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서 설교원고

하갈을 부르신 하나님(창21:9-21)-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25. 10:00

하갈을 부르신 하나님(21:9-21)

 

 

목사 주 태근 

 

이 세상에서 가장 몸매 좋은 발레리나 이사도라 던컨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버나드 쇼에게 당신 두뇌와 나의 육체가 합작된 아이를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버나드 쇼는 대답합니다. ‘, 당신 두뇌와 나의 육체가 합작될 수도 있습니다.’이 이야기는 유전자의 질을 따질 때 거론되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요즘 미국 명문대의 여학생들이 자신의 난자를 팔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사도라 던컨의 몸매와 버나드 쇼 정도의 두뇌를 가진 난자와 정자의 경우 부르는 게 값이라고 말합니다. 런던 인간부화연구소는 미인 천재 스포츠형 등으로 유전자를 분류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정란 하나당 96명의 가상 인간을 그려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황우석 서울대 석좌교수팀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놓고 생명윤리 논쟁이 가열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복제된 배아 역시 분명히 인간의 생명이며 따라서 인간배아에 대한 실험이나 조작은 인간의 존엄성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기독교생명윤리협회도 인간 체세포 복제행위는 연구 치료 목적이라 할지라도 사용하는 기술이 인간복제 기술과 동일하므로 언제든지 복제인간의 탄생으로 연결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이는 모든 형태의 인간복제를 금지하는 유엔총회 선언문 내용에도 위배된다고 말했습니다.

 

지난날 조선시대에 있었던 씨받이는 정실부인에게 태기가 없으면 직업적으로 종사를 잇게 해주었습니다. 최근 등장한 인터넷에 나타나는씨받이 광고가 우리를 경악케 합니다. ‘건강하고 똑똑한 아기를 원하세요? 저희가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아기를 드리겠습니다라며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부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20대의 미혼 또는 기혼 여성들이 대리모를 하여 주고 그 대가로 3-4천만 원을 받는 행위, 일명 '생계형 대리모'가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의사들은 불임부부가 자신들의 정자와 난자에 의해 아기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리모에 의해 출산을 하는 방법밖에 없으므로 대가관계가 없는 대리모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윤리의 위기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복제로 인한 가장 존귀하게 여겨야할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과학문명으로 말미암아 상실되는 시대입니다. 씨받이 대리모의 유행이 성윤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오늘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발생한 일입니다.

 

하갈은 참 꿈 많은 소녀였습니다. 외모도 아주 출중했습니다. 모든 동네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그 당시 최고 권력자인 바로 왕이 머무는 그 궁궐에 뽑혀 들어갈 정도가 되었으니 보통미인이 아닙니다. 잘만 하면 왕의 총애를 받아 왕자라도 하나 낳을 수 있었고 그 때가 되면 전 세계의 권세를 거머쥘 수 있는 입장에서 그녀의 가슴은 들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들로 말미암아 이 하갈이란 여인은 남의 여종이 되어버렸고 원치도 않게 고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먼 곳 가나안땅에 들어와 남의 종살이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지 못하는 그 주인 부부를 위하여 씨받이 노릇을 감당해야할 때는 죽고만 싶었을 것입니다.

 

주인의 침실에 들어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난 뒤에 하갈이 낳은 아들이 바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이스마엘!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점점 더 성장하면서 보니 자신이 서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을 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가 15살이 되었을 때에, 정말 뜻밖에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에게 동생 이삭이 생긴 것입니다. 동생이 생긴 그 순간부터 이스마엘의 위치와 신분은 급전 직하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동생 이삭에게 쏠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그래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이삭을 위하여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큰 잔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온 가족들의 관심은 이스마엘로부터 이삭에게로 다 쏠려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마엘이 자기의 사랑을 뺏어간 그 어린 배다른 동생 이삭을 희롱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상황이 되면 자기의 사랑을 뺏어가고 자기의 아버지를 뺏어간 동생을 그냥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 아브라함의 본처 사라는 씨받이였던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쫓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기가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남편에게 항상 죄짓는 심정으로 남편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순종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남편이 바로왕에게 가라 하면 바로왕에게 가고, 아비멜렉 품에 가 안겨라 하면 그냥 아비멜렉 품에 안길 정도로 남편의 말에 고분고분 순종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이 소리 한번 외치고 난 뒤부터 부인 사라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이를 낳기까지 하갈이란 몸종이 자신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왔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깡그리 잊어버린 채 그는 매정하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기로 결심을 하고서 남편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한번도 사라가 남편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낳고 난 뒤에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여종과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이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근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근심 끝에 하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사라의 말대로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광야로 내쫓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서 메어주고서는 그 자식을 이끌고 브엘세바 광야 쪽으로 내몰아버렸습니다.

 

하루아침에 이 모자는 억울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광야에 내던져진 존재로 전락되었습니다. 씨받이처럼 자식 낳은 공로는 사라지고 헌신짝처럼 버림받은 쓸모없는 인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일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광야에서 모든 일들을 다 책임져야 하고 아들을 먹여 살려야하는 그런 입장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갈은 아들을 위해서 가지고 온 모든 양식을 아끼고 또 아꼈습니다. 자신은 먹지 않고 아들을 그 배고플 때마다 조금씩 주면서 양식을 아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신이 가지고 왔던 양식들도 다 떨어졌습니다. 여기에 또 물까지도 떨어졌습니다.

 

배고파 어찌할 줄 모르는 이 아들이 엄마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 내리쬐는 사막의 태양빛 아래서 이 아들이 목말라 합니다. 그리고서는 엄마에게 부르짖습니다. " 엄마 물 좀 주세요. 엄마 배고파요. 엄마!" 그러나 하갈은 이제 더 이상 줄 빵과 물이 없습니다.

 

아들은 점점 더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하갈은 이렇게 말합니다."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아들이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이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살릴 수 있는 방도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여기에서 울고 엄마는 저기에서 울고 서로 바라보면서 그들은 지금 울고 있습니다. 어머니로서는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기에 그저 땅을 치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방성대곡이라는 이 말은 울 기력이 없도록 울었다 라는 것입니다.

 

방성대곡하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그 탄식과 그 눈물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시면서 돌아서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117절과 18절은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이미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리셨습니다. 그들에게 진노하셨고 그들을 광야에 던져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광야에 던져버린 하갈의 눈물과 그 통곡 소리를 들으시면서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라고 말했습니다. 기적의 샘물을 준비하시고 게셨습니다.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하여 새생명의 삶을 허락에 주셨습니다. 우는 자의 탄식이 하나님을 움직였습니다.

 

여기서 통곡은 간절한 눈물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구하고 구하였더니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어 아랍인들의 조상이 되게 했습니다. 현대 아랍인 3억 인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마엘의 하나님도 되셨습니다.

 

일본이 낳은 최고의 전도자인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이라는 분이 게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첩인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본처의 집에서 말할 수 없는 구박과 천대와 멸시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지고 항상 어두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소년시절 어느 날 양지 바른 담장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머리가 너무 아프고 속이 매스꺼워 기침을 했더니 붉은 피가 솟아 올라왔습니다. 병원에 달려가서 진단한 결과 몹쓸 전염병인 폐병 3기로 치료의 가망이 없다는 사형선고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밖에서 오후 햇빛을 받고 앉아 있었는데 거리에서 북을 치며 찬송가를 부르면서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하고 도요히꼬에게 전도지를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전도지를 받아 그것을 붙들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나 같이 가난하고 병들고 천한 기생의 자식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전도자가 대답합니다. “그럼요! 누구든지 예수를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도요히꼬는 그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기생의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의 인생이 전환되어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빈민들의 아버지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성자가 되었습니다. 죽을 인생이 변하여 남을 살리는 인생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절망과 실망의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와 역전의 인생으로 구원하셨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비단 그들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때론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도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타고난 배경으로 인해 더 잘 나가고 마치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로 행복하고 자신 있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마치 이스마엘처럼 버림받아서 처절한 절망 가운데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아무런 빛이 없어서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고통과 절망의 늪 한 가운데 빠져서 도망쳐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절망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 내 뼈 속으로 스며들어 하루하루 약으로, 오락으로, 즐거움으로, 내 가슴을 채우지 않으면 금방이라고 미칠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절망에 만성이 되어서 무의미로 가득 찬, 허무의 삶을 살아갑니다. 지금 내가 달려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오늘 하루 그저 즐겁게,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그저 바쁘게 살아갑니다.

 

지금의 나는 무엇인지, 내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내가 왜 살아있는지,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무의미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면 하나님께 한바탕 소리를 지르지만, 하나님은 응답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부답인 채로 하늘에 앉아서 마치 나의 고통과 절망을 즐기고 계신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