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서 설교원고

네 신을 벗으라(출3:1-5) 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27. 15:45

네 신을 벗으라/3:1-5

 

 

목사 주태근

어느 날 태양이 작렬 하는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양을 치는 모세는 애써 그늘을 찾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습니다. 양들은 더위를 견디며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호렙산 중턱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모세의 눈앞에 이상한 일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유난히 맹렬하게 타오르는 그 불은 계속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이상한 그 광경을 가까이 가서 보리라는 생각으로 모세는 그 불꽃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 불꽃 가운데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 예사롭지 않은 부름 앞에 그는 당황하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머뭇거리는 모세에게 조용한 그 음성은 다시 계속되었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모세의 발걸음은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음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날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사는 대 전환점이 만들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개인과 인류의 역사에는 커다란 변화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남의 접촉점을 위하여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명령하셨습니다. 신발 하면 필리핀의 전 대통령부인 이멜다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멜다는 의상이나 구두에 욕심이 많아 2천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1백만 원대를 넘는 구두만도 그 중의 반이 넘었습니다.

 

오래 전 황영조 선수의 운동화는 특별히 제작하여 만든 것으로 당시 돈으로 1억 원이 넘는 액수에 해당하는 신발이었습니다. 신은 비싼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편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신은 신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벗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이 그들이 회당인 모스크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신을 벗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올라갈 때에 신을 벗습니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무덤을 방문할 때 신을 벗습니다. 그들의 경외와 존경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다리는 수천 년간 노출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제 2의 치부라고 여겼습니다. 특히 여성의 다리가 그러합니다. 영국의 상류 사회에서는 오래 전에는 피아노 다리도 그냥 나와 있는 것이 상스럽다고 양말을 만들어 신겼습니다. 영국에서는 숙녀 앞에 닭다리를 내놓으면 실례가 된다고 합니다.

 

18세기 영국의 작가 헨리 필딩은 "여인이 신발 벗은 발을 노출시키는 것은 죽음에 버금가는 수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그런지 서양 사람들은 신을 잘 벗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침실에서도 신발을 신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신발을 벗습니다.

 

비행기에서도 앉으면 신발부터 벗습니다. 어떤 취객이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에 타자마자 옷을 벗기 시작합니다. 택시 기사가 "손님, 옷은 왜 벗습니까? 입고 계세요"라고 말했더니 취객은 ", 여기가 우리 집 아닙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여기는 댁이 아니라 택시 안입니다" 라고 말했더니 취객은 "그럼 진작 얘기하시지, 나는 우리 집 방안인줄 알고 들어올 때 신을 벗고 왔잖아!" 하고 대답했습니다. 성경은 신을 벗어야 하는 경우를 여러 번 말씀합니다.

 

여호수아서에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 하신 명령을 듣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발의 신이란 세속에 살면서 더러워진 인간성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워진 인간성을 다 벗어야 합니다.

 

신명기서 에서는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은 지위와 권리를 표시합니다. 신을 벗었다는 것은 지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기서에는 "옛적 이스라엘 중에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 신을 벗어 그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의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을 벗었다는 것은 권리를 양보하거나 권리를 이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었습니다. 세속에 살면서 더러워진 인간성을 벗었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하나님께 이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집트의 왕자로서, 양치기로서 모든 지위와 권리를 다 포기하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이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자기라는 신을 신은 지 40, 그것을 벗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바로의 궁궐에서 자기 신을 신고,

 

자기를 세우는데 40년이 걸렸고 이것을 벗는데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 걸렸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육학에서 말하기를 배운 것을 버리기까지는 그만큼의 세월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성격과, 고집과, 인간성을 버리는데 그만한 햇수가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배운 것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붙으면 안 빠지나 봅니다. 지난날 모세는 자기가 능히 자기 백성들을 지도할 인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해라지금까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야, 네 백성이 아니고 내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자기라는 것을 포기할 때까지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열심 낸다고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열심을 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열심히 하게 하셔서 해야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내릴 때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곧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정의감과 의협심과 그리고 애국심으로 불이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타오른 불로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인을 죽이는 살인자가 된 이후에 그는 모든 타던 불이 다 꺼진 채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40년 동안 잿더미로 거기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때 교회에서 열심 내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열심 내다가 그 불이 꺼질 때가 있습니다. 모세도 자기가 열심 냈습니다.

 

그런데 살인자가 된 이후에 그 불이 꺼지고 미디안 광야에서 잿더미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사라지지 않는 불을 보여 주십니다. 사라지지 않은 불꽃은 모세에게 있어서 미래에 대한 거룩한 비전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향한 축복된 계획을 체험을 한 것입니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스러움의 의미라는 책을 썼습니다. 오토는 이 책에서 종교경험이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비합리적이며 감정적인 것이 종교경험의 본질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토는 어떤 신적 존재에 대한 성스러운 느낌, 즉 종교적 감정을 '누미노스'(NUMINOUS)라고 불렀는데, 크게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로, 공포감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자신의 무능함과 죄인 됨을 발견하고 두려워 떠는 감정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무한히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전율(戰慄)을 느끼는 것입니다. 둘째로, 신비로움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모습 앞에 압도당하여 입을 딱 벌리는 것입니다.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신비로운 경이감에 사로잡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셋째로, 매혹의 감정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때 느끼는 황홀감입니다. 어마어마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이끌려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매혹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오토는 이와 같이 성스러운 감정, 즉 누미노스의 감정을 세 가지에서 체험한다고 말했습니다.

 

신적인 대상, 신적인 존재와 관련된 사람들, 그리고 신적인 것과 관련된 사물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사물들 속에서 누미노스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토의 분석은 모세의 하나님 체험을 설명하기에 도움이 됩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의 신발은, 바닥만 있어 끈으로 발목에 묶는 샌들입니다. 그러니 신을 벗는다고 할지라도 신보다 발이 훨씬 더러울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깨끗한 발을 원하셨다면 발을 씻으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을 벗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신을 신는 것은 자유인의 특권이었습니다. 지체 높은 사람만 신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예에게는 신이 없습니다. 주인만 신을 신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은 더 이상 아버지 앞에 아들이라고 말할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를 노예로 보소서"하며 맨발로 아버지께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는 내 아들이다"하며 하인들에게 "신을 신기라"고 명령하였습니다(15:22).

 

하나님이 모세에게 원하신 것은 왕자의 위엄이나 양을 소유한 목동의 부유함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종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종이란, 주인을 섬겨야 할 의무와 책임만 있을 뿐, 주장할 권리와 누릴 자유가 없습니다. 신학교를 가는 것은 종이 되기 위하여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이나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분을 받는 것, 기관의 임원이 되고 구역의 일꾼이 되는 것, 교사, 성가대 등 어떤 사명이라도 신분 상승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다 주님 앞에서 한결같은 종일뿐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했습니다(2:7). 모세가 40년 또 40, 낮아지고 겸손해지므로 종이 되었을 때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양도하는 자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종이 되기까지 80년 동안을 기다리셨습니다.

 

기꺼이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주님께 양도해야 합니다. 권리양도 이것이 주님의 바른 일군이 되는 길이요 신앙인으로 성공하는 길입니다. 파인애플스토리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이 책은 네덜란드령 뉴기니아에서 7년에 걸쳐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 졌습니다.

 

이곳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한 선교사가 파인애플을 마을에 들여오기를 결심하고 100여개의 파인애플 모종을 심게 됩니다. 3년이 지나 열매를 수확할 즈음이 되었지만, 이미 원주민들이 다 따가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파인애플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병원 문을 닫기도 하고, 상점 문을 닫기도 하고, 큰 셰퍼드를 길러도 보았고, 멋진 칼을 대가로 주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농사한 파인애플을 다 내주어버리고 새로운 모종을 심기까지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파인애플을 지킬 수 없었고, 오히려 원주민들은 더 이상 선교사에게서 의료, 상품, 등의 혜택을 받지 못하자 마을을 버리고 숲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선교사는 고민하다가 파인애플 밭을 기도하며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제는 자기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놀랍게도 마을사람들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하나님의 파인애플을 훔쳤다고 자책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교사에게 찾아와저희들이 이제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었군요.” 하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새로운 복음의 불길이 마을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파인애플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우리는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살아갑니다. 이제는 자신의 신을 벗어야합니다. 나의 건강, 지혜, 경륜, 능력, 계획, 직업, 의지, , 재산, 활동, 명성 등을 벗어야합니다.

 

이제 우리의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게 될 때 비로소 그곳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풍성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모세에게 이른 대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