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설교원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갈 5:16-24)-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9. 20:27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5:16-24)

 

 

목사 주태근

 

영국의 단편 작가 스티븐슨의 작품 중에서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동네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킬이라는 의학 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며, 과부의 보호자로, 자비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경과 칭송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 [하이드]라는 흉악법이 나타나 온 동네를 수라장으로 만들며,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능욕하고, 약탈을 일삼아 동네를 공포 속에 몰아넣어 마을사람들이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하이드]라는 흉악범을 잡아 화근을 없애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느 날 밤중에 보안과 사무실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져 동네 사람들이 다같이 모여서 체포된 [하이드]의 가면을 벗기는 순간 사람들은 아연 실색하고 맙니다. 그는 바로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존경하던 지킬박사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인간들 내면에는 선하고 바르게 살고 싶은 양심이 있는가하면 한편으로는 이기적일 뿐 아니라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심성이 있다는 내부의 갈등을 보여 주면서 인간의 양면성을 그린 작품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 속에는 두 가지 소욕이 있음을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과 영의 소욕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소욕이 우리 속에서 서로 싸운다고 가르칩니다. 육체의 소욕과 영의 소욕이 서로 거스리고 서로 대적합니다.

 

사탄은 육체의 소욕을 지원합니다. 육체의 소욕이 발동하기를 지원합니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마시고 더 많이 즐기기를 지원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향락하고 더 많이 타락하기를 지원합니다. 음란과 폭력이 강하게 발동하기를 지원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 마귀를 따르도록 지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이 지원하는 육체의 소욕 15가지를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와 같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인격과 성품을 가지지 못하고 늘 추하고 더럽고 부끄러운 인격과 성품을 지니며 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육체의 소욕을 계속해서 따르면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사실 사람은 모두 사탄의 꼬임을 받아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은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사탄의 머리를 깨 부셨고 죄악의 세력을 깨트려 부셨습니다. 그러나 사탄과 죄악의 세력이 완전히 파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조금 살아서 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 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닮도록 도우시게 되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게 하는 일을 지원하시고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을 닮아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놓여 있습니다. 사탄의 지원을 받아 육체의 소욕을 이루며 죄악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 수 있는 가능성과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영의 소욕을 이루며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사탄의 지원을 받아 육체의 소욕을 이루는 편을 택했고, 베드로는 거의 그렇게 될 뻔 했지만 마지막에 성령님의 지원을 받아 영의 소욕을 이루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나중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 온유, 겸손, 충성, 인내 그리고 절제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들이 주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물리치고 영의 소욕을 이루도록 날마다 싸우는 일입니다. 영의 소욕을 좇으려면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것이 힘든 일이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우리를 옛 사람으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성령의 소욕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힘있게 살아가게 합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사도 바울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나중에는 너무 괴로워서 "오호라 !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때 어떤 한 법이 지배하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주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한편 선을 추구하는 세력이 우리를 지배하기도 하고, 악을 추구하는 세력이 우리를 죄악으로 잡아 이끄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정말 놀랍습니다. 의학 기술이 발달해서 이제 인간의 감정을 조절할 단계에 까지 왔습니다. 1987년 미국의 식품의약국(FDA)는 소위 해피 메이커(Happy Maker) 또는 해피 필(Happy pill)이라 불리는 다섯 회사의 약품을 공식적으로 승인을 했습니다.

 

이 해피 메이커란 SSRI 계열의 약물을 일컫는 말인데, 이 약물은 인간의 정서를 관장하는 신경 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을 조절하는 작용을 한답니다. 그 결과 인간이 느끼는 슬픔을 약화시키고 결국 우울증을 치료하는 탁월한 효과를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10mg 짜리 알약으로 슬픔과 정서적인 고통을 실제로 줄이고 억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약의 이름을 해피 메이커라고 붙였습니다. 행복을 만들어 내고 기쁨을 맛보게 해 주는 약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아마도 과학자들은 그 약 한 알만 먹으면 인생이 행복해 지는 그런 약을 만들 꿈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약은 행복을 만들어 준다거나 기쁨을 얻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저 슬픔을 줄여주고, 우울증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약의 부작용입니다.

 

총기 난동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 상당수가 이 약을 장기 복용하고 있는 중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슬픔은 줄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남의 슬픔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보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만들어보려는 과학 기술의 노력이 실제로는 큰 성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을 만들어보려는 인간의 노력에, 인생의 기쁨을 만들어 보려는 인간의 몸부림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자아 통제는 약으로 해결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임재하시고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아니하고는 악을 이길 수 없고, 자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 " 즉 성령님으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따라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따라 살고, 커서는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자유의지를 발휘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인생은 그가 결정한 것이고, 그의 선택한 결과입니다. 자기의 인생으로 자기가 선택하였기 때문에 누구에게 그 책임을 떠넘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 살아가느냐? 아니면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은 매순간 순간마다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 자유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참 자유는 어느 한편으로부터의 자유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참 자유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살 것이냐?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살 것이냐 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책임도 여러분이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에게 매이고 성령님의 이끌림에 따르기로 작정하십시오. 그러면 육체로부터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때의 자유가 참된 자유입니다. 그것이 참된 해방이요, 보람이요, 의미입니다. ""라는 자아로부터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집, 이성적인 판단, 교만, 나의 의, 이런 것들이 우리를 죄악으로 이끌어 갔는데 이제 성령님에 매이고, 성령님에게 순종하고, 성령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굴복하기로 하니, 그렇게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영적 해방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참된 평안입니다.

 

예수님 믿게 하는 일도 사람의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사업을 하는 것도, 직장을 다니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말씀했습니다. 마음을 성령님에게 빼앗겨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사업을 경영하실 것입니다. 한층 마음이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마음을 다스리실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생애를 재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 행할 때 성령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우리도 거룩해야 하고, 하나님이 온전하시기에 우리 또한 온전해야 합니다. 그러한 성별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힘이 아니고는 그러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야 하는 우리 성도들은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아니합니다. 지식으로 따라 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그 어떤 인격을 가지고는 너무나 모자라고 힘에 겹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으로 승리합니다.

 

어느 교회에 신실한 여자 집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의 남편은 교회에 나오질 아니해서 아내로서 그 남편을 위해서 늘 기도하며 꾸준히 권면을 하고 늘 교회에 함께 나가기를 독려했습니다만은 그렇게 쉽게 따라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주일날 아침에 남편이 느닷없이 하시는 말씀이 "나 오늘 당신과 함께 교회에 가려는데"라고 하더랍니다. 깜짝 놀라서 이제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는가 보다 하고 서둘러서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가게 됩니다. 가면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늘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시나? 모처럼 가는데 좋은 목사님이 설교하셔야겠고 무슨 제목으로 하실까? 어떤 본문을 보실까? 이 첫 번 교회에 나가서 바로 은혜를 받아야 하겠는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며 교회에 나갔는데 주보를 딱 받아보니까 본문이 뭐냐하면 창세기 5장이더라구요.

 

창세기 5장에는 사람의 이름만 나옵니다. 이 계보라고 하는 족보가 쭉 나오는데 사람의 이름만 나옵니다. , 이거 큰일났거든요. '어떡하나 이거' 거기에 보면 대체로 요약하면 그래요. 아담은 930세를 살고 죽었다. 셋은 912, 에노스는 905, 게난은 910, 그리고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고 죽었다, 뭐 그런 내용입니다.

 

이 집사님은 깜짝 놀랐어요. 이거 어떡하나? 모처럼 제 남편이 교회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좀 낙심이 되지만은 성령님의 음성으로 여호수아 61절을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면서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는데 마치고 나올 때에 남편이 "여보 등록합시다" 그러더랍니다.

 

그리고 가서 등록용지를 찾아서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겠다고 등록을 했어요.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서 음식을 잘 차려서 남편에게 대접을 하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 특별한 말씀을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말씀을 들었기에 이렇게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 남편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아무개도 죽었더라. 이거 대체로 많이 살기는 했드만." 그러나 죽었더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너도 죽어' 하는 음성이 마음속으로 드려오더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있질 않다. 내게는 구세주가 필요하다. 그래서 믿기로 했노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님이 역사하면 인간 기대 이상의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전도도 하나의 간증이요 기적이요 체험입니다. 인간이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됨은 성령님 안에서 인생을 승리하는 은혜입니다. 전도는 인간의 강요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께 우리들을 내어 맡기게 될 때에야 참으로 가능해집니다.

 

태신자를 품고 전도하는 일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겠지마는 우리들에게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해 집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들오 하여금 전도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습니까?

 

성령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장애를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며,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며, 능히 하나님의 자녀로 복을 누리도록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전도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술 취하지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