자는 제자에게 이르기를 "강하면 부러진다, 그러나 약하면 부러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강한 바람이 불 때 부드러운 나무는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한 나무는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히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잦은 병치레를 하며 자란 사람이 오히려 장수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또 다시 병이 들어도 충격이 적습니다. 그 병을 극복하고 자기를 관리하는 지혜를 이미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건강에 자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한 번도 병원에 가본 일이 없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번 병이 나면 큰 충격을 받고 곧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그 상황을 견딜만한 지혜와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백합니다. “약할 그 때가 곧 강함이니라” 놀라운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35:3에서는 "약한 손을 강하게,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약한 자가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부분에 대해서 철저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아는 사람은 더 많이 기도합니다. 스스로 약하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느 집에 심방을 갔을 때에 그 집의 작은 딸 아이가 인형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얘야! 너는 이 많은 인형들 중에서 어떤 인형을 가장 좋아하니"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얼른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이곳저곳 상처투성이의 인형을 들고 나오더니 그 인형을 가장 좋아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이 하도 의아해서 왜 그 인형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아니면 이 인형을 사랑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동물들은 약한 새끼들은 도태시킵니다. 강한 것만 키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한 자에게 더욱 큰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난날 이런 신문기사가 난 것을 보았습니다. 재개발 아파트 분양비로 낸 은행대출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같은 부대에 근무했다가 전역한 대학생을 납치하여 금품을 빼앗고 몸값 3억 원을 요구한 현역 국군기무사령부 상사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기사입니다.
경찰조사 결과 평소에 이 학생이 자신의 집에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을 기억하고 범행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돈을 자랑한 입술이 범죄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시편 36장을 통하여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자랑한다고 말씀합니다. 가만히 세상에 돌아가는 것을 보면 별 볼 것 없는 것들을 자랑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목욕탕에 가면 문신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용담과 영웅담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랑스럽지도 않은 부끄러운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다 엎드러져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우리는 힘도 없고,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그래서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참으로 초라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38년 동안이나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방황하던 병자를 찾아 위로하시고 치료해주셨습니다. 약한 자가 더욱 은혜를 체험합니다.
영국의 청교도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제일 많이 알려진 분은 요한 번연 일 것입니다. 이 분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서 투옥이 되었습니다.
활동적인 분이 수감되어 감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답답하고 민망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 내 은혜가 족하다”라는 똑같은 음성이 세 차례 들려왔습니다.
그때서야 요한 번연은 아, “내가 이렇게 감방에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내게 족한 은혜를 주시는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고 다시는 원망도 낙심도 아니하고, 오히려 기쁨을 가지고 옥중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고백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할 때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고통도 견딜 수 있고, 슬픔도 참을 수 있고, 고독도 견딜 수 있고, 실패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 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족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뜻은 가시가 있을지라도 이것을 잘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가시로 말미암아 주님의 능력이 그 생활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서 하나님이 그를 쓸 만한 그릇이 되게 하고, 자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복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집니다. 약한 데서 라는 말은 인간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는 여러 가지 가시와 같은 고통, 질병, 슬픔, 고독, 환난 같은 것들로 말미암아 인간이 약하여지고, 그 약함을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온전히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는 그 능력이 인간 가운데서 온전히 나타나지 못합니다. 토기장이의 능력과 기술은 흙이 부드럽고 연할 때 온전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흙이 굳을 때에는 토기장이의 기술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인간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심령이 약해질 때는 자연히 그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 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 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겸손할 때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같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이르기를 “나는 오히려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느니라” 고 기록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런 때에 내게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나는 약한 것들,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들을 기뻐한다 는 고백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 프란시스를 기억하시지요.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본래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부족한 것을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부잣집 아들처럼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큰 병에 걸렸는데, 그는 이 중병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약한 가운데서 주의 능력이 나타나 방탕하던 청년이 성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요한 밀턴은 유명한 문학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실명한 후에 더욱 위대한 작품 「실락원」을 썼다고 하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운데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불구의 몸으로 항상 비관하는 분이 계십니까? 실패했다고 실망하신 분이 있으십니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자신을 온전히 맡기시기 바랍니다. 약한 가운데서 주의 능력이 온전하여집니다. 가시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강해지며 큰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슬픔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슬픔을 통해서도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미국이 흑인노예 문제로 남북전쟁을 하게 되었고 결국 흑인노예를 해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데 미국에서 흑인노예 해방운동을 일으킨 배후에는 유명한 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그 책이름은 영어로 「Uncle Tom's Cabin」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입니다. 그 소설은 스토우 라는 부인이 썼는데, 그 부인의 아버지는 라이먼 리쳐드 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요, 오빠는 아버지보다 더 유명한 헬리워드 리쳐드 목사입니다.
그런데 이 부인이 어떻게 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는가 하면, 이 부인이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귀한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이 부인은 딸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딸이 잘 자라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딸을 읽고 나니 세상을 모두 잃은 것 같았고, 눈을 감으나 뜨나 딸 생각뿐이었습니다. 자기 마음이 그렇게 아픈 것을 생각하다가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슬픔을 당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흑인노예들의 형편을 살펴보았습니다.
흑인 어머니는 딸이 죽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딸이 팔려감으로 사방으로 가족이 흩어지는 생이별을 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이때 스토우 부인이 나는 내 딸이 죽어서 이렇게 슬픈데, 살아서 자기 아들, 딸과 이별해야 하는 흑인 어머니들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어 소설로 옮긴 것입니다.
그 책이 출간되어 많은 사람이 읽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미국 사람의 양심을 찌르게 되었고, 흑인노예는 반드시 해방되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약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이루어져 인류 해방과 자유의 큰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 말씀은 얼른 들을 때 모순되는듯 합니다. 그러나 진리입니다. 인간이 약해질 때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겸손할 때 은혜가 나타납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중병에 들어 약해지면 겸손해집니다. 세력 있던 사람이 그 세력이 없어지면 겸손해집니다. 돈 많던 사람이 사업의 실패로 돈이 없어지면 겸손해집니다. 인간은 약 해질 때 그 생각이 깊어집니다. 인생의 문제를 탐구하게 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꽃과 같습니다.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을 직면하게 될 때 인생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는 말씀의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모든 것이 없어질 때,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 것이 아닌 것을 체험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던 모든 것이 끊어질 그때에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의 시작 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약할 그때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며 새 소망과 새 힘을 얻게 되 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사업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사람, 연애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사람, 생활고로 자살하는 사람, 심지어 입시에서 실패하여 자살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해지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인생길을 바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오는 사람은 약할 때 강해지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할 때 강해지는 신앙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약할 때 낙심하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겸손히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새 능력을 받아서 사도 바울처럼 약한 것을 오히려 기뻐하며 자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바울서신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갈 5:16-24)-목사 주태근 (0) | 2022.08.09 |
---|---|
어버이 은혜(엡6:1-4) (0) | 2022.08.08 |
건강한 주님의 교회(엡 4:11-16) (0) | 2022.07.29 |
동반자적 선교(고전3:5-9) (0) | 2019.10.15 |
개혁과 믿음(갈1:6-10) (0) | 2019.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