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서 설교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출36:1-7) 목사 주태근

주 바나바 2022. 8. 29. 10:57

자원하는 마음으로(36:1-7)

 

 

목사 주태근

 

오스트리아가 낳은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요 작곡가인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본래 의학을 공부하고 미술에도 남다른 조예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음악을 공부한 동기가 흥미롭습니다.

 

그 동기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음악은 대중화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한 곡들을 작곡하고자 애썼습니다. 또한 그는 스스로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했던 음악가로도 유명합니다.

 

그것은 그가 돈에 대해 가지고 있던 독특한 가치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비싼 출연료를 받기를 거부했고, 비싼 음식 대접받기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여유분의 돈은 교회나 사회사업 기관에 아낌없이 헌금하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을 언제나 최소화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돈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잠시 맡겨준 공적인 것이지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가는 곳마다 따뜻한 인간미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예술가로서 흔하지 않은 인격적인 존경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그의 연주가 끝난 후 한 음악도 젊은이가 그의 손을 잡고 훌륭한 연주를 치하하면서 "저도 선생님처럼만 연주할 수 있다면 제 자신을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 했더니 이런 대답을 남겼다고 합니다.

 

", 오늘의 저의 연주는 지금까지 제 자신을 바친 결과이지요. 그렇지만 친구여, 나는 당신이 음악을 위해 자신을 바칠 때 왜 무엇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자 하는지를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는 헌신의 소명과 목적을 상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음악으로 음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바쳤고, 재능을 바쳤고, 노력을 바쳤고, 정성을 바쳤고, 물질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 소중한 음악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지난날 장개석 총통이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그의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화장실을 검사했는데, 그때 제일 더러운 화장실이 중국인 화장실이었습니다. 그 사실에 마음 아팠던 장개석 학생은 중국의 명예를 위해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 몰래 나와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밤늦게 학교를 돌아보다가 불이 꺼지지 않은 방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기숙사의 불이 하나 둘 꺼지더니 마침내 모든 방의 불이 다 꺼졌는데, 유독 한 방만은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저 방의 아이는 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서 한 학생이 나오더니 총총 걸음으로 화장실로 가서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 “, 교장선생님” “아니, 이 밤에 웬 청소인가?” “저는 중국인 신입생인데, 와서 보니 저희 중국인 화장실이 가장 더러웠습니다. 그래서 저의 나라의 명예를 걸고 제가 매일 밤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졸업할 때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교장선생님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장개석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수첩에 장개석이라는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특별 장학금을 주고 그에게 앞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예장 총회 세계선교부 : 제1회 총회 세계선교대학 지도자 전문 강사 교육)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 미국동부지역 연합 부흥 성회 뉴저지 주님의 교회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서 광야를 지나가는 여정의 한 과정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중에 두 가지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는 석판에 율법을 받고, 또 하나는 성막 짓는 계시를 받습니다.

 

율법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요, 또 이것은 인간이 가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 사함을 받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입니다. 그런데 이 성막은 하나님이 직접 지어주지 아니하고 사람의 손으로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는 우리의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받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본문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21)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22),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낳고"(25), "마음에 감동을 받아"(26),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29) 계속해서 '마음'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감동된 자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뭘 가진 사람,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음에 감동되는 자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마음의 감동으로 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성막'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성도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는 성막도 되지만 우리의 몸이 성막입니다. 구약의 성막이 성전으로, 이제는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 몸의 성전은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외형적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심은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감동하는 자, 자원하는 자, 즐겁게 바치는 자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심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 성막을 짓기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에 감동된 자, 마음이 지혜로운 자, 자원하는 자였습니다. 마음에 진정으로 헌신하기를 원했던 자들이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는 자원하는 마음이 일어나 스스로 시간과 재물과 몸을 바치기를 즐겨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특권입니다.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을 계속 유지할 때 가장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습니다. 일꾼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성소의 일을 위하여 지혜로운 자들이 자원하여 필요로 쓸 것을 바쳤습니다. 자원하는 예물을 아침마다 가져 왔습니다. 성소를 위하여 쓰인 재료들이 넉넉하여 오히려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원을 했던지 모세가 그만 가져오라고 정지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자원하는 작은 마음이 모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는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답습니다.

 

백화점 왕 워나 메이커는 교회를 특별히 섬기고 사랑했습니다. 교회도 지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기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여행을 가서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한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갈고 있는데 소가 쟁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쟁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이상한 광경에 차를 세우고 물었습니다. 그는 부자라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여보세요, 당신은 왜 소가 되었습니까?” “! 우리 교회를 짓는 데 소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소가 없으니 제가 소가 되어 밭을 갈고 있습니다.” 워나 메이커는 피가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넉넉한 가운데 교회를 짓고 그것으로 만족해했는데, 저 사람은 교회를 짓는데 소까지 바치고 저런 고통을 겪는구나.’그는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록펠러 다음으로 교회를 많이 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이 시대를 가리켜 풍요한 감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모든 물질이 완벽하게 구비되었지만... 그 곳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감옥 같은 삶이 ...오늘날 풍부하게 소유하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풍요한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욕구를 계속 채우려는 삶이 아니라... 나눔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의 의미는 결국 얼마나 많이 풍부하게 소유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의미 있게 풍성하게 나누며 살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풍부하게 소유하는 자 보다는 마음과 영이 풍성하고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322, 746절을 보면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전을 건축하고도 남을 정도로 넘치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을 대신하여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도 타락했을 때에는 자원하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그 때 다윗은 뼈를 깎는 회개를 통해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주시고 자원하는 마음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원의 심령으로 복 받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인의 54%가 일주일에 4시간이상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고, 영국은 성인의 51%가 자원봉사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이제 막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88올림픽을 시점으로 해서 92대전엑스포와 같은 커다란 국제적인 행사를 치루면서, 생소했던 '자원봉사'라는 말이 지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나 생각되어 집니다. 자원봉사는 자신의 이익이나 일시적 감정에서가 아니라, 더블어함께 살아간다는 공동체적인 생각을 가질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강요가 아닙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 끌려 나오다시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없고 그 마음속에 즐거움도 없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과 건강에 대한 강연을 많이 하는 황수관 박사를 잘 아실 것입니다.

 

감리교 장로님인데 강연을 많이 다닙니다. 이 분은 CF에도 여러 군데 출연했습니다. 침대광고에도 나오고 공기청정제 광고에도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저 분이 대중인기인이 아니고 대학 교수인데 너무 상업적이 아닌가?" 비난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아는 분들은 황수관 박사가 출연하는 CF를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이 분이 봉직하고 있는 세브란스 병원 건물을 새로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그 CF의 출연료를 하나도 자기가 갖지 않고 병원 건축에 바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변할까봐 광고 출연 계약서에 출연료 수령자를 아예 세브란스 병원으로 명시한다고 합니다.

 

황수관 박사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가 CF에 출연하게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새로 짓는 병원을 위해 얼마를 바치겠다고, 자기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큰 액수를 약속하고 먼저 강연료와 퇴직금 이것을 바쳐야겠다,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CF 출연교섭이 들어오더란 것입니다.

 

황수관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CF를 촬영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합니다. 간단한 장면, 2,3초의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밤을 새우며 수십 번을 반복해야 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CF 제작진이 황수관 박사를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아니 다른 분들은 출연료를 자기가 가지면서도 촬영할 때 힘들어하고 짜증을 내고 심지어는 펑크도 내는데 박사님은 출연료도 자신은 하나도 받지 않으면서 이렇게 웃는 얼굴로 힘든 것을 잘 감당하십니까?" 자원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내기 위해서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참여와 자원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참된 신앙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물을 드릴 때도 마찬가지이고, 찬양을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무엇보다도 마음 자세가 중요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에 풍성한 열매가 맺혀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7)