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 강의록(9) : 교수 주태근
2. 예배신학의 원리
“기독교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이 앎에 따라 응답함으로 가장 심오한 경지에서 실재에 접근하려는 신중한 행동이다.”
ⓐ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중심의 원리
기독교의 예배는 삼위일체 중심적인 것이다. 먼저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백성은 그에게 응답하는 것이 참된 예배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의 계시의 선행 없이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첫 머리에 엄격한 명령을 두심으로써 모든 우상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내게 있게 말지니라.”(출애굽기 20:3) 우상숭배는 보이는 대상 앞에서 절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토져(A. W.Tozer)는 말하기를“우상숭배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가치한 것을 즐겨 생각하는 데 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 그를 기쁘시게 하며 보강시켜 드릴 수 있는 어떤 외적 찬사를 바치는 듯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무가치한 군주유형(君主類型)이고 예배의 평판을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자유롭고 책임적인 존재로서 이 세상에 살도록 하셨으며, 사랑과 공의로 그의 창조를 건설하는 데 우리의 협동을 요청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그것이 역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변화시키는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된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이 만남 속에서 우리는 그의 인격과 행동들을 인하여 그를 찬양하고 찬미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우리에게는 예배의 대상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오직 그만이 하나님이시오, 전능자시오, 우주의 왕이시오, 만유의 주시다. 그리고 그 분은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속하시기 위해서 역사 안에서 행동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그의 은혜로운 이런 행위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성하신다. 그는 우리와의 계약관계에 들어가시며 자신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그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벧전 2:9) 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분명한 것은 교회는(우리들은) 무엇보다도 기이한 행동들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부름 받은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또한 예배의 행위중심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만 발견 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 속에서만 새로운 차원의 눈을 뜰 수 있게 된다. 「지글러」는 믿음의 대상으로써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교회 예배의 기초는 그리스도론적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지글러」에 의하면, 교회는 예배의 모든 활동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고계시는 기적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사람이 구속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가능케 된다고 한다. 또한 덧붙여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믿음의 대상이시다. 그리스도교와 세계의 다른 위대한 종교들 사이의 주요한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는 자신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영원토록 아버지를 찬미하는 분이시다. “교회의 예배는 항상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하나님께로 이끌림 받도록 인류에게 다가 오신다.”라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확신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 자신은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기독교의 첫째가는 진리이다.(요 3:16, 엡 2:8-10) 그리고 이 진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교회의 행위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1회적인 구원사건이기 때문이다. 골고다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욕을 당하시고, 부활에서 인간의 아들이 들리움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행위가 곧 처음 예배였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사장 적이며, 예전적 삶이었으며, 화해와 해방을 선포하는 구원의 삶이었기 때문에 참 예배는 예수의 삶, 십자가, 부활, 승천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참 예배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대신하여 드리는 예수님의 제사였다.
그리고 기독교의 예배는 성령의 역사에 기초 되어진 예배로서“참된 예배는 성령의 역사로만이 이루어진다." 진실한 예배는“신령과 진정으로”예배하는데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인간의 영혼에 접촉할 때 비로소 우리 속에 불붙여진다. 형식과 의식만으로는 예배를 산출하지 못한다. 우리가 모든 좋은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고 또 가장 훌륭한 예배 의식을 가질 수도 있지만, 성령이 우리의 영혼에 접촉하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 노래와 기도와 찬양이 모두가 예배와 통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배는 그런 것들 이상의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불에 의하여 불붙여져야한다.
예배에 있어서 성령의 본질적인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시키셨고, 오순절 이후부터 주님의 재림까지는 성령을 통하여 완성시키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순간에 얻는 감동과 변화와 바른 삶의 인도들은 모두가 다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 빌헬름 한(Wilhelm Hahn)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예배 가운데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역을 깨닫게 하고, 그 인간들로 현재적인 응답을 하도록 역사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며, 말씀을 전파하고 특별한 은사를 함께 나누었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배 안에서 자유스러운 마음의 문을 열고 합당한 시간에 응답하도록 인도하신다.
ⓑ 성경중심의 원리
성서는 예배의 중심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말을 수레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전달한다. 성서는 성령님에 의하여 사람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활동을 써 놓은 기록인 이상, 성서는 예배에서 그 객관적 내용의 주된 원천이다. 성서는 예배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개신교 예배는 모든 예배의 형태와 내용과 메시지가 성경을 바탕으로 한다. 성경을 떠난 여하한 신앙의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개혁 교회가 지켜온 살아 있는 정신이다. 말씀이 중심이 됨에 따라 자연히 설교도 개신교 예배에서 클라이맥스가 되어 있다. 성서는 교회의 생명의 책으로 예배를 위한 객관적 내용을 제공하고 하나님을 인간에게 알려준다. 성서는 교회의 구원과 생활의 안내서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지식의 원천이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에서 그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예배를 지도하는 객관적인, 지성적인 내용은 성서 안에서 발견된다.
ⓒ 가족적이며 공동체적 원리
가족적이며 공동체적인 예배는 지극히 성서적인 예배의 특징이 될 수 있다. 구약의 예배는 모세이전의 족장시대까지 개인적 예배가 존재했으나 그 이후에는 공동체적인 예배가 시행되었으며, 신약 - 특별히 사도행전 이후 - 의 예배들은 거기에 가족적인 특징까지 부여되며 가족적이며 공통체적인 예배를 보여주고 있다.
「한스 큉」의 교회론에서도 볼 수 있듯이“에클레시아”는 실제로 모이는 과정과 모이는 단체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러므로 집회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클레시아”는 구체적으로 함께 모이는 일이, 모임이, 특히 예배의 모임이 거듭 되풀이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배자들의 가족적인 개념의 설정이란, 서로가 각각 다른 개체의 존재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의 연관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 개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의 공동체는 언제나 단수적인 개념(I) 보다는 복수적인 개념(We)의 모임으로써 예전의 내용과 구성을 생각해야 되며 전체적인 영적 성장과 발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개신교 예배는 교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없애 버림으로써 먼저 그리스도교 예배에 나타난 단순성과 자발성 그리고 능동성을 회복하였다. 로마교회의 예배는 체계화되고 전문화되어 그 미사는 사제에 의해서만 집행되고 신도들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 대항하여“모든 크리스천은 다 제사장이다.”라는「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의 외침으로 평신도들도 예배에 직접 참가 할 수 있게 되였다.23) 여기에서 공통체적인 예배로서의 예배인식의 지평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예배의 교회론적인 원리
예배는 교회론적이다. 즉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는 활동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대한 예배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교회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사역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교회는 교회의 구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사역들을 선포하고, 이야기하고, 설명하며, 즐거워한다.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할 것은 “개신교의 ‘믿음으로만’의 사상이 지나친 개인주의 신앙으로 해석되면서 예배를 개인의 신앙의 탄원이나 성취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 예배학자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은 특별히 미국의 개신교회안의 경건주의(pietism)에서 온 것인데, 개인주의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을 선포하는 차원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를 개인적인 신앙체험으로 주관화하여 예배를 마치 개인 신앙의 증언으로 변질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Richard M. Spielmann, J. Coert Rylaarsdam 등). 사실 이 문제는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에서 심각하게 보여지고 있는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예배의 선교론적 원리
J. G. Davies라는 예배학자(Worship and Mission)는 지금까지의 모든 예배신학이 내면화된 예배신학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예배는 본질적으로 선교, 특히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보아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교로서의 예배의 궁극적인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수행하시는 모든 구원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수행하시는 모든 구원이 곧 선교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봉사 그리고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봉사(God's Ssevice and Our Service to God: Gottesdienst)라고 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선교에서 보아야 한다는 신학적인 논거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께서 세계를 향해 하시는 활동을 선교로 해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Davies는 이런 신학적인 입장에서 세례와 성만찬을 예증 삼아 접근한다. 지금까지 내면화된 예배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두었고, 세례는 교회의 멤버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며, 성만찬은 개개인의 삶을 지탱하고 보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여 왔으나, 이제는 세례는 교회나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인 치시는 사건이며, 성만찬은 목사나 사제가 집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집례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다는 의미는 교회의 교적부에 교인으로 등록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을 드러내는 고난 받는 공동체에 보냄을 받는 의미가 바로 세례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례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역에 동참하는 안수의 행위라면, 성만찬은 그 안수의 의미를 계속해서 새롭게 갱신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세례가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고 그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성만찬은 그 헌신을 계속해서 새롭게 다짐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예배를 선교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교회의 정체성은 증언이요, 섬김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드리는 예배는 세상에 대한 섬김을 통하여 표현되어지는데 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배가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일이었다면, 우리들이 그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을 위한 대리 섬김은 곧 예배인 것이다.
ⓕ 예배의 종말론적인 원리
예배는 현세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인 소망을 기대한다. 특히 성만찬은 그의 오심, 이 시대의 종말, 새 하늘과 새 땅 등의 표지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참된 예배는 항상 예배자의 실존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 그것은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 앞에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끊임없는 힘의 원천을 제공해 준다. 처음부터 교회는 본질상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공동체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종말론적이다. 종말론적인 행위로서의 예배는 세례와 성찬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바울의 증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 뿐 아니라, 부활에 이미 참여함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회개와 죄의 용서가 이미 종말론적인 현실인 것과 같이 세례는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종말론적인 약속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 뿐 아니라, 장차 오는 시대에 진행되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치리에서 오는 것이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다시 사는 종말론적 현실의 경험을 개개인의 경험과 신앙공동체에서 지속하는 행위이다. 교제로서의 성만찬은 새 예루살렘의 그림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미리 맛봄이며, 살아 있는 기억의 행위(anamnesis)인 것이다. 여기서 주의 만찬은 계급간의 갈등, 권력투쟁, 인종차별 등 오늘의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긴장을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 안에서 새로운 용서와 화해의 시험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결국 예배와 예배하는 회중은 이 역사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보고 또 일하고 초청 받았기 때문이다. 예배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행위는 기도 특별히 주기도문에서 절정을 이룬다. 주기도의 핵심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치리를 간구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향한 간구였으며, 이는 예배 처음부터 반복된 기도였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간구하는 종말론적인 행위였다. 아울러 신약성서의 마지막 기도인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의 간구는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실 분께서 주의 이름으로 모인 두 세 사람 가운데 오시기로 약속하신 분의 임재를 간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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